화가 김의창의 그림이야기

호주로 어학 연수를 떠나다 (1)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나다


   기회가 닿아 1996년 7월 28일부터 8월 29일까지 한달 여 동안 호주와 뉴질랜드를 어학 연수차 다녀왔다.  그 때에 기록한 일기가 있어서 이를 정리하여 여기 실어본다.  혹시나 호주 여행에 관심을 가지신분, 어학 연수를 떠나려는 분들에게 참고가 될 수 있었으면 한다.

제 1일
1996년 7월 28일 (일)
  
아침 6시 대한항공 비행기는 그렇게 미끄러지듯 브리스베인(Brisbane) 공항 활주로에 서서히 내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창 밖을 바라보며 다가올 이국에서의 생활을 머리에 떠올리고 있었다. 밖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고, 활주로에는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보였다.

   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고 하여 모두들 대합실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어렵지 않게 우리를 데려갈 버스의 운전기사를 만날 수 있었다. 반바지이지만 웃옷은 버스기사들이 입는 유니폼을 입고 있어서 쉽게 말을 붙여서 그가 대학(Queensland University)에서 나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일행이 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아서 나올 동안 서로들 바깥 경치를 본다든지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든지 하고 있었다.

   비는 어느 듯 멎었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가지각색이었다. 좀 쌀쌀한 가을 날씨 같았는데 여름처럼 반소매 반바지차림의 사람이 있는가하면 겨울 옷차림으로 토퍼를 걸치거나 외투를 입은 사람도 눈에 띄었다. 겨울이라 지만 아열대 기후여서 나무와 풀들은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공항 대합실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무료로 진열되어 있는 팜플렛들을 챙기었다. Brisbane은 물론이고 선샤인코스트(Sunshine Coast), 골드코스트(Gold Coast) 등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많았다.

   드디어 모든 일행이 다 모여 버스에 올랐다.  대학까지 Brisbane 시가지로 가는 길은 꽤 시간이 걸렸지만 모두들 낯선 이국 땅의 풍경을 바라보느라 지루한 줄 모르고 바깥만 보고 있었다.(공항은 시가지에서 동북쪽이고 대학은 서남쪽이어서 공항에서 시가지를 거쳐 대학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변두리는 그렇지 않았지만 중심지는 꽤나 잘 정비되어 있는 도시였다.  관리들이 별로 주민의 세금을 헛되이 쓰지 않았구나 하는 것을 절감할 수 있을 정도로 다리나 도로들이 잘 정비되어 있었고 오랜 기간 정성 들여 건축한 것들임을 짐작케 하였다.
  
   아침 8시에 버스는 시가지를 지나 대학구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대학이라야 담도 없고 대문도 없는 너른 터에 건물들만 있는 그러한 곳이었다.  잔디가 깔린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이 축구(미식)를 하고 있었고, 야외 수영장에서는 수영을 즐기는 학생들도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고 우리도 수영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더운물을 넣어서 하고 있었다.)  우리가 공부하게 될 강의동에 도착하니 Merry와 Margaret 라는 대학 당국의 직원이 나와서 친절히 안내하였다. 이층의 강의실에 들어갔는데 넓은 교실을 칸막이를 하여서 넓게도 쓰고 좁게도 쓰게 하여 두었었다. 일행이 앉으니 간단한 일정 소개가 있었고, 곧 이어 하숙집(home stay)주인 아줌마들이 와서 이름을 부르고 인사하고 각자 하숙집으로 가게 되었다. 몇 명인가 불려가고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내 이름이 불렸다.

   Christne는 중년의 조금 뚱뚱한 부인이었다. 능숙한 솜씨로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하고 차에 나와 짐을 챙겨 싣고는 집으로 향하였다.  학교까지는 걸어다닐 만큼 가까우니 나에게는 다행이라면서 차를 능숙하게 몰았다. home stay 학생이 여러 차례 묵었다 면서 한국 학생은 두 번째라고 하였다.  그전에는 부산의 학생이라면서 나중에 주소와 이름을 적은 공책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내가 한국에서 알기로는 남편은 의사이고 부인은 교사인 것으로 알았는데 둘 다 교육대학을 나와서 남편은 의사의 길로 가고 아내는 퇴직 후에 시간제로 근무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하숙집까지 가는 길은 포장은 잘 되어 있었으나 구릉지로 굴곡이 심하였고 숲이 우거진 곳에 드문드문 집들이 있었다. 하숙집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깔끔한 집은 아니고 우중충한 맛이 났고 실내도 마찬가지로 좀 퇴락한 느낌이 있었으나 튼튼하게 지어졌고 내방은 조그마하였으나 침대 하나에 책상 하나와 조그마한 옷장이 있는 그러한 방이었다. 양탄자가 깔려 있었으니 물론 구두를 신고 생활하여도 되었으나 실내에서는 슬리퍼를 신고, 침대에 들 때에는 침대 앞의 조그마한 깔개 위에 슬리퍼를 벗고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바깥주인 Gerald와 인사를 나누었다. 모든 존칭은 가족끼리라 생략되었다. Gerald Meijer씨가 Gerry라고 부르라는데 나는 Kim이라고 부르라고 하였다. 이름을 부르게 하면 나중에라도 좀 곤란할까 보아서였다.  한국에서 사 갖고 간 영문 Korea란 책자를 선물하면서 한국에 대해 잘 이해해주기 바란다고 말하였다. 쥬스를 한 잔 주기에 마시고 나서 그들이 권하는 대로 여독을 풀기 위해 한잠 자기로 하였다.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12시 30분. Christine가 해주는 샌드위치와 야채 수프를 먹었다. 샌드위치는 빵 두 조각과 야채로 만들었는데 별 맛도 없었다. 후식으로 사과와 오렌지를 주었다. 원래 자고 나면 Gerry가 함께 산책을 하기로 하였는데 어디 갔는지 없어서 또 잠을 잤다.

   오후 네 시쯤 잠결에 사람소리가 들려서 깨어보니 Gerry가 돌아온 듯.  그와 함께 학교까지 길도 알아둘 겸 산책을 하였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었는데 그는 길가에 피어 있는 꽃들을 설명하기도 하고 옛날에는 호주에 도둑이 없어서 방범 창을 한 집이 없었는데 저기 보이는 것처럼 요즈음에는 방범 창을 한다는 등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내 동생이 독일에 살고 있고, 미국 캐나다 등의 여행 경력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한국에도 한 번 갔었다고 하였다.  대학구내까지 들어가서 내가 공부할 강의동까지 친절하게 안내를 하고, 돌아오는 길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별 어려움은 없는 듯하였다.  모두가 잘 아는 2차선 도로인 Hawken Drive길을 따라오다가 St. Lucia의 10th Avenue에서 큰 삼나무 있는 집이니 간단한 듯 했다.

