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의창의 그림이야기

제17일 : Lone Pine Sanctuary

1996년 8월 13일 (화)

   아침 산책길에 교회를 돌아 언덕길을 걷고 있는데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나는 어릴 때에 사나운 개한테 혼이 난 경험이 있어서 개 짖는 소리를 싫어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더 나아가지 않고 돌아오고 말았다.

  아침 준비를 하려고 라면을 가지고 부엌으로 가니 Christine가 oven에 빵을 구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쏘시지 썬 것 등이 들어있는 반달 모양의 맛있는 빵 3개를 구워서 2개는 내가 먹고 1개는 George가 먹었다.  나는 김치와 함께 빵을 먹었다. 조그마한 유리병에 든 김치를 사왔는데 아껴가면서 계속 먹을 작정이다.

  오늘 오전 수업에서도 손을 들고 수업 진행을 해보았다. 조금씩 영어로 수업을 하는 데에 자신감이 붙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손을 들 생각이다.

  2시에 계획대로 Lone Pine 으로 버스를 타고 출발하였다. 정식 이름은 Lone Pine Koala Sanctuary로 전에 갔던 Woolshed와 비슷하게  관광 농원 같은 곳이었는데 포섬(possumes), 웜뱃(wombats), 이뮤(emus), 타스마니안데블(tasmanian devils) 등의 동물을 기르고 있었으며 캥거루와 특히 코알라(koala)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코알라 쇼를 한다고 하고서는 슬라이드를 보여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용인즉, 이 농장에 세계에서 코알라가 가장 많이 사육되고 있다는 것, 코알라가 먹는 유카리라는 고무나무 잎에는 알코올 성분이 많이 있어서 코알라는 항상 잠을 잔다는 것, 등이었다. 닭장 같은 우리에 넣어서 사육을 하는 곳에는 코알라 가지를 잎 째로 넣어두었었고, 높이 솟은 유카리나무 숲에도 코알라가 올라가서 잎을 뜯어먹고, 혹은 잠을 자고 있었다.

  한 곳에는 코알라를 안고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 놓고는 8달러씩 받고 있었는데 즉석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권하여도 우리 일행 중에 고작 2명이 찍었었다. 썰렁한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일본 중등학생들이 수 십 명이 입장을 하였다.  그들은 서로 찍으려고 줄을 서니 호주 인들은 이제 우리에게는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일본인들의 돈 쓰임새가 우리보다는 한 수 위였다.

  선물 파는 가게를 통해 들어가고 이를 통해 나오는 것은 여느 관광지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들은 구내를 돌아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경치도 구경하였다.  뒤쪽으로는 Brisbane 강이 흐르고 있었고, 선착장도 있었다. 우리 일행은 그 일대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와 차에 올랐다.

  5시에 귀가하여 무심코 거실로 들어갔다가 그들 부부가 쉬는데 놀라게 하여버렸다. 주책을 떨다니. 옆에 가기도 미안하여 내방에 와 있으니 6시쯤 Gerry가 노크를 하면서 밥 먹자고. Christine가 마련해둔 Italy음식을 데워서 함께 먹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같이 TV를 보며 잡담을 하였다.
  
   그는 내가 알아듣도록 아주 또박또박 천천히 말을 해 준다.  그러다가 내가 못 알아들으면 자기나라에서 발간된 영한 사전으로 단어를 찾아서 내게 알려준다. 그 사전에 있는 한국말이 알파벳으로 씌어 있어서 그가 읽기에 힘들었고 내가 알아듣기에도 힘들었다.  그러나 그가 내게 짚어주면 내가 단어를 보고 바로 뜻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내가 말을 하면 하루 저녁에 한 두세 차례는 그렇게 사전을 뒤적이고 하였다.

  그는 거실 바닥에 비스듬히 누워서, 잡담을 하면서, 무언가 먹으면서, 책을 보면서, 그렇게 지낸다.  하여튼 책을 꾸준히 읽고 있으며, 온통 집안에는 구석구석에 서가가 있고 서가에는 책들이 수없이 꽂혀 있다.

  내일은 E K K A로, Queensland주의 공휴일이다. 학교에서는 단체로 할인하여 인솔 관람을 가기로 하였는데 나는 Christine가 내 소원을 풀어준다면서 차를 타고 서부로 가보기로 하였다. 양쪽을 다 가보고 싶은데...

제18일 : EKKA에 가다

1996년 8월 14일 (수)
  
   밤에는 배가 아파서 깨고, 또 꿈을 꾸어서 깨고 하였다.  처음 꿈에는 내가 아내의 발바닥을 교편으로 자꾸 때리는 꿈이었다.  두 번째 꿈에서는 이제 갓 중1에 올라간 둘째가 반장이 되었다는 꿈을 꾸었다.  옛날 장난꾸러기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다. 깨어보니 꿈에 첫째가 왜 안 나타났는지 궁금하였다.

   밤에 잠을 설치었으나 6시 30분에 일어났다.  7시에 내가 산책을 나가려는데 Gerry와 George가 스카우트 같은 제복을 입고         EKKA에 자원봉사를 나가려 하고 있었다.  Gerry는 의사이고 George는 치의예과 학생이니 둘 다 의무요원으로 봉사를 하고 Christine는 나와 함께 보글리 댐을 구경하기로 하였다.

   산책에서 돌아오니 Christine는 부지런히 과자를 굽고 있었다. 이 과자를 내게 설명해주었는데 ANZAC biscuits라는 것으로 Australia New Zealand Army Corps의 준말이었다. 즉, 옛날 2차 대전 때에 호주와 뉴질랜드 병사들이 이 비스켓을 먹었다는데서 유래하였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의 한과와 비슷하였다.

   8시 50분에 그녀는 과자와 음료수  바구니를 차에 싣고 나는 빈 걸음으로 그녀의 차를 타고 출발하였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한없이 달려갔다. (나중에 지도에서 보니 Brisbane 서남쪽으로 달렸었다.) 비포장도로도 많이 달렸는데 드디어 황량한 벌판이 나타나자 그녀가 내게 이제 호주의 참모습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물론 아직 호주 동부지방을 벗어나지는 못하였으나 그래도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저 멀리 지평선까지 보이는 그러한 황량한 벌판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호주는 이러한 곳이 아닌가 하고.

  사진을 찍고 돌아서 Beaudesert라는 곳과 Mt. Tambourine이라는 공원에 들어섰다. 거기 공중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았는데 화장실 바깥벽에 안내 지도를 그려두어서 지나가던 몇 관광객이 그 지도를 보고 이정을 찾고 있었다.  Christine도 거기에서 이정을 보고는 좀더 차를 몰았다. 그리고는 저 아래로 넓은 벌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언덕 나무아래 벤치에서 가져온 과자랑 음료수를 먹었다. 여기까지 올 동안 아열대의 숲을 지나오면서 정글 비슷한 모습을 보기도 하였다.