   집에 돌아오니 대학 1년 생인 이 집 아들 George가 와있었다. 몹시 수줍은 듯 나와의 인사도 겨우 입 속으로 웅얼거리며 주고받았다.  그런데 6시경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그의 모습은 영 딴판이었다. 네모난 커다란 화덕(? 이걸 후라이팬이라고 해야하나)에 돼지고기 소시지를 능숙하게 구우면서 어머니를 돕고 있었다. 저녁 식사는 그가 구운 소시지 2개, 감자 어깨어 구운 것, 괴상한 검은 빵, 야채 샐러드였다.  후식으로는 사과 구운 것. 이걸 포크로 찍어서 껍질을 벗기며 먹는데 먹을 만하였다.

   소시지를 굽는 옆에서 Gerry와 나는 구경 만하였다.  연기가 자꾸 나기에 내가 한국 속담에 연기는 미인한테 간다는 이야기를 하였더니 Gerry가 ‘Smoke follows handsome boy.'하며 서양에도 그런 속담이 있다고 하였다.  또, 부자간의 갈등에 대한 화제로 이야기를 하였는데 부자간 갈등은 세계 곳곳이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식사 후에도 Gerry는 설거지를 도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국을 떠날 때에 아내가 설거지 등을 좀 도우라며 내게 신신당부를 하였지만 나도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Gerry 말인즉 호주에서도 신세대 부부는 남편이 가정 일을 많이 돕지만 우리 세대는 전연 손도 대지를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그와 나는 동갑이었다. 그는 한국인 사범에게서 옛날에 태권도를 배웠다면서 초단 단증을 보여주었는데 그 때에 둘의 나이가 같다는 것을 알고 함께 웃었다.  식사를 마칠 때쯤 Meijer네 3식구는 모두들 나이프로 접시를 긁으며 남은 음식을 먹는데 열중하였다.  나도 그들을 따라하였으나 그들처럼 접시에 음식 찌꺼기를 말끔히 닦아먹지를 못하였다.  우리보다는 훨씬 잘 사는(1인당 소득 약 3만 달러) 그들이지만 음식 등 물건을 아주 절약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먹고 난 식기는 세척기에 각자가 담는 것으로 설거지는 생략되었다.

   7시 30분. 내방으로 돌아왔다. 침대 밑에는 전기 담요가 깔려 있었고 Christine는 추우면 사용할 것을 권하였지만 어쩐지 전기 담요가 꺼림칙하여 그냥 자기로 하였다.  의자에 앉아 이 일기를 쓰니 불현듯 두고 온 가족들 생각이 났다.  가져간 가족 사진을 내어 책상 위에 정리하였다. 들여다볼수록 너무 멀리 와 있다는 생각이 들고 갑자기 가족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였다. 아니 벌써 이러면 안 되는데...

제 2 일 : 길을 잃다.
1996년 7월 29일 (월)

   추워서 깨어 기다리다가 일어나니 6시 30분이었다.  세수하고 산책을 하기로 하였다. 집에서 가까운 곳을 차례대로 조금씩 다니면 길도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대문을 나와서 왼쪽으로 접어들었다.  숲길에 드문드문 집들이 있고, 숲에는 닭이나 꿩 만한 새들이 노닐고 있었다.  주위 모습을 잘 보아두고 11th Avenue까지만 갔다가 돌아왔다.

   아침으로 ‘포리지(porridge)라는 오토밀 죽을 먹고 토스트 한 조각을 먹었다. 사과를 깎아먹었는데 이 사과가 우리 나라 것과 달리 작지만 달고 맛이 있었다.

   8시 5분. 드디어 학교를 향하여 힘차게 출발하였다.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색안경을 끼고, 베낭을 하나 짊어지고, 작업복 바지와 T셔츠에 봄 점퍼를 입고 등산이나 하는 차림으로 출발하였다( 호주 사람들은 거의 정장을 하지 않는다고 하기에). 25분만에 학교에 도착하니 몇 명이 모여서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밤사이에 우리 나라 말을 한 마디도 못하였기 때문에 몹시도 말을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고, 어젯밤 있었던 일들을 재미있게 하고 있었다.

   9시에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반 편성을 하여 나는 Green반이 되었다. 우리 일행 40명이 3개 반으로 나누니 우리 반은 16명이 되었다. 학교 안내가 있었고, 학생증도 발급 받았다.

   12시 30분에 점심 시간. Christine가 싸준 Roll 쌘드위치와 구내식당에서 산 볶음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말이 볶음밥이지 동양 학생들을 위해 흉내만 낸 것이지만 이것이 가장 우리들의 구미에 맞아서 일행 중에 상당수가 이것을 사먹었다. 남은 시간은 끼리끼리 학교 구내 구경.

   2시에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많이 듣고, 보고, 활동하리라고 작정하고 떠났기 때문에 힘차게 발표도 하고 열심히 수업에 임하였다.

   거의 모두가 버스로 등교를 하였고, 어제 시내 구경을 한 듯하여 좀 부러웠다. 일행 중 구ㅇㅇ씨의 주인 아줌마가 시내 구경을 시켜준다기에 따라가기로 하였다. 3시 40분쯤 그녀가 아들을 태우고 도착하였다. 함께 Toowong Village라는 쇼핑센터로 갔다.(Brisbane에는 변두리 부도심쯤 되는 곳에 7개의 대형 쇼핑센터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 나는 그림 엽서만 한 장 사고, 쇼핑센터 안을 구경하면서 돌아다녔다. 쇼핑센터는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정상 영업을 하고 목요일과 금요일은 이웃 쇼핑센터와 교대로 쉰다고 하였다. 물론 토요일과 일요일은 문을 닫는 것이 그들의 일상 생활인 듯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들의 아파트까지 와서는 대학교까지만 가는 길을 가르쳐주고 자기들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좀 기다리면 볼일을 보고 태워다 준다고 하였지만 학교까지만 가면 집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고 10분 거리라고 하여서 혼자 낯선 길을 걷기로 하였다.

   그런데 걷고 또 걸어도 학교는 나타나지 않고 날은 저물고 길을 잃은 미아 같았다. 10여분이 지나서 마침 지나가는 사람에게 학교를 묻고 겨우 도착하였으나 이 너른 학교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 Hawken drive로 나가는 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헤매다가 드디어 한 떼의 사람들을 발견하고 가까스로 길을 물을 수가 있었다.  아직 초저녁이지만 우리 나라와 달리 대학교 근처에는 상점하나 없고 인적이 드문 밤이었다.(우리 나라와 달리 내가 가본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의 나라에는 초, 중, 고는 물론 대학 근처에 상점이나 식당, 술집들은 전연 없었다.)  보름달밤에 이국의 낯선 길을 겨우 걸어서 집으로 찾아오니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하숙집 주인내외는 내가 길을 잃었다고 현관에 나와서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길을 잃은 이야기를 문법에 틀리게 말하니 Gerry는 이렇게 고쳐주었다. ‘I got lost when I was on my way to my home stay.'

   저녁은 고기, 감자, 당근, 오이 등을 넣은 것이었는데 고기가 질기고 좀 덜 익었으나 가장 한국적인 맛이 있었다.  물론 이런 것들은 큰 접시에 함께 담아서 먹는 것이 그들의 식사 습관이었다.  후식으로 딸기 얹은 케익을 나누어 먹었다.  이것을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그 가운데에 불꽃놀이를 하고 그 재가 튄 것을 그냥 나누어 먹었다.  아침부터 내가 산책을 하고 시내로 나가보고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내가 ‘young head'를 가졌다고 하였다. 그들은 식사를 너무 빨리 하였고, 내가 가장 느렸다.  한국에서는 나도 빠른 편인데.

   등교 첫날부터 길을 잃어버리고 하여서 피곤도 하고 하여 8시 30분에 내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이 글을 쓰고 바로 침대로 간다.

제 3 일 : Mt. Coot-tha의 야경

1996년 7월 30일 (화)

   아침 식사 후 Gerry한테서 버스 타는 법을 배웠다.  오늘은 City에 한 번 나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행 중에 나를 포함해서 두세 명이 걸어서 등교를 하지 모두들 멀리서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City이야기를 많이 하기에 나도 나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 곳에서는 버스가 가장 값싸고 쉬운 교통수단일 듯하였다. 버스는 구역(zone)에 따라 요금이 달랐는데 대략 원화로 1300원 정도면 City까지 갈 수가 있었다. 타면서 ‘2 Zone'이나 ’City'라고 기사에게 말하고 돈을 치루면 표를 떼어 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집에 있는 노선별 버스 안내 팜프렛을 내어놓고 나에게 친절하게도 설명하여 주었다.  나중에도 버스를 타면서 느낀 점이지만 절대로 노선표에 있는 시각을 어기는 일이 없어서 참으로 편리했다. 그 시각에 그 정류소에 가면 정확하게 버스가 왔다. 또 승객이 타서 자리에 앉으면 출발하고, 도착하고 나서 일어서서 출구로 나오면서 ‘Thank you.'하면서 내리는 승객들을 보면 여유 있게 사는 그들의 모습을 알 수 있었다. (달리는 버스에서는 승객이 일어선다든지, 음식물을 먹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학교에서는 이번 금요일 첫 주말에 단체로 여행을 가기로 의논이 되고 있었다. 첫 주말을 함께 여행해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여기고 나도 함께 하기로 하였다.

  3시 30분 경 수업을 마치고 City로 나가기로 하였다. 마침 한국에서 어학 연수를 나와서 몇 개월 째인 김○○양과 강○○양을 만나 호주에서의 생활을 들으며 함께 512번 버스를 타고 City로 향하였다.  그들은 방을 얻어서 자취를 하고 있으며, 약 4개월 째가 되면 현지인들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귀가 트인다고 하였다. 좀 고단한 외국에서의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활기차고 생기 있어 보였다. 시간이 있으면 시내 관광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들은 가버리고 혼자서 시내의 관광 안내소에 들려 지도를 구하고 잠깐 돌아본 뒤에 다시 512번 버스를 타고 학교로 돌아왔다. 아직 지리에 익숙하지 못해서 일단 학교로 돌아와서 걸어서 하숙집으로 향하였다.

  저녁을 먹으면서 Gerry가 시내구경을 시켜주겠다 기에 쾌히 응하였다. Christine가 일에서 돌아오면 가기로 하고 TV를 보다가 그녀가 밤일(그녀는 part time job을 3군데나 갖고 있는 이른바 기간제 교사였다.)을 마치고 돌아오자 9시 30분 경에 집을 출발하였다. Brisbane의 서쪽에 있는 Mt. Coot-tha에 올라갔다. 서울의 남산처럼 시가지 가까이에 있는 산으로 차를 타고 정상까지 갈 수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물론 상점들이랑 기념품 파는 가게, 음식점들이 많이 있었다. 이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Brisbane의 야경은 제법 볼만한 것이었는데 Gerry는 자기 고장 자랑을 많이 하였다. 호주의 3번째 큰 도시인 Brisbane은 인구 약 130만 명으로 Brisbane강이 돌아 흐르는 세모꼴 모양의 땅이 이른바 City로 가장 번화가이고 그 둘레를 많은 동네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Gerry는 세계에서 Brisbane이 가장 넓은 도시라고 자랑하였는데 정말 그런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그런데 그 Mt. Coot-tha에는 오래 있지를 못하였다. 바람이 제법 불어오고 아무리 아열대 지방이라 지만 겨울이라 춥기도 하였다.  나는 제법 따뜻한 점퍼 차림이었으나 Gerry와 Christne 는 여름 옷차림이라 추위를 견디지 못하였다. 그래서 바로 차를 타고 시내로 향하였다.

   Gerry가 내게 농담으로 아직 캉가루를 보지 못하였으니 보여준다면서 시내의 Brisbane 강가 한 곳으로 안내하였다.  여기가 캉가루 포인트(Kangaroo Point)라고 하였다.  즉 강가의 전망이 좋은 곳에 그러한 지명을 붙여놓은 것이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정자 같은 건물이 있었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경치를 즐기고 있었다.

   City hall을 거쳐 시내를 빠져 나오면서 카지노 건물도 가리키면서 설명을 하여 주었다. 옛날의 지방의회 의사당 건물이 낡아서 카지노 회사에 팔았는데 지금은 누구든 노름을 하는 사람에게는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하였다. 거기 우리 유학생도 많은 돈을 탕진하고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처음에는 교통사고 등을 핑계로 집에서 돈을 가져다 빚을 막아보지만 나중에는 여의치 못하여 아예 그곳에 붙잡혀서 숙식을 제공(?)받고 있는 학생이 지금도 3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또 주인 내외는 호주 사람들이 도박(경마, 카지노, 복권 등)에 너무 탐닉하고 있다고 개탄하였다. 실은 그들도 주일마다 복권을 많이 사고 있었으면서.

   동네 가까이의 카페에 들러서 그들은 커피를 마시고 나는 쥬스를 마셨다. 이 카페라는 것이 온 동네 사람이 다 주인과 친구인 듯이 대하는 우리 식의 대폿집 같다는 느낌을 주는 그러한 카페였다. 어쩐지 친밀감이 가는 곳이었다.

   아침에 이 집 아들 George한테서 우유 타는 법, 토스트 굽는 법 등을 배웠드랬는데 내일 아침에는 식사를 내가 준비할 수 있을 지 걱정을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이들 호주인들은 아침 식사는 거의 안 하는 편이고 점심은 밖에서 떼우고 저녁은 아주 많이 잘 먹는 그러한 식 습관을 가지고 있어서 아침은 나 혼자만 먹는 것 같았다. 나 때문에 Christne가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는 것이 미안하여 이제부터는 내가 내 아침식사를 준비하겠다고 한 것이다. 내일 아침이 걱정이 되기도 하고 기다려지기도 한다.