   내가 EKKA를 보고 싶어하니 그녀는 Brisbane까지 달려서 12시경에 Transit  Centre에 내려주고 가버렸다. 열차를 타고 EKKA에 가라고 하였다.

   물어서 표를 사고, 물어서 9번 홈에서 기다리니 열차가 왔으나 물으니 아니라 고하였다. 다시 물어서 그 다음 열차를 탔다. 물어서 세 정류장쯤에서 내리니 바로 입구가 EKKA 정문이었다. 서투른 영어지만 자꾸 물어보니 이제는 묻는 대에 재미까지 느끼게 되고 쑥스럽지도 않았고, 그게 편리하고 좋아서 이즈음에는 자꾸 묻는다.

   열차 안에서 재미있는 점은 백인들은 백인들끼리 앉고 흑인 가족이 올라왔는데 그 검둥이 아줌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내 의자 쪽으로 와서 앉는 것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내가 같은 유색인종으로 친밀감이 갔나 보다.

   입장료 10달러, 프로그램 2달러.  혼자 돌아다니며 사진도 찍고 구경도 하였다. 어린이 대공원 정도의 넓이에 머리 위에는 리프트가 천천히 움직이며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켜주고 있었고, 개, 양, 소, 말, 등의 가축과 농산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입구에서는 제복을 입은 악대가 환영의 연주를 해주었다. 큰 원형 경기장에서 개가 양을 모는 것을 보았다. 관객석은 나무로 되어 있었는데 우리처럼 음식물을 팔러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말을 타고 시범을 보이는 곳도 있었다.  호주 농경 사회의 변모를 보여주는 곳도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1개 사먹고 조금 가다가 우리 일행 몇 명을 만나서 이제 함께 서커스를 보고 생선 튀김과 감자 튀김으로 점심을 때웠다.

   부메랑 시범을 보이는 곳에 가보았다. 시름 경기장만큼 조그마한 둥글게 포장 친 곳에서 한 사람이 부메랑 던지는 시범을 보이고 있었다. 이 부메랑이라는 것이 바로 날아가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원형을 그리면서 돌아오고 있었다. 즉, 바로 앞으로 던지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던져서 이 부메랑이 관객들 머리 위를 원을 그리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신기한 것은 그 사람이 부메랑으로 시범을 보이다가 옆에 자기 옷을 걸어두었던 나무로 된 평범한 옷걸이를 던지니 역시 돌아왔다.

   물건을 파는 시장도 있었는데 좀 특이한 것은 우리 나라 주택에 있는 마블로 된 욕조 같은 것이 아주 큰 것이 있었다. 그게 수영장용이었다. 그러한  집채만큼 커다란 것을 한 곳에 쌓아 두고 팔고 있었다. 어떻게 차에 싣고 가려는지.

   다시 다른 전시장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각 고장의 갖가지 과일, 꿀, 채소 등 농산물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그 전시하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즉, 사과 같으면 색깔별로 많은 사과로 완전히 아름다운 글자모양이나, 자기 고장을 형상화  해서 아름답게 진열해 두었었다.  꽃, 새, 등등,  농산물이란 농산물은 온통 전시하고 있었다. 물론 한 쪽에는 판매도 하고 있었다.  커다란 쇠가죽을 파는 곳도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에서의 가격이 시중 가격의 절반정도였었다.

   우리 나라의 옛날 4H 경진대회와 같이 개나 토끼나 모든 종류의 농축산물의 경진대회도 열리고 있었는데 특히 커다랗고 복스럽게 생긴 개를 안고 혹은 끌고 와서 서로 자랑을 하는 코너에서 보는 그 커다란 개는 지금 생각해도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도 너무나 복스럽게 보였었다.

  자동차 전시하는 곳에는 자랑스럽게도 우리 나라 HYUNDAI의 전시 코너도 있어서 마음 뿌듯함을 느꼈다. Gerry네가 자원 봉사하는 곳도 있었으나 일행이 빨리 시내에 가자고 하기에 그냥 열차를 타고 City로 돌아왔다.

   Queens 거리의 한쪽 길로 들어서니 온통 커다란 식당이 되어있었는데, 이게 주위에 여러 외국 음식점이 있고 가운데에는 넓게 테이블이 있어서 고객을 함께 관리하는 그러한 음식 몰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거기 청소를 하고 그릇을 치우고 하는 아줌마는 아마 공동으로 고용된 듯하였다. 우리는 과일을 넣어서 즉석에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주는 뉴질랜드 식당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그 공동 테이블에 앉아서 먹었다.  

   강원도에서 온 황 선생님과 둘이서 술집을 찾아 나섰다. 한 곳은 젊은이들이 너무 떠들고 , 한 곳은 너무 고급스러워서 나와서 지하에 있는 한 곳에 들어갔다. 입구에서 두 건달이 신분증을 확인하면서 미성년자를 가차없이 몰아내고 있었는데 우리는 통과시켜주었다. 8달러에 생맥주 높은 도수를 사서 둘이 나누어 마셨다. 한쪽에는 여러 가지 술과 안주로 과자를 팔고, 다른 편에는 무대가 있어서 연주나 노래를 하고, 홀의 한 쪽에는 포켓볼 당구대가 놓여 있고, 술을 산 사람은 홀의 적당한 장소에서 마시면 되는 그러한 술집이었다.

  화장실에 갔더니 술 취한 젊은이가 어디서 왔느냐, 북쪽이냐 남쪽이냐를 물었다. 며칠 전에 호주 학생이 한국 학생에게 두드려 맞은 기사가 신문에 난 이후로 호주 젊은이들이 한국사람에게 적대감정을 갖고 있다는 말을 일행으로부터 들은 나는 이렇게 따져 묻는 술 취한 젊은이가 마음에 걸려 남쪽이라고 간단히 말하고 홀로 곧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데 이자의 동료들이 대여섯 명이나 되어서 그를 믿었든지 또 우리 둘에게 다가오면서 횡설수설하기 때문에 그냥 빨리 마시고 나와버렸다.

  이제는 버스 타는 것도 잘 알게 되어서 512번 버스로 대학을 지나 Subway에서 내려 집으로 왔다. 돌아오니 Christine가 피곤하여 TV를 켠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몰래 내방으로 와서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일행에게서 들었는데 나 이외에도 두 사람이나 카메라가 고장이 난 모양이었다. 통관 때의 X-ray투과 때문인지, 아니면 호주 기후의 특이함 때문인지 하여튼 카메라 고장이 많은 것이 이상하였다.

제19일 : 그들의 생활과 쓰레기 분리 수거

1996년 8월 15일 (목)

  오늘 아침 산책길은 어제 너무 걸어서 다리가 아팠으나 많이 걸었다.

  Christine가 프랜치토스트를 4개를 만들어 주어서 김치와 함께 억지로 먹었다. ANZAC Biscuits을 담아주며 학교에 가서 동료들과 나누어 먹으라고 하였다.  나는 한국에서는 남자가 음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전통이 있다고 거절을 하니 그런 전통은 한 번 깨어보라고 새로 권하였다. 그리고 바지까지 온통 빨랫감을 내어놓으라고 하였다.

  첫째 시간 Integrated Communication Skills 시간에 어제의 일을 발표하며 ANZAC Biscuits에 대하여 말하였더니 지도교수인 Jan이 더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러면서 Break time에 나누어 먹어라 고 하였다. 반쪽, 한쪽씩 나누어 먹었는데 모두들 맛이 있다고 하였다.

   우리 반 14명중에 몸이 불편한 사람이 2명이나 된다.  마침 침을 잘 놓는 분이 있어서 침을 맞고 좀 진정이 되는 듯하였으나 제주도에서 온 황 선생님은 좀 심하다. 멀리 와서 몸이 안 아파야지.

  수업 중에 2,3일에 한번씩 방송이 있었는데 오늘은 수업마치고 Book shop이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영어 교수에 관련된 서적을 판매한다고 하여서 마치고 가보니 100권쯤의 책을 전시하고 팔고 있었는데 그게 너무 비싸서 살 마음이 안 났다. 간혹 점심 시간에 식당에 가면 그 앞에서 옷 시장도 열리고 하는 것이 대학이 완전히 상업적이다.

  Queens Street에 있는 대형 서점에 벌써 들어가 본 나로서는 책을 살 마음이 안 생기었다.  호주의 출판 수준은 우리 보다 더 나아 보이지 않았다. 특히 책의 지질이 아주 나빴었다. 선전물이나 잡지류는 좋았으나 일반 단행본의 출판은 아무래도 질이 떨어지는 듯하였다. Queens Street에도 우리 나라처럼 서점은 밀려서 지하에 들어가고 다른 상점들이 번성하고 있었다.

  돌아오니 Jessie(고양이)가 마당에 있다가 반가이 맞이한다. 아무도 없는 텅 빈집에서 지루하게 휴식을 취하였다.

  5시 30분 경에 Gerry가 와서 함께 맥주를 두 병이나 마시면서 호주,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서울에 한 번 간 일이 있는데 서울의 고급호텔에서 머물렀던 이야기를 하였었다. 나는 얼른 김포공항에서 가져간 한국 소개 팜플렛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 호텔의 안내 아가씨들이 아마도 정보요원이 아니었던가 하였다. 그들은 우리 나라를 좀 군사 독재의 그러한 나라쯤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였다.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하였었다.

  비가 오려고 하여 그와 내가 빨래를 걷고 있는데 Christine가 돌아왔다. 둘이서 술이나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남자들이란 다 할 수 없다면서 우리 둘을 모두 나무랐다. 우리는 웃으면서 함께 또 맥주를 마셨다. 저녁은 닭고기 밥을 먹었다. Christine는 한국에서도 닭고기를 먹느냐고 물었다. 나는 모든 것은 같고 우리는 따로 먹고 여기서는 함께 먹는 것이 다르다고 말해주었다.  

  즉, 그들은 보통 음식 여러 가지를 따로 만들지만 커다란 접시에 모든 음식을 골고루 담아서 그대로 함께 먹는다.  그러나 우리는 따로 만든 음식을 따로 상위에 놓고 각자가 가져다 먹는다.  그게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는데 힘이 좀 들었다.

  말이 나온 김에 그들을 초대한다고 하였다. 이번 월요일에 한국 식당에 가서 한국 음식으로 저녁을 사겠다고 하니 그들은 무척 좋아하였다.  George가 마침 일이 있지만 그도 늦게라도 가겠다고 하였다.

  후식으로 빠빠야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이들은 저녁을 많이 먹는다. 보통 고기를 나는 한 점만 먹는데 이들은 두 점을 먹었다.  나도 꼭 한 번 두 점을 먹어보았는데, 소화제를 먹지 않고는 그날 저녁을 견디기가 힘이 들었었다.  이들이 식사를 마칠 때쯤이면 나이프로 접시를 딸딸 긁어먹는다.  그게 소리가 요란하여 식사를 마칠 때쯤이면 아주 소란하다.  그러나 그들은 개의치 않고 접시에 남은 음식 찌꺼기를 거의 우리네 식으로 하면 핥아먹은 듯이 깨끗이 나이프로 긁어먹었다.  덕택에 식기에는 온통 나이프 자국이 거미줄 같이 나 있다.  그러면 개숫물이 더럽지 않아서 공해도 덜 생길 것이다.

  그리고 포도주를 많이 마시는데 그 마개를 꼭꼭 따로 모았다. 코르크는 소중한 재활용품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물론 모든 종류의 종이는 따로 모으고 있었다.

  각 가정에는 쓰레기통이 커다란 것이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노란 뚜껑이고, 하나는 녹색 뚜껑이었다.  타는 것과 타지 않는 쓰레기는 따로 이렇게 모아서 일주일에 한 번씩 다른 날에 길가에 내어놓으면 쓰레기차가 비워주었다.  그 비우는 방법이 아주 신기하여서 등교 길에 자세히 보았는데 차가 도로 옆에 서면 운전기사가 운전대에서 그대로 조작을 하면 쓰레기차의 옆에 있는 손잡이가 쓰레기통을 들어올려서 차 위에서 거꾸로 하면 자동으로 뚜껑이 열리고 쓰레기가 쓰레기차에 버려졌다.  운전기사 혼자서 온 동네의 쓰레기를 수거하고 있어도 힘이 전연 안 들었다.  우리 나라처럼 더러운 쓰레기차가 달려가고 많은 미화원들이 뒤따르면서 집어  던지고 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이 좀 더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듯 했다.

  그들은 실내에서도 구두를 신고 생활하는 것이 통상적이었지만 Gerry네는 슬리퍼를 많이 신었다. 나도 그편이 편리하였다. 실내에서 신을 신고 생활하는 것과는 달리 바깥에서는 맨발인 사람들이 1할은 되는 듯했다. 길은 포장되어 있고, 그 외에는 거의 잔디로 덮여 있으니 맨발이라도 더렵혀질 염려는 거의 없었다. 위생상, 건강상 맨발이 좋다면서 일부러 맨발로 길을 오가는 사람이 종종 보였다.  

   그리고 자전거길이 잘 되어 있어서 자전거를 타고 등 하교하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인도 한편에 자전거 길이 있고, 이 자전거길이 차도로 내려가는 곳에는 경사를 완만하게 만들어서 자전거를 타고 그대로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몇 년 전에 워싱턴에서 자전거로 육교를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둔 시설물을 본 일이 있었던 기억이 났다. 자전거를 타고 길을 잘 안전하게 달릴 수 있게 해두니 저절로 자전거 타는 인구가 늘어날 수밖에.

  그들은 녹지대에서 사는 것처럼 온통 숲 속에 마을이 있었는데, 길에도, 집에도 풀밭이 많았다. 그런데 그게 순수 잔디가 아니라 그냥 깎아둔 풀이었다. 물론 잔디가 많았지만. 그들은 우리처럼 아주 깨끗하거나 예쁘게 하지는 않았지만 지저분한 곳은 없었다. 집안이고, 집밖이고.