  제 4 일 : Ironside State School 방문

1996년 7월 31일 (수)

   6시에 일어나 샤워를 한 후에 오늘은 좀 멀리 산책을 하기로 하고 Hawken Drive로 나가서 학교 반대쪽인 북으로 향해 걸었다.(사실 호주에서 동서남북을 알아내는 일은 참으로 힘들었다. 지금도 지도를 보고 가까스로 그럴 거라 여기고 북쪽이라고 쓴다.  우리 나라에서는 거의 9할의 집들이 남향으로 지어져 있어서 그냥 나가서 집들만 보면 방향을 알 수 있는데, 이곳은 남반구이지만 집들을 북쪽으로 향해서 짓는 것이 아니라 도로나 입지 여건을 고려하여 제각각의 방향으로 지어 놓기 때문에 더욱 방향 감각을 차릴 수가 없었다.)

    조금 가니 네거리가 나오고 상점이 몇 개 보였다. 꽃집과 빵집 등이 보였고 공중 전화도 있었다.  그 맞은 편에 Ironside State School이라는 학교가 있었다. 들어가려다 말고 그만 두었다.  오늘 오후에 시간을 내어서 방문해보리라.

   좀 더 걸어가다가 우리 일행 한 명을 만났다.  그도 산책을 나왔다고 하였다.  그는 버스 1 zone을 타고 다닌다고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학교 쪽으로 가서 하숙집과 학교 중간에 있는 Subway restaurant이 있는 곳까지 갔다. 그곳에는 제법 상점들이 있고, 이발소도 있다. 너무 많이 걸어서 좀 지쳐서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George의 생일이라고 하였다. 생일 선물이 식탁에 쌓이어 있기에 한국에서 가져간 접는 부채(아무런 무늬나 그림이 없는 것으로 마련했었다.)에 가져간 붓펜으로 생일을 축하한다고 한글과 영문으로 써서 주었다. 나의 글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아주 좋아했다. 아침 식사는 Christine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내가 준비하여 먹었다. Christine가 빨랫감을 내어놓으라고 해서 양말, 손수건, 내의 등을 내어주었다. (다른 일행은 여주인이 빨래해주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나는 Christine가 체재 중에 항상 세탁을 해주었다.)

   수업을 마치고 내가 학교를 혼자서 방문한다고 하니 일행은 내게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였다. 사전 예고 없이 개인적으로 방문하면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도 일단 부딪쳐보자고 마음먹고 부지런히 걸어서 4시경에 학교에 도착하였다.

  담은 있었으나 교문도 없고 간판도 이층 건물 위쪽에 학교 이름만 붙어 있는 그러한 학교에 나 혼자 들어섰다. 우선 인상이 나쁘면 곤란하다는 생각에 모자와 색안경을 벗고 현관에 들어서니 오른 쪽 문에 office, 왼쪽 문에 principal이라 쓰고 그 아래에 한자로 校長室이라고 병기해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학교를 비롯하여 일본 유학생이 많았다. Queensland University만 해도 외국학생이 1/3인데 이들이 학교 재정의 2/3를 대어준다고 하였다.)

   마침 office라 붙인 문을 열고 여교사(사무원?)인 듯한 여인이 나오기에 자기 소개를 하고 둘러보겠다고 하니 쾌히 허락을 하였다. 내친김에 학교 소개 책자 같은 것이 없느냐고 부탁을 하니 information booklet을 한 권 가져 다 주었다. 우리 나라 학교의 안내 책자와 비교하여 아주 조잡하고 타자를 쳐서 인쇄한 얇은 것이었다. 내가 카메라를 소지한 것을 보고 구경을 하고 사진도 찍어라 고 하였다.

   도서관은 library라고 조그마한 안내 간판이 있었으나 어느 교실이 무슨 학년 학 반 교실인지 전연 안내 간판이 없었다. 거의 모든 학생과 교사가 하교하고 난 텅 빈 학교를 청소부 아줌마가 두세 명 커다란 진공 청소기를 가지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복도와 교실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는데 하교하면서 의자를 올려두면 아줌마들이 청소를 한다고 하였다.

   청소하는 아줌마가 친절하게도 문을 열어주기에 교실 몇 곳을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우리 나라 보다 작은 교실이 이어지고 교실과 교실 사이에 문이 있어서 옆 교실과 통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었다. OHP를 사용한 듯 교사 책상에 놓여 있었다.  복도에는 전교에 한 두 군데에 조그마한 그림 액자가 두 개인가 걸려 있었고 아무 것도 없었다. 교실에 좀 난잡하게 학습 자료와 학습 결과물들이 쌓이고 흩어져 있었다.

  바깥으로 나오니 테니스 코트와 농구 코트에 학생과 지도 교사가 있었다. 처음으로 교사를 만나게 되나 보다하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들은 교사가 아니라 보조교사들이었다. 즉, 부모들이 하교하는 학생들을 데려가지 못한 학생들을 맡아서 데리러 올 동안 함께 놀아주고 있다고 하였다. 함께 사진도 찍었다. 초등학생들이라 귀엽고 즐거운 표정으로 놀고 있었다.

   (우리 나라와 다른 점 : 복도나 교실에 간판이나 슬로간 등이 없었다. 깨끗하고 빈 벽으로 공간 구성이 되어 있었다.  한 반에 일인용 책상이 20 개정도 밖에 없었다. 학 반 당 인원이 20명 안쪽이었다.  교과서가 없고 교육 과정에 의하여 교사가 모든 걸 준비하여 가르치고 있었다. 즉, 교사에게 재량권이 크게 주어지고 있었다.  교사들은 교재 준비를 위하여 안내 팜플렛이나 신문 잡지의 내용물들을 이용하고 있었다. 국제화가 되어 있어서 외국 학생도 많이 재학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에서 초등학생들도 많이 유학 온다고 하였다. 교실 등의 청소는 청소부가 하고 있었다. )

   보무도 당당하게 집으로 돌아오니 Gerry는 젊은 여자 동료 의사와 함께 전문의 시험을 앞두고 서재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George가 피자 비슷한 것을 데워서 네 조각을 내어서 네 사람에게 한 조각씩을 주었다. 샐러드는 호박, 오이, 무씨 싹 같은 것을 날것으로 , 빵 두 조각.  이것으로 저녁을 때울 수 있는 내가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한국에서는 항상 세 끼니를 밥으로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식 습관이었는데...)

   저녁을 먹고 Gerry가 시내에 가자고 하기에 그의 고물 작은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Brisbane강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빅토리아 다리를 건너 South Bank 공원의 주차장에 차를 대었다. 이 공원은 1988년도에 엑스포가 열렸던 곳을 공원으로 조성한 곳으로 Brisbane의 공원 중에 가장 넓고 아름다운 곳으로 나중에 자주 오게 되었다.  Gerry는 주차비가 비싸다면서 기어이 주차원에게 나가겠다고 말하고 차를 돌려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 그의 말인즉 주차비만 하면 차를 한 잔 사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Kim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먹자고 하였다.

  다시 차를 몰고 나와서 도로변에 주차하면서 핸들 잠금 장치를 하였다.  이게 이상한 것으로 쇠막대기인데 핸들에 자물쇠를 채우면 핸들을 움직일 수 없는 그러한 장치였다.  그의 말로는 차를 훔쳐 가는 사람이 많다고 하였지만 이 고물 차를 누가 훔쳐갈지 나는 궁금하였다. Gerry네는 차가 3대 있지만 Christine가 거의 좋은 차를 타고 Gerry에게는 항상 이 고물 차가 돌아왔다.