  그런데 그 잔디 깎는 것을 전문가(?)에게 맡기고 있었다. Gerry네도 내가 하루는 하교를 하니 잔디를 일꾼을 시켜서 깎았는지 일꾼 한 사람이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내게 인사를 시켜 주었다.

  마침 캐나다의 토론토 어느 주택에서 잔디 깎는 모습을 본 일이 생각이 난다.
우리네와는 달라 신기한 마음에서 자세히 보아두었는데, 그집은 주택가의 큰 도로 옆에 있는 집으로 앞에 조그마한 10평 정도의 잔디밭이 있었다. 그걸 잔디 깎는 회사에 의뢰한 모양이었다.

   잔디 깎는 차가 와서 도로 가에 주차를 하고 한 사람은 차 운전대에 있고 두 사람은 내려와서 잔디 깎는 기계로 잔디를 깎았다.  다 깎고 나니 분뇨 수거하는 호스 같은 굵은 호수로 공기를 내 뿜어서 깎은 잔디를 모두 도로에 주차해둔 차 아래로 밀어내었다. 그러니 차에 타고 있던 운전 기사가 차 아래 한가운데에 있는 공기 흡입구를 통하여 그 깎은 잔디를 뿜어 올려 차에 싣고 있었다. 설명은 간단하나 그 인부 3명이 하는 꼴은 내가 보기에는 서툴기 그지없었다. 우리 식으로 그냥 벌초하듯이 한 사람이 낫 1 개 있으면 10분이면 다 깎을 것을 그들 세 사람은 커다란 최신식 장비를 가지고 와서는 거의 1시간이 걸려서 그 좁은 잔디밭을 깨끗이 깎았었다. 좀 문명의 아이러니 같은 것을 느꼈었다.
  
제20일 : 발표 연습

1996년 8월 16일 (금)
  
   6시 10분에 일어나서 좀 긴 시간을 산책하였다. 갈 날이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주위 풍경이 전보다 점점 더 정다워지는 느낌이다.

   아침 준비를 하였다.  라면 1봉지를 삶고, 토스트에 꿀을 발라 2개, 사과 1개, 물 한 컵. 이게 나의 아침식사이다. 전보다 훨씬 내 마음에 드는 내 식의 식사이다.

  Christine가 일어나서 아침 꿈 이야기를 하였다. 복권이 몇 백만 달러에 당첨되는 꿈을 꾸었다고 하였다. 나는 꿈은 반대로 나타나므로 별로 기뻐할 일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오늘은 오전 수업에서 Canterbury College에서 발표할 준비를 끝내는 날이다. 우리 모두는 얼마 전에 본 작년의 일본 교사들의 준비물보다 더 잘하자는 합의하에 열심히 준비해오고 있었다.  그들은 A4용지 정도 되는 종이에 몇 장의 그림과 글씨로 준비를 해서 조잡하기 그지없었는데 우리들은 커다란 4절지 정도의 켄트지에 색종이를 오려 붙이고 그림도 그리고 제법 잘 준비를 했었다.

   준비가 가까스로 끝나고 발표 연습을 하게 되었다. 우리 조(희경, 종훈, 의창 : 학습 시에는 이름만 있는 명찰을 달고 교수나 연수생이 모두 이름을 불렀다.)는 셋이서 잘 완성하여 발표를 기다렸다. 우리가 세 번째로 발표를 하였다. 모두가 권하여서 내가 발표를 하였다. 광주에서 온 김 선생님이 내 발표 모습을 비디오로 촬영해주었다. Vice Director가 옆에 붙어서 발표를 하는 발음, 억양, 표정 등을 하나 하나 지적하면서 지도를 해주었다. 특히 나는 blood의 발음을 길게 하는 바람에 지적을 받고 즉석에서 발음 교정을 받기도 하였다.  그래도 이렇게 여러 사람이 있는 앞에서 벌써 세 번째 발표를 하고 보니 조금은 자신감이 붙는 것 같았다.

    1시경에 수업을 마치고 교정에서 우리 연수생 전원의 단별 기념촬영을 하였다. 기념 촬영을 하고 나니 어쩐지 벌써 연수가 끝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 Bundaberg로 가기로 한 15명은 대표가 Transit Centre에 표를 예매하도록 하고 각자 내일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제까지 남쪽과 서쪽으로는 여행을 해보았으니 마지막으로 북쪽으로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그것도 열차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사탕수수의 고장 Bundaberg로.

   City에서 강원도의 황 선생님과 음식 몰에 가서 타이 음식을 먹었다. 우리 나라 국수와 중국 가락국수(우동)와 비슷한 그러한 음식인데 맛이 제법 있었다. 그 때에 일식점에서 김초밥을 가져와서 먹어보라고 하였다. 우리는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하였으나 그는 오늘 개업을 하였는데 맛을 보고 앞으로 많이 팔아달라고 하였다. 얼떨결에 공짜 초밥 맛을 보게 되었다.

  황 선생님도 카메라가 고장이 났다면서 나와 함께 그전의 그 Duty Free점에 가서 99 달러 짜리 조그마한 카메라를 샀다. 같이 opal을 사러 다녔으나 가격이 천차만별이라 포기하고 China Town에서 한국식품으로 라면, 김치를 사고, 현대 면세점에서 부메랑 1개와 로얄제리 3통을 카드로 샀다. 조금씩 가격을 알아보면서 선물용으로 준비를 하는 게 좋을 듯 싶어서였다.

  한국식당에서 둘이 20달러에 해물탕을 먹었다. 너무 오랜만에 먹어보는 거라서 맛이 좋은지 나쁜 지도 모르고 감격하며 그냥 먹었다.

  다시 City로 돌아와서 둘이 그냥 Queens Street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둘이 그냥 앉아 있어도 즐거운 거리였다. 시청에 가보기로 하였다. 다른 일행이 가보니 괜찮았다는 말에 우리도 시청으로 향하였다. 입구에서 안내를 받았으나 우리들이 시계탑으로 올라가는 곳을 잘 못 찾고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안내하던 분이 멀리까지 와서 엘리베이터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분은 지체장애인이었다. 그런데도 일부러 절뚝거리면서 걸어와서 친절하게 대해주어서 너무 고맙고 이것이 공직자의 자세가 아닌가 하는 마음을 가졌었다.

   시계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는 안내하는 남자가 있었는데 자기 소개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올라가다 보니 그 남자의 아내가 한국인이었다. 그는 한국에도 가본 경험이 있다고 말하고 즐거운 여행이 되라면서 시계탑 꼭대기에 내려주었다. 영화에서 본 노틀담 사원의 종루 축소판 같은 곳이었다. 커다란 시계를 가까이 에서 보는 것보다 그 탑에서 내려다보는 시가지의 전망이 너무 좋아서 사방으로 돌아보고 사진도 찍고 하였다.

  내러와서 회의실 같은 곳을 보니 어떤 행사를 위하여 빌려준 듯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민들이 임대하여서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있는 듯하였다.  지하에는 미술관으로 되어 있었는데 전시품은 South Bank 근처의 미술관에 있는 작품과 거의 같은 대작이고 추상적이거나 Pop Art 계열의 그러한 작품들이 많았었다.

내일 여행에의 기대를 안고 512번 시내버스를 타고 귀가하였다.  이번에도 흑인이 타면 꼭 내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 조금 후 밖에는 이슬비가 내렸다.
  
제21일 : 사탕수수의 고장Bundaberg①

1996년 8월 17일 (토)
  
   6시에 기상하였는데 머리가 좀 무거워서 걱정이 되었다. 오늘은 Bundaberg로 가는 날이라 산책을 생략하고 아침 식사 후 7시 50분에 11A 시내버스를 타고 City로 향하였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한적한 Queens Street를 보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거기 벤치에 앉아서 이른 아침의 호주 사람들(아니 반은 외국인일거다.)의 생활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시간이 되니 점점 일행이 모이기 시작하여 Transit Centre로 가니 14명이 모였다. 한 명이 빠지게 되어서 예약 표 한 장은 손해(1인당 편도 43달러)를 보게 되었다.

   9시 45분에 Bundaberg 행 열차는 북쪽으로 출발하였다. 전에 EKKA행 열차보다는 실내가 아늑하고 분위기가 좋았는데 손님은 거의 없어서 우리 일행이 객차 하나를 전세 낸 듯한 분위기였다.(호주에서는 거의 자가용이 한 가정에 2대 이상은 있기 때문에 시외 여행을 위한 대중 교통 수단이 적었다. 열차도 남북으로 일일 1회, 서쪽으로 일일 2회 운행하고 있었다. 그나마 손님이 적어서 텅 빈 객차로 달리고 있었다.)

  Gerry네가 가면서 Glass House Mountain을 보게 될 거라고 하였는데 정말 지나다가 차창 밖으로 보게 되었다. 나중에 Sunshine Coast에 갈 때에는 내려서 기념 사진도 찍었지만 정말이지 4,5m 쯤 되는 조그마한 언덕을 그렇게 유난스레 자랑을 하는 것을 보면 호주사람들의 자기네 산천에 대한 긍지도 지나치리만큼 과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광야에 조그만 하게 솟아 있으니 그게 조금은 볼거리가 될 것이지만.

  북쪽으로 갈수록 바깥 풍경은 넓고 거칠어졌다. 간혹 Bush Fire도 볼 수 있었는데 나는 이것을 Gerry에게서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호주는 북쪽으로 갈수록 열대지방이 되는데 자꾸 숲이 우거져서 밀림으로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해마다 겨울에 불을 질러서 숲을 태우고 있었다. 또, 사탕수수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탕수수 밭에 불을 질러서 잎을 태운 후에 줄기만을 수확하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연기가 희뿌옇게 지평선 저쪽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불타버린 광야에는 조림을 한 곳도 있었는데 주로 소나무를 심어두었었다. 물론 우리 나라의 소나무와는 조금 다르지만. 잎이 단단하지 않고 훨씬 길고 부드러웠다.

   중간에 담배를 피울 정도의 시간을 주며 한 역에서 쉬어서 열차는 계속 달렸다.  점심 시간이 다가오자  여자 승무원들이 점심을 주문 받으러 다녔다. 손님이 적어서 그런지 무척 친절하였었다. 우리들도 각자 마음에 드는 음식을 주문하였더니 나중에 여자 승무원들이 가져다  주었다. 열차 안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3시 30분에 Bundaberg역에 도착하였으니 5시간  45분간 달린 셈이다. 많이 올라왔다고 생각되지만 지도에서 보니 Queensland주의 남쪽에 있는 주도 Brisbane에서 조금(1/3쯤. 275km정도) 올라와서 아직도 Queensland주의 중 남부에 있으니 하여튼 호주란 나라는 넓기는 넓은 나라였다.

   열차 역에서 건너편으로 조금 걸어가니 Coach Station이 있는데 거기에서 안내를 받아서 Youth Hostel을 알아내었다. Youth Hostel이 변두리에 있기 때문에 한참을 가야하지만 모두들 시가지 구경도 할 겸 걸어가기로 하였다.

  상주 인구 15000명의 조그마한 시골 읍이지만 이 근처에서의 중심지이므로 주변까지 합하면 4만 정도의 인구를 가진 제법 큰 도시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더구나 변두리까지 네모 반듯하게 블록으로 지워져 있고, 모든 도로는 포장이 잘 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도시계획이 이루진 후에 생긴 계획도시인 듯하였다.

   도중에 중심 도로 바로 옆에 Buss Park라는 공원이 있었는데 열대 수목인 야자나무들이 높이 치솟아 자라고 있고, 예쁜 꽃들이 어우러진 넓고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조그마한 도시에 커다랗고 훌륭한 공원이 있는 것에 놀랐고 모두들 그 아름다움에 감탄을 하였다.

   우리가 머물 Hostel은 아주 도시의 끝 부분에 있어서 근처에는 거의 집도 없었지만 그래도 반듯하게 도로는 바둑판 모양으로 잘 닦여져 있었다. Hostel에 짐을 맡기고 Bargara Beach라는 바닷가로 나가기로 하고 택시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오늘 밤 머물 잠자리가 정해졌고, 돌아갈 택시를 예약해두었기 때문에 모두들 오랜만에 마음이 느긋해져서 바닷가에서 어린 아이 마냥 즐겁게 뛰어 놀았다. 바위틈에는 역시 조그마한 게들이 놀고 있어서 그것도 잡아서 즐겁게 가지고 놀고 그야말로 야자나무 그늘의 바닷가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었다. 바닷가의 놀이터에는 탁자나 벤치가 있었지만 우리 일행 외에는 사람들이 없어서 우리들은 가지고 간 통닭과 맥주를 먹으며 이야기, 노래, 게임을 하면서 택시가 올 때까지 즐겁게 지냈다. 모처럼.

   택시를 타고 돌아온 Hostel에서는 방 배정이 있었는데 강원도의 황 선생님과 나는 4명이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마한 방이 배정이 되었다. 방에 들어가 보니 벌써 외국인 두 사람이 이층 침대의 아래층을 차지하고 있어서 우리 둘은 각각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황 선생님의 아래층에는 백인 처녀가, 내 아래층에는 백인 총각이 각각 차지하여서 간단한 인사를 하고는 올라갔는데... 그들 두 사람은 벌써 며칠 째 여기에 머무는 모양. 나는 황 선생님에게 아래층에 처녀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농담을 하였는데, 그들은 우리말을 못 알아들었고, 그들 둘이 무어라고 빠르게 속삭이는데 우리 역시 못 알아들었다.  그 처녀는 위에는 소매 없는 셔츠를 입었으나 아래는 하얀 삼각 팬티만 입고 침대에 누워 있으니 내 참. 물론 담요로 어느 정도는 가리고 있었으나 그대로 일어서서 화장실도 가고. 그리고 나는 이층 침대에서 자본 경험이 전연 없는데 어떻게 잔담.