   넓은 공원이 너무도 잘 가꾸어져 있었다. 동료들에게 자랑도 하고 나중에 낮에 다시 오리라 마음먹었다.  둘이 함께 사진도 찍으며 산책을 하고 그와 함께 아이스크림도 사먹었다. 두 개에 5달러 60센트(호주달러로)였다. 이 South Bank 공원을 보면서 관리들의 부패가 없는 곳에서는 시민을 위한 많은 시설들이 잘 갖추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별로 잘 사는 나라도 아닌 것 같은데, 공원과 교량과 건물들이 튼튼하고 아름답게 되어 있었고, 모두가 시민들을 위하여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돌아오니 9시 15분. 오늘 하루도 보람있게 호주에서의 생활을 즐기었다는 생각에 만족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The Australian Woolshed 에 간다.  기대가 된다.

   아무래도 좀 추운 듯하여 전기 담요를 처음으로 2단으로 틀어놓고 잠이 들었다.

  제 5 일 : Australian Woolshed로

1996년 8월 1일 (목)

   6시 반에 일어나니 어제 처음으로 전기 담요를 틀어놓고 자서 그런지 머리가 무겁고 다리도 아프고 피곤하였다.  어제 좀 무리한 듯 하였다.  9th Avenue로 산책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현대 액센트 차 한 대가 길가에 주차해 있는 것을 보니 참으로 반가웠다.
  
  보통 때에는 9시에서 10시 45분까지 1교시, 11시부터 1시까지 2교시, 오후 2시부터 3시 30분까지 3교시인데, 오늘은 오후에 이른바 문화 탐방으로 Afternoon trip을 The Australian Woolshed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구내 식당에서 Beef를 넣은 큰 hamburger와 환타로 점심을 때우고 강의동으로 돌아오니 관광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Woolshed는 Brisbane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Indooroopilly, Toowong을 거쳐 북쪽으로 향하여 1시 30분쯤에 도착하였다. 언뜻 보아 숲으로 우거진 관광 농원 같은 곳이었다. 입구에서 흉패를 받아 가슴에 붙이고 상점을 거쳐 들어갔다.  입구에서 들어갈 때에 상점을 거치게 한 그들의 상술을 느낄 수 있었다. 물건은 주로 축산물로, 양피 등으로 만든 모자, 옷가지, 기념품들이었다.

   나무로 지은 200명쯤 수용할 수 있는 건물에 들어가니 입구에 안내문을 나누어주고 있었는데 한글로 된 것도 있고 영문으로 된 것도 있었다.  그만큼 한국인들의 관광객이 많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무 의자에 앉아서 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2시에 사회자의 마이크 소리가 요란하고 쇼가 시작되었다. 먼저 양들이 소개되었는데 자기 이름이 불리면 그 품종의 양이 차례대로 조그마한 받침대 위에 올라가서 서는 그러한 훈련된 양들의 쇼였다.  Merino, Border Leicester, Dorriedale, Dorset Horn, Bluey등의 양 품종이 소개되었으며 각각 특색이 있었다. 내가 아는 품종은 Merino뿐. 그 다음에는 양털 깎는 시범이 있었는데 정말 빠르게 기계로 능숙한 솜씨로 깎아서는 깎은 털을 대위에 휙 던지니 그대로 소가죽모양으로 양털이 흩어지지 않고 모양을 갖추어 놓여지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였다.
  
   쇼 건물에서 나오니 좀 넓은 목장에 양들이 놀고 울타리가 있었는데 sheep shepherd가 양을 모는 것을 보여주었다.  신기하게도 개가 양들을 몰아 우리에 넣기도 하고 데리고 다니기도 하였다. 다음으로는 어린양을 보여주었는데 참으로 귀여웠고, 안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코알라가 Gum Tree(호주에는 이 나무가 많았는데 우리가 흔히 보는 고무나무와는 다르고 포플러나 은수원사시나무와 비슷하였다. )에 앉아 있는 것을 볼 수도 있었다. 물론 이 나무는 유카리라는 좀 독특한 Gum Tree였겠지만. 암소가 있어서 젖을 짜볼 수도 있었는데 나도 젖을 짜보았다.  다른 동료들은 젖이 잘 안나온다고 하였으나 나는 책에서 읽은 대로 손가락을 차례로 오무리니 젖이 나왔다. 그런데 하얀 우유가 아니고 맑은 물이 나와서 좀 이상하였다. 원래 목장에서 처음 짜는 소젖은 이런 것인가?  

  그 옆의 넓은 목장에는 캥거루와 이뮤(Emus)등이 있었는데 캥거루는 사나우니 조심하라고 하였으나 우리들은 가까이 가서 처음 보는 캥거루와 사진 찍기를 즐겨하였다. 나는 쇼를 볼 때부터 카메라가 말을 듣지 않아서 다른 이들에게 부탁하여서 사진을 겨우 몇 장 찍었다.  3시 40분에 승차하여 학교로 돌아오면서 집 가까이에  내려주고 나와 몇 명은 학교에서 하차하여 하숙집으로 향하였다.

  집에 돌아와서 카메라를 열어보니 이상이 없었다.  어젯밤 South Bank에서 찍은 것과 오늘 낮의 사진을 날렸다.  건전지를 사야될 듯 하였다. 어디서 산다? 샤워를 하고 나니 좀 피곤하다. 좀 덜 다녀야할 것 같다.

   저녁을 먹으면서 카메라 이야기를 듣고 주인 부부가 함께 Indooroopilly (Indooroopilly Shopping Centre)에 가자고 하여 함께 Christine가 차를 몰고 나갔다.  건전지 2개를 25달러에 사서 갈아도 카메라가 말을 듣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카메라 점에 가니 컴퓨터 기판이 탈 났다며 250달러를 주고 고치든지 새것을 사라고 하였다.(250호주달러 x 650당시 환율= 162500원, 그러나 귀국하여 고치니 6만원 정도 들었다.) 새것을 사기로 하고 집으로 오는데 Gerry와 Christine는 한국에 가서 고치고 새것을 살 동안 자기들 카메라를 쓰라고 하였다. 고맙게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돌아오니 빨랫감을 내어놓으란다. 손수건까지 내어놓았다. 10시가 되면 자야겠다.  내일은 금요일. 빨리 내일이 와서 City에 나가 밥을 사 먹어야겠다. 밥을 먹어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없다.

  제 6 일 : South Bank Parkland

1996년 8월 2일 (금)

   아침 산책길에 Iron Side State School 앞에 있는 공중전화에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Brisbane에 도착한 날 학교구내 전화로 소식을 알린 이후에 처음이다.  김포공항을 출발할 때에 국제 전화카드를 여행사 직원의 권유로 샀는데 아직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불편하고 비싸서 속았다는 기분이다. 차라리 collect call(수신자부담)로 거는 것이 한국말로 교환수가 응답을 해주고 가격도 싸고 훨씬 좋아서 다음부터는 collect call로 걸기로 하였다.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간단히 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가족들의 음성을 지척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그러나 전화를 끊자마자 내 주위에 서성이는 것은 모두 낯선 이국인들이고 또다시 나 혼자 외톨이임을 느끼면서 갑자기 향수에 젖어들게 하는 이 야릇한 기분을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전화를 걸기 전보다 끊고 나니 더한층 식구들이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 그들은 아침을 먹으려고 하고 내가 없어도 아무 변화 없이 그렇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 얄밉기까지 하였다.

   아침 식사로 egg scramble과 토스트를 먹고 학교로 출발하였다. 내일은 Byron Bay로 단체 여행을 떠나고 오늘은 City에 나갔다가 좀 늦을 거라고 이야기를 해 두었다.

   수업이 끝나고 1시에 동료 4명과 함께 City로 버스를 타고 출발하였다. (동료들도 대개 4명 정도로 짝을 지어 나갔는데 아마도 택시를 탈 경우에 편리하기 때문이었으리라. ) City에 내려서 밥을 먹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니 배는 고프고 적당한 곳을 찾지는 못하고...

   그러다가 중국 집을 찾아서 뷔페(buffet)로 중국 음식을 먹었다. 창밖에 가격을 6달러로 싸게 붙여두었는데 실제로 볶음밥을 비롯하여 온갖 중국 음식을 실컷 먹고 후식으로 과일까지 먹었다. 중국집 주인이 우리 일행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고는 나중에 중국 학생이냐고 물었다. 한국인이라고 하여도 계속 친절하게 잘 대해주었다. 쌀밥은 먹지 못하였으나 오랜만에 중국 음식을 갖가지 잘 먹고 면세점으로 가서 내 카메라를 사기로 하였다.

   City는 번화가라 여러 가지 상점이 다 있었는데 Tax Free 점(내국세 면세점)과 Duty Free점(관세 면세점)도 있었다.  이 경우에 물론  Duty Free점이 더 싼 가격을 제시하고 있었다.

   카메라만 전문으로 판매하는 Duty Free 점이 있어서 들어갔다. 여기 남자 점원이 머리를 길러서 뒤통수에 질끈 동여맨 사람이었는데 얼마나 친절하게 설명을 잘 해주었는지 모른다. 그가 상점 안의 고객을 들어온 차례로 ‘Next!'하면서 자기가 불러서 설명하고 판매도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였다. 자기 차례가 된 고객에게는 차주 친절하게 설명하고 판매도 하지만 차례가 아닌 고객에게는 그저 구경만 하고 있도록 하였지 한 마디도 응대를 해주지 않았다.

  내 마음에 드는 일안 렌즈로 된 카메라가 490달러, 케이스를 80달러에 살 수 있었는데 면세점이라 호주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즉, 공항의 면세구역에 들어가서 세관원의 허락을 받은 연후에야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좀 더 생각해보고 다음에 오겠다고 한 후에 면세점을 나섰다. 내가 한 시간쯤 끌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고르고 하다가 안 사고 나왔으나, 점원은 아주 친절히 인사를 하며 다음에 들러라 고 하였다.

  내가 권하여 모두들 South Bank로 가기로 하였다. 좀 멀기는 하였지만 걸어서 Victoria 다리를 건너갔다. South Bank는 Brisbane강을 건너 Victoria 다리 왼쪽 강변 약 1킬로미터 이상 길게 뻗어 있었다. New York의 Central Park는 맨하탄 섬의 한 가운데에 폭 1킬로미터, 길이 4킬로미터쯤의 큰 공원이지만 이 South Bank는 규모 면에서는 작지만 그 아기자기한 아름다움과 휴식공간으로서의 꾸밈새는 내가 가본 공원 중에 가장 뛰어났다.

  우선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에 있는 Museum에 들어갔다. 아래층에는 큰 공룡들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이층 전시물의 대개는 유럽인들이 호주에 정착하기까지의 생활상을 전시한 것들이 주로 많았다. 또 한 곳에는 작은 건물들을 전시하여 소인국에 온 듯한 느낌을 갖도록 한 곳도 있었고, 전세계의 인형들을 전시한 곳도 있었다.

  또 옆에 있는 Art Gallery에 들어갔다. 주로 현대 회화가 많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비구상 계열의 작품보다는 추상작품이 많았는데 특히 Pop Art풍의 그림들이 많았었다. 그리고 작품의 크기가 큰 작품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시청 지하에 있는 미술 전시실에 갔을 때에도 거의 같은 계열의 작품이 많았었다.

   이제 South Bank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중앙에는 분수나 거리가 있었고 보석(특히 Opal )상점, 음식점, 카페, 스낵바들이 많았다. 한쪽에는 공간을 마련하여 금요일마다 이곳에서 노점상들이 장사를 할 수 있게 해 두었었다.  시에서 노점상들이 점포를 마련하기 쉽도록 철제로 똑같이 포장을 칠 수 있게 해두었으며, 각 상점마다 전기 코드가 마련되어 야간에 조명을 할 수 있게 해 두었었다. 우리들이 도착하였을 때에는 노점상들이 오늘의 장사를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고르고 흥정을 하고 있었다. 작은 옷가지, 기념품, 골동품들을 팔고 있었다. 악대가 연주를 하면서 지나가기도 하고, 어릿광대가 죽마를 타고 큰 키를 자랑하며 지나가기도 하여 흥을 돋우고 있었다. 우리 일행도 몇 만날 수 있었는데 그들에게서 흰쌀밥을 China Town의 아리랑 식당에 가면 먹을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아이스크림을 2달러에 사먹고 공원을 더 구경하였다. 공원의 main street 와 평행으로 강변으로 따라 걸으면 일본인들이 기증했다는 일본식 건물(Nepalese Pagoda)도 있고, 열대 지방의 정글을 흉내낸 곳, 놀이터, 인공 해안(이것도 일본의 입김이 작용했는지 이름이 Kodak Beach이었다.) 등이 있었다. 조그마한 동물사육장, 곤충 사육장 등 아기자기하게 공원이 꾸며져 있었다. 어떤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생맥주 200cc를 6달러에 사서 컵을 4개 얻어 폼을 잡고 사진도 찍으면서 마시며 기분을 내었다.

  모두 밥을 먹고 싶어서 택시를 타고 China Town으로 향했다. 보통 전세계의 대도시에 건설되어 있는 China Town은 그 도시의 시청 근처(특히 뒤쪽)에 있기 마련인데 Brisbane에서는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나중에는 bus를 타고 자주 오게 되는데 처음에는 길을 몰라 택시로 왔다. 중국식의 단청을 한 일주문이 있었고, 중국 식당, 상점들이 즐비한 가운데 길가에 ‘아리랑 식당’이라 쓴 간판이 보였다.