   Hostel에는 자기 열쇠를 가지고 가면 사물함을 열 수가 있었는데 거기에 식기, 컵, 냄비, 포크며 취사도구가 세트로 들어 있었다. 체크아우트할 때에 확인을 한다고는 하였으나 이것들을 이용하여 라면도 끓이고 밥도 좀 하여서 모두들 저녁 식사를 잘 하였다.

   식사가 끝나자 모두들 시내 구경을 하자고 하여 나갔더니 나이트클럽이 있어서 들어가기로 하였다. 13명이 깎아서 20달러를 주고 입장을 하였다. 한 명은 슬리퍼를 신었다고 복장검사에서 탈락하여 입장을 못하였는데 나중에 보니 어떻게 들어와 있었다. 입구에 있는 건달들이 입장료는 깎아주지만 복장이 단정하지 않으면 입장을 시키지 않는 것도 참으로 신기하였다.

   이 나이트 클럽이라는 것이 입장을 하면 조그마한 로비 같은 곳이 있고, 그 다음에 바로 춤을 출 수 있는 커다란 홀이 있고 이 홀을 지나면 술을 사서 마실 수 있는 의자와 탁자가 있는 조그마한 홀이 또 있었다. 이 홀을 지나면 마당이 있었는데 이 마당에는 대문이 열려 있어서 나중에 이리로 나와서 돌아왔는데 아는 사람은 입장료를 내지 않고 그 곳으로 들어올 수도 있는 그러한 곳이었다.

   홀에서는 제 마음대로 음악에 맞추어서 몸을 흔들었는데 그전에 경험했던 것과 같이 이상하게도 연기를 또 내 뿜어서 흥을 돋우고 있었다. 어떤 호주 청년이 자꾸 말을 붙이는데 시끄러워서 대화를 할 수 없기에 나가자고 하여 술 마시는 홀에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멜본 대학의 Chemical Biology를 전공하는 학생으로 친구와 함께 둘이서 중고차를 한 대 사서 방학을 기하여 남쪽의 멜본에서 시작하여 호주를 일주하기로 하고 이제까지 두 주일만에 여기까지 도착하였다고 하였다. 나도 심리학을 전공하였기 때문에 Biology와 접목되는 부분이 있다고 하며 대뇌생리학에 대하여 몇 가지 이야기를 하니 아주 반가와 하였다. 우리는 그러한 이야기며, 한국과 호주에 대한 이야기며 나누었는데 그의 친구는 수줍은 듯 그냥 듣고만 있었다. 그들은 벌써 여기서 아가씨들을 사귀었는 듯 곧 늘씬한 아가씨가 다가와서 내게도 인사를 하였다. 그들 눈에는 내가 그들 또래로 보였는지, 아니면 그들은 노소 동락하는 사회생활에 익숙해 있었는지 하여튼 우리는 격의 없이 이야기들을 나누며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내가 멀리 어학 연수차 Queensland University까지 온 것에 감탄하였고, 나는 그들이 달랑 차 한 대로 호주 일주 여행을 떠난 것에 감탄하였었다.  일행이 돌아가기로 하여서 아쉬움을 남긴 채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12시에 돌아와 보니 백인 남녀는 벌써 잠이 들었다. 이 닦고 발만 씻고 샤워도 못하고, 떨어지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누워서 겨우 새우잠을 잤다. 내일은 그 유명한 Turtle Beach에 가기로 하였는데 몹시 기대가 된다.
  
  
  제22일 : 사탕수수의 고장Bundaberg②

1996년 8월 18일 (일)
  
  6시에 일어났는데 머리는 덜 무거우나 확실히 피로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몇 사람이 함께 산책을 하기로 하고 변두리지만 Bundaberg 시내를 걸었다. 집은 몇 채 없는데 블록으로 잘 짜여지게 계획을 세워서 시가지를 정비해둔 것이 인상적이었다.

  밥, 라면, 김치, 김으로 아침을 때우고 9시에 택시를 타고 Bundaberg Rum 공장을 방문하였다. 10시에 도착하여 20명 정도의 다른 서양 방문객들과 함께 공장에 들어갔다. 입장료가 4달러였다. 공장 입구의 공터에 철로가 있고 그 위에 사탕수수를 가득 실은 화물차가 대어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사탕수수가 온통 그을려 있어서 수확할 때에 불을 지른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 쪽에는 Rum주 병을 커다랗게 만들어서 세워두었었다. 한가운데에는 꽃밭이 아니라 사탕수수를 심어두었었는데 장난기 있는 일행이 칼을 가지고 가서 그 줄기를 하나 잘라와서 조금씩 나누어주어서 씹어 보았는데 조금은 단맛이 있었다.

  홀에 들어가서 앉으니 일행을 나라별로 물어보았는데, 홀랜드 2, 영국 4, 한국인 14명(우리 일행), 호주에서 온 사람이 15명 정도였었다. 비디오로 설명을 들었는데 이 일대의 사탕수수로 설탕을 만들었으나 이제 Rum주를 만들어 내수는 물론 수출을 하게 되어서 많은 소득을 올리게 되었다는 것과 그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대략, 사탕수수수확, 운반, 즙 짜기, 발효, 증류, 저장(숙성), 병에 담기, 출하 등의 순서로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듯하였다.

  안내를 받아서 공장 안을 돌아보았다. 사탕수수 즙을 모아둔 곳과, Rum 주의 원액을 나무통에 담아서 숙성시키고 있는 창고가 인상적이었다. 원액은 시커멓게 조청 같은 액체였는데 안내하는 사람이 찍어서 끈적끈적한 것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물론 콘크리트로 된 커다란 우리 같은 곳에 많은 양이 담겨져 있었다. 숙성시키는 창고에는 아주 두꺼운 나무로 된 커다란 술통이 어마어마한 양이 쌓여 있었다.

   공장을 다 둘러보고 난 후에 공장 안에 있는, Spring Hill House라는 공장과는 다르게 산뜻하게 지어진 건물로 안내되었는데 이 안에서 시음도 할 수 있었고, 선물용으로 술을 살수도 있었다. 입장할 때의 4달러 짜리 입장권을 주면 Rum주로 만든 여러 가지 칵테일 중에 한 가지를 시음할 수 있었다. 나는 Dark & Stormy 라는 칵테일을 마셔보았는데 맛이 괜찮았다. 선물용으로 괜찮을 듯하여서 나도 35달러 짜리 두 병을 샀다.