   아리랑 식당에서 된장 찌개와 동태 찌개를 10달러를 주고 사서 두 가지 다 맛보았다. 그게 맛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리송하다. 하여튼 흰쌀밥에 대한 욕구를 일주일 동안 해소할 수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 식당에는 백인도 한 두 명 먹으로 와 있었다. 그런데 식당 분위기는 서울의 어느 변두리 식당(아니 지금은 오히려 중심가에 이런 식당이 더러 있다.) 같이 우중충하였다. 또, 화장실은 여기에 글로 쓰기 민망할 정도였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니 12달러 20센트였다. 택시 기사가 St. Louis를 몰라서 Hawken Drive를 아느냐고 물으니 안다고 하여서 일단 Hawken Drive로 들어선 후에는 내가 안내를 하여 집 앞까지 도착하였다. 기사는 대문 앞까지 데려다 주고는 친절히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주인 부부가 반가이 맞아주면서 내일 아침에는 학교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하였다. 그들도 Byron Bay는 경치가 좋고 참으로 가 볼만한 곳이라고 권하였었다. 카메라를 빌려주었다. 호주에 있는 동안은 써도 좋다고 하였다.

   내일은 첫 주말 여행으로 Byron Bay로 간다. 기대가 된다.

제 7 일 : Byron Bay①

1996년 8월 3일 (토)

   6시 30분 기상, 샤워, 산책, 7시 30분에 식사. 8시 20분에 Christine가 학교까지 태워주었다.  9시 Byron Bay를 향해 버스가 출발.

  그런데 버스가 시가지를 벗어나서 휘어진 시골길을 달릴 때에 바깥을 보던 우리 일행은 너나 할 것 없이 몹시 놀랐다. 마주 오는 차들이 왼쪽차선으로 마주보고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어이쿠. 그러나 가까이 와서는 그냥 지나치니 깜짝깜짝 놀라다가는 안심하곤 하였다. 아직 우리들은 좌측으로 통행하는 차에 익숙하지 못한 탓일까?  시내에서는 그렇게 느끼지 못하였었는데.

  우리 일행은 그 동안 인사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주선하는 이의 사회로 한 사람씩 버스 앞에 나가서 자기 소개를 하고 노래를 부르든지 간단한 이야기를 하든지 하였다. 보통 근무지와 식구들 소개하고 간혹 노래를 부르는 이도 있었는데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이것이 운전기사의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들은 달리는 차안에서 서거나 이동을 하는 것은 엄격히 법으로 규제되어 있었는데 심지어 노래를 하다니. 일행 중 어느 여자 분이 식구들 소개를 하면서 그만 향수에 젖어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모두들 숙연해지기도 하였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는 어느 한적한 계곡에서 멈추어 섰다.  Natural Bridge Park라고 씌어진 우리 나라로 말하자면 도립 공원쯤 되는 곳이었다. 온통 아열대의 숲으로 우거진 곳이었다. 계곡으로 걸어 들어가서 폭포도 구경을 하고 뱀도 구경하였다. 사람이 걸어가는 길가를 뱀이 가로질러 갔는데 우리 나라 뱀과 크기나 모습이 비슷하였다.

   다시 버스는 달려 거의 Byron Bay 근처까지 와서 조그마한 작은 읍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각자 점심을 먹으란다. (이곳의 여행사는 숙식을 제공하지 않는데 특별히 숙박을 제공하는 경우는 있으나 식사는 제공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저녁을 제공받기로 하고 계약을 하였었다.) 다른 일행은 근처의 패스푸드 점에서 해결하였으나 우리 몇은 이곳 저곳을 찾다가 호텔 식당을 기웃거렸다. 아니 거기 적혀있는 가격이 너무 싸서 놀랐다. 그래서 들어가니 한적한 식당에 손님이 아무도 없다. 옆에 가격표를 보고 종업원에게 셀프서비스냐고 물으니 자기가 다 서비스한다고 하였다. T-bone steak가 고작 8달러라니. 학교 구내 식당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그것도 서비스를 받으면서. 다른 동료가 Crambled ram and Bacon이라는 이름이 거창한 걸 시켜서 그것도 같이 맛을 보았다.

   3시에 Byron Bay에 도착하여 J's Youth Hostel에 여장을 풀었다. 나는 설악산의 Youth Hostel에 묵어본 기억뿐인데 설악산은 그 때 새로 지은 집에 시설도 좋았으나 이곳은 이층으로 되어 있는 허술한 양옥으로 많은 사람을 수용하게 되어 있었다. 커다랗고 많은 침대를 들여놓은 방에 나는 일행 13명과 외국인 2명이 함께 자도록 배정된 방에 묵게 되었다.

  우선 바닷가에 산책을 가기로 하고 바닷가(Clarks Beach)로 나갔다. 보드라운 모래가 끝없이 펼쳐지고 저 멀리 바위 언덕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스쿠버 다이빙 연습을 하고 있었다. 모래밭이 너무 수평으로 되어 있어서 바닷물이 들어와 있는 부분과 모래밭이 거의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바닷물이 있는 모래밭을 맨발로 뛰면서 즐거워하는 일행이 많았다. 천천히 걸어서 바위 언덕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저 멀리 태평양 바다를 바라보니 그 끄트머리수평선이 고국까지 이어질 듯한 마음이 들어 갑자기 향수가 밀려왔다.

  6시경에 돌아오니 바비큐가 준비되어 있었다.  빵과 바비큐, 그리고 간단한 샐러드가 6달러. 침대 15달러. 우리들은 145달러를 내었는데 나머지는 차비와 소개비로 나간 샘이라 모두들 바가지가 아닌가 하였다. 그래서 투덜대기도 하였지만 ...

  식사 후에 이층에 오르니 거기 탁자와 의자가 많이 놓여 있고 한 쪽에는 포켓볼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동전을 넣고 하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나도 꼭 한번 해보고 더 할 수 없었다. 그 옆에는 포도주가 나오는 수도  꼭지가 있었는데 붉은 포도주가 무료로 먹고 싶은 데로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어서 너도나도 한두 잔씩 먹고 취하기도 하였다. 그 참에 우리 일행 중에 위스키를 내는 분이 있어서 모두들 한 잔씩 마시고 즐기었다.

   반쯤은 외국인이었는데 스웨덴, 아일랜드, 도이칠란트...등 유럽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도 우리가 권하는 위스키를 한 잔씩 하고. 모두들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나중에는 노래 자랑이 벌어져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한번 부르면 그들이 부르고 하였는데 노래라면 역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잘 불렀다. 그들은 도저히 우리들의 적수가 아니었다.

  8시경에 밤바다를 보자 면서 몇 명이 바다로(Main Beach) 나갔다.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나갔는데 상점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거기 배낭을 울러 맨 여행객 한 사람을 만났는데, 인사를 하면서 어디에서 왔느냐 기에 한국에서 왔다니까 ‘아 태권도’하고 반가와 하였다.

  파도치는 밤바다에서 이국의 정취에 젖어 즐겁게 지내다가 돌아오는데 일행이 나이트클럽에 간다기에 따라 갔다. 입장료는 2달러. 맥주 작은 병이 2.5달러. 그리고는 계속 12시까지 흔들고 놀았다. 모처럼 분위기 있는 곳에 왔기 때문인지 모두들 마시면서 떠들고 춤추고 놀았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맥주 한 병 이상을 마시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와 다른 것은 남·여·노·소의 구분이 없이 거야말로 동락하고 있다는 것과 아무도 안주를 사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일행도 안주를 사 먹지 않았다.  로마에 가면 로마사람 하는 법을 따르는 모양이다.