   이제 우리 일행은 택시를 타고 Turtle Beach로 향하였다. 이곳이 거북이 알을 낳는다는 유명한 바다이지만 거북은 11월에 알을 낳는다니까 우리들은 거북이 알을 낳는 장면을 보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래도 그곳까지 가는 길은  사탕수수밭을 지나가게 되어 있어서 우리들은 황량한 벌판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사탕수수는 수확을 하고 나면 저절로 뿌리에서 새 싹이 나기 때문에 이를 적당히 옮겨 심으면 나중에 수확을 할 때까지 다른 일손이 들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이 기후가 알맞고 넓은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이 짓기에 알맞은 농사이리라.  우리들이 지나가면서 본 사탕수수 밭도, 이제 새싹을 옮겨 심어놓은 듯한 봄철의 보리밭 같은 사탕수수밭에서부터 사람 키보다 더 높이 자라 사탕수수가 갈대처럼 흩날리는 그러한 사탕수수밭까지 볼 수 있었다.

  Turtle Beach에 도착하니 주차장에는 비수기인 듯 우리 이외에 다른 차는 없었다. 옆의 단 하나 있는 식당도 영업을 하는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은 샛길을 따라 바닷가로 나아갔다.  바닷가는 너른 모래밭이 이어지고 저쪽에는 바위도 좀 있는 그러한 시원하고 깨끗한 바닷가였다. 모래밭이 끝나는 육지 쪽에는 좀 언덕으로 되어 있고 나무숲이 있었다. 우리들은 우선 저쪽 바위 있는 곳까지 걸어가기로 하였다. 서너 명이..

   그런데 저 멀리 바위 있는 곳과 우리들이 있는 중간에 남녀인 듯한 두 젊은이가 일광욕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들은 무심코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점점 가까이 가면서 우리 모두가 어쩔 줄을 몰라하였다. 점점 다가갈수록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청년은 팬티를 입고 웃옷은 벗고 있었고, 처녀는 위에는 무언가 가리고 있었으나 아래에는 아무 것도 걸친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일광욕을 한다고 반듯이 누워 있고 그 앞으로 우리들은 지나가야 하고...  그들은 그냥 누워 있고, 우리들은 그냥 걸어가고..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눈도 똑바로 뜰 수 없고, 고개도 돌릴 수 없고... 그냥 그렇게 무심한 듯이 숨을 죽이고 우리 일행 모두 말소리도 없이 지나가기는 하였으나...  하필 우리가 제일 선두가 될게 뭐람.

   우리들이 바위 있는 곳까지 가서야 뒤돌아보니 그들은 아직도 그렇게 누워 있었다. 나중에 우리 일행 십 여명이 한꺼번에 우리 있는 곳으로 오니까 그제서야 그들 둘은 옷을 입고 일어섰다. 이런 일은 또 일어났다. 웃으면서 이일을 우리 일행끼리 떠들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바다를 보고, 바위를 보고 아름다운 깨끗한 경치를 즐기고 있었는데...

   또, 호기심이 발한 몇 명이 저 모래 언덕 너머 숲에는 무엇이 있을까하고 가보았다. 내가 1m 남짓한 모래 언덕을 올라서자마자 발견한 것은 커다란 궁둥이였다. 숱한 남자(여자도 있었는지 지금도 의문이다.)들이 벌거벗고 딩굴고 있었는데 그냥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희멀건 허연 커다란 남자의 궁둥이였다. 아이구 잘못 보았구나. 급히 나는 모래 언덕을 내려오고 말았다. 그들은 그 숲 속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제법 많은 인파가. 아마도 나체족이었는 듯하다.

   다시 불러놓은 택시가 왔다. 우리들은 황량한 사탕수수밭을 지나오며 택시를 세우고 사진도 찍고 Hostel로 돌아왔다. Hostel에서 시내 쪽으로 오는 길에 통닭 집이 있었는데 그 가격이 너무 싼 것 같아서 모두들 짐을 챙겨서 오는 길에 통닭을 사서는 버스 정류소 빈터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점심으로 그걸 먹었다.

  2시 45분에 버스 출발.  오는 도중에 6시경, 조그마한 작은 읍에서 버스가 서고 기사가 안내를 하였는데 (아마도 저녁을 먹으라는 듯) 우리들은 모두 내려서 저녁 식사를 하였다. 8시 30분에 Transit Centre 도착.

   택시로 집에 도착하니 Gerry와 George만 집에 있었다. 내 방에 있는데 9시 20분 경에 불러서 나가니 온 식구가 모여 있었다. 이 집 딸 Anne가 와 있었다. 처음으로 딸과 인사를 하였다. 작년에 대학을 졸업하여 Queensland주의 북쪽에서 취직하여 있다가 주말이라 비행기로 내려온 모양이었다.

   딸이 오니 그녀의 남자 친구 (boy friend : 우리 식과는 뜻이 좀 다르다.)도 놀러 와 있었다.  이 사내가 키는 커서 하는 짓이 이상하다. 온통 설거지를 하고 있더니 설거지가 끝나자 차를 타려고 모두에게 묻고 다녔다. 물론 나는 아무런 차도 먹지 않지만, 나는 ‘한국에서는 사위는 백년 손이라 대접만 받는다.’라고 말해주었는데 이 작자가 남자 망신을 다 시키는 듯하였다.

   그 덕택에 이자는 이날 Anne의 방에서 함께 자는 듯하였다. 호주에서는 성에 대해서는 아주 개방적이라고 듣고 있었는데 정말 그러한 모양이었다. sex와 moral을 관련 지우지 않는 듯하였다.
  

제23일 : Sunshine Coast

1996년 8월 19일 (월)
  
  어제 10시 30분에 잠이 들어서 오늘 아침에 6시 30분에 일어났다. 피곤한 모양 호주에 온 후 처음으로 8시간을 숙면하였다. 간단한 산책으로 집 근처를 둘러보는 것도 정다운 느낌이 들었다.

  8시 20분에 학교로 가면서 Subway 근처의 공중전화에서 집으로 전화를 하였다. 아내와 큰아들이 교대로 받았다. 역시 걸고 나면 허전하고 집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늘은 마지막 문화 탐방으로 Sunshine Coast로 가는 날이다. 9시에 버스로 출발하였다. Brisbane에서 Sunshine Coast는 북쪽 해변으로 1시간 거리이다. 중간에 이틀 전 열차로 지나쳤던 Glass House Mountain에서 내려 기념 사진을 찍었다.  지금 보아도 내 키보다 3,4배정도 밖에 되지 않는 그 조그마한 언덕(실제 옛날 농촌의 노적보다 조금 컸다.)을 교수들이랑 그렇게 대단한 것처럼 자랑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앞에는 커다란 팻말을 붙여서 소개를 하고 있었다.

   차는 조금 더 달려서 어떤 언덕에 세웠다. 이곳은 관광지 앞의 상업지역으로 선물용품을 파는 상점이 4,5군데, 레스토랑, 옷가게가 있었다. 그런데 그 상점들이 그야말로 그림에나 있는 집들처럼 겉에서 보거나 안에서 보거나 아주 예쁘게 만들어져 있어서 우리 일행들은 이를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바빴다. 풍차를 단 집이 있는가하면 그 앞에서 실제로 나무 깎는 기계를 이용하여 기념품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었다. 상점마다 물건들이 예쁘게 잘 정리 진열이 되어 있었고 가격이 메겨져 있었으며 그 가격이 그렇게 비싸지 않아서 많은 관광객들이 사고 있었다. 언덕 위에 지어진 예쁜 상점들과 그 상점들 사이로 있는 꽃길, 그리고 친절한 점원, 비싸지 않는 가격,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서 호주의 관광산업을 이끌고 있었다.