   입장을 할 때에 고무도장으로 손목에 도장을 찍어 두었기 때문에 좀 답답하면 나와서 바람도 쐬다가 다시 들어가면서 도장을 보이면 되었다. 한창 흥이 무르익어 12시쯤 되니 그들은 이상하게 흰 연기를 내뿜어서 분위기를 돋우었다.  그런데 그게 내게는 견딜 수 없어서 나와버렸다.

    돌아와서 공동 욕실에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이 닦고 지갑을 침대 밑에 감추고 취침을 하였다. 생각보다 쉽게 잠이 들었다.

  제 8 일 : Byron Bay②

1996년 8월 4일 (일)

   6시에 일어나자마자 일출을 보러 어제의 그 바닷가로 갔다. 그런데 동서남북을 잘 못 헤아려서 저쪽 바위산 있는 쪽에서 해가 뜨는 바람에 바다에서 불끈 솟아오르는 해를 보지는 못하였으나 해가 뜰 때의 노을의 장관을 만끽하였다.

  희뿌옇게 밝아오는 여명의 바닷가를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는 우리 앞에 점점 아침 노을이 붉게 물들여져왔다.  우리들은 서둘러 바다로 향하였다. 그 때에 저쪽 바닷가 바위 언덕 너머로 밝은 기운이 점점 더해져갔다. 그러더니 점점 밝아오는 하늘 저 멀리서 붉은 해가 바위 뒤에 나타난 듯. 붉은 햇살이 바위 너머에서 이리로 비쳐지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와 바위 언덕과 그 뒤쪽에서 붉은 모습을 감추고 빛을 발하는 햇살. 그 넓은 광야에서 벌어지는 장관에 모두들 감탄하고 있었다.  

  그 때에 누군가 한국 어느 해안에서도 볼 수 있는 경치라면서 초를 치기에 맞장구를 쳤다. 사실 이러한 해돋이 광경은 동해안에 자주 가보는 사람들이면 별로 장관이랄 것도 없는 경치인 것이다.

   돌아오니 라면, 통닭, 빵을 준비하여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얻어  먹는 사람이 배가 터진다고 이 사람 저 사람이 권하는 것을 얻어먹었더니 배가 불렀다. 그렇게 아침을 때우고 9시에 등대(Cape Byron Lighthouse)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등대까지는 왕복 2km 쯤 되는 산길이었는데 험한 길은 아니라서 걷기에 알맞았다.  바닷가 조그마한 산언덕 위의 흰 등대 건물을 바라보고 목장 길 같은 언덕길을 걸었다. 바다를 끼고 있는 산길이 경치도 아름다웠지만 모두들 한국에 가면 이만한 경치는 얼마든지 있다는 둥 시큰둥하였다. 그래도 고래를 발견하고 사진까지 찍은 일행이 나중에 사진을 전해주었다.

   등대에서 내려와서 시장구경을 하기로 하였다. 호주는 넓기 때문에 시골에는 부정기적으로 시장이 많이 서는 모양이었다. 한국의 시골 장과 별 다른 점은 없었으나 팔고 있는 물건은 좀 달랐다.  재생 중고품, 자기 집에서 만든 아이스크림이나 비누 등. 인디아 산 섬유 제품이 많았다. (나중에 백화점 등에 들어가서도 섬유 제품 등을 보면 유럽의 이태리산 등이 최상급이고, 한국 산이 상급, 호주 산이 중급, 인디아 산이 하급이었다. 가격도 그렇게 등급이 매겨져있었다.  또 관광지의 물건이 오히려 더 쌀 경우가 많아서 안심하고 살수가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즉석에서 사탕수수를 갈아 주스(Sugar cane juice)를 만들어 팔기에 사서 먹었다. 조금 비린 듯한 맛이 약간 없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아주 시원하고 갈증을 없애주는 음료수였다.  그 양이 너무 많아서 컵을 하나 더 받아서 둘이 나누어 먹어도 좀 많았다.  기념으로 좀 싼 듯하여 인디아 산 테이블 보를 20달러에 샀다. 품질은 아주 낮았으나 색이나 무늬가  특이하여 선물용으로 알맞을 것 같았다.

   11시에 출발하여 도중에 주유소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주유소가 식당, 슈퍼를 겸하고 있는 곳이 많았다.) 샌드위치와 닭 꼬치 구이로 점심을 때우고 나오니 주유하러 온 차에서 어떤 서양 여인이 내리면서 명함을 내게 건네고 일행을 데리고 자기가 경영하는 시장으로 오란다. 오면서 보니 또 다른 시장이 보였는데 그게 자기가 경영하는 시장이란다.  그러고 보니 이런 곳의 시장이 이러한 개인이 경영하는 것 같았다. 시장을 소유하고 있으니 아주 부자겠다고 말하니 그렇지 않고 자기는 경영만 하고 소유는 임대인들이 주인이라고 하였다. 우리 일행이 이미 시장을 하나 거쳐온 것을 알고는 아주 실망하는 눈치였다.

   오는 길에 유럽인으로서는 처음 호주를 발견하였다는 쿡선장(Captain Cook)의 기념탑에서 사진을 찍었다. 동서남북을 표시한 커다란 기둥이 네 개 있는 탑이었다. 그 근처 해수욕장에서 잠시 쉬어가게 되었는데 겨울인데도 해수욕을 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 것을 보면 아열대는 아열대인 모양이었다.  나무 그늘의 긴 의자에 앉아서 그들 호주 인들이 바닷가에서 즐기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고향이 그리워졌다.

  그 때에 내 옆에 노신사 한 분이 앉으면서 ‘어디서 오셨습니까“하고 말을 붙였다. 내가 한국에서 왔노라니, 자기는 교직에서 퇴직하여 연금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서로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시간이 되어 헤어졌다.

   City, Toowong, University에서 각각 내려주어 5시경에 집에 도착하였다.  9시경에 돌아오겠다고 하였으나 일찍 돌아왔다. 내 수건이며 슬리퍼까지 Christine가 모두 깨끗이 씻어두었다. 이제 이 집으로 돌아오니 포근하고 아늑한 것이 내 집같이 느껴지는 것이 이상하였다.

   Christine가 일하러 나갔기 때문에 Gerry와 내가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었다. Gerry는 빨리 먹고 디저트를 먹자고 하였으나 나는 소화가 안되어 그만 두자고 하였다.  그는 저녁을 얼마나 많이 먹는지 나는 도저히 그만큼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도 그는 또 디저트를 더 먹으려고 하니.  저녁에 못 견디어 소화제 한 알을 먹고 8 시 지나서 곧 잠자리에 들었다.

    
제목: 호주로 어학 연수를 떠나다 (1)


사진가: kec

등록일: 2010-03-09 06:52
조회수: 639 / 추천수: 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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