   조금 더 가다가 차는 또 언덕에 섰는데 이번에는 조망이 너무나 좋았다. 저 멀리 너른 광야에 이어지고 있는 나즈막한 산들.  그 너른 광야에 집이라고는 한 채 밖에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넓고 인적이 드문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침 이날 날이 맑아서 새파란 하늘 아래에 멀리까지 바라다 보이는 풍경은 참으로 호주다운 풍경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 Sunshine Coast에 도착하였다. 조그마한 바닷가의 소읍으로 거의 관광객을 위해 마련된 시설물들이 있었다. 먼저 Underwater World라는 곳에 입장하였다. 안에는 많은 바다 생물들의 표본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특이한 것 하나는 커다란 고기의 이빨을 벌린 채로 설치를 해 두어서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사진도 찍고 하였다. 아래층에는 물개 쇼를 하고 있어서 그곳에서 한참을 구경하다가 수족관으로 향하였다.

  이 수족관은 참으로 장관이었는데, 사람이 수족관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수족관 안으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해 놓았었다. 즉 커다란 수족관 아래에 U자 모양의 기다란 통로를 만들어서 그 아래쪽에 공항에서 물건을 찾을 때에 물건을 얹어서 돌아 나오도록 해 둔 것과 같은 장치를 해 두어서 사람이 입구에서 서면 그냥 한 바퀴 돌아 나오도록 해두었었다.

  가만히 입구에 서니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좌우와 위에는 그대로 물고기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이 물고기들이 여러 종류가 있어서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모습은 정말로 바다 속에 들어온 느낌을 갖게 하였다. 입이 커다란 물고기가 있는가 하면 커다란 상어가 다가오기도 하였다. 색깔이 예쁜 물고기가 있는가 하면 흉칙하게 생긴 놈도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나아가다가 돌아 나오게 되어 있었다. 관광객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나 제법 구경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너무나 신기하고 볼만하여서(따로 입장료도 받지 않으니) 나는 3번이나 돌아 나오면서 실컷 구경을 하였다. 다른 일행도 역시 그렇게 하는 듯하였다.

   Underwater World에서 나와서 빵, 소시지, 파이 등으로 점심을 때웠다. 이곳 관광지가 대학 구내 식당보다 더 가격이 싼 것은 참으로 신기했다. 그 옆 전망대로 올라가서 이 일대 바닷가를 둘러볼 수 있었다.

  시간이 좀 남아서 일행은 바닷가에 가보기로 하였다. Gold Coast만큼 모래가 부드럽지는 않았으나 이곳의 모래도 제법 부드럽고 고왔다.

  3시 30분에 출발하여 4시 50분에 학교에 도착하였다.  Toowoong에서 모두 내리고 학교에는 지도 교수인 Jan과 Margaret 와 나 이렇게 셋이서 내렸다.

  5시 30분에 집에 도착하였다. 아침에 6시 30분에 한국 식당에 가기로 Gerry네와 약속을 하였기 때문에 서둘렀다. Gerry가 차를 몰고 6시 40분에 집을 출발하였다. 그에게 Diana 호텔이나 Mater Hospital을 이야기하니 쉽게 찾았다. 비원의 아줌마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모든 메뉴를 주인 아줌마에게 맡겨두었었다. 먼저 빈대떡을 셋이 나누어먹었다. 나도 모처럼 먹는 빈대떡이 맛이 있었다. 그들도 맛이 있다고 하였다. 그들은 식사시에 포도주를 즐겨 마시기에 Gerry에게 와인을 청하라고 하니 주인 아줌마가 여러 가지 와인을 열거하였으나 Gerry는 기어이 가장 싼 것을 한 병 청하였다. 불고기, 갈비, 닭고기를 각 1인분씩 먹는데, George가 늦게 와서 불고기 1인분을 더 시켰다. 즉, 한국 요리를 각각 모두 맛보기 위해서 갖가지를 1인분씩 시킨 것이다. 주인 아줌마가 어렵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한국 음식을 맛보게 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친절하게 그렇게 해주었다.

  내가 주인 아줌마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Chiristine는 Kim이 말을 저렇게 빨리 할 줄 아느냐고 깜짝 놀랐다. Gerry가 자기 나라 말이니 그렇지 하면서 아내에게 모처럼 핀잔을 주어 모두 웃었다. 후식으로 수박 4쪽, 아이스크림 4개를 먹었다. 합계 75달러를 카드로 결재하였다. 그들도 만족하였고 그런 대로 나도 만족하였다. 우리 일행 중 다른 이들 중에 이렇게 하숙집 주인을 대접하는데 100달러를 썼다는데 좀 이상하였다. 계산이 잘못되었는지 너무 적게 먹었는지. 하여튼 사진도 한 장 찍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고 그들 모두 만족한 모양이었다.

   10시에 집에 오니 Christine는 뉴질랜드에 가기 전에 빨랫감을 전부 내어놓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X-mas에는 계속 카드를 주고받자고 약속을 하였다. 정은 가야 오는 모양이다.

제24일 : opal을 사다

1996년 8월 20일 (화)
  
  오늘은 산책길에 카메라를 들고나섰다.  집을 나서면서 하숙집도 찍고, 길거리에도 기념이 될만한 걸 찍었다. 이제 와서 다시 며칠 남지 않은 산책길이 그리워서 기념이 될까하여서이다.

   2주일 째에 가장 마음이 울적하더니 조금씩 기분이 살아나서 생기를 되찾은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다른 동료들을 보아도 좀 났다.

  우리 조에 두 번 교사가 되는 경우가 있어서 처음에는 만우 씨에게 양보하고 내가 vice teacher노릇을 하였으나 두 번째는 나가서 게임을 지도하였다. 벌써 교사 노릇을 네 번째나 하니 조금 나아지는 듯하였다.

   수업을 마치고 3시 20분에 city로 향하였다. 아내에게 줄 선물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 동안 여러 번 보아두었던 Queens Street에 있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면세점에서 290달러 짜리 파아란 opal을 1개 눈 딱 감고 샀다. 더 큰 것, 더 질이 좋은 것, 더 비싼 것도 있지만 나에게는 가장 알맞다고 생각하고 그 동안 opal 상점에 들를 때마다 보아두었던 것이었다. 역시 면세점이라 여러 가지 서류를 작성하고 샀다.  그 점원에게 영어로 말하다가 일본어로 조금 묻고 해도 아예 영어로만 말하였다. 내 일어가 서툴러서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탓일까, 아니면 해외의 일본인들이 영어를 굳이 사용하려고 하는 타성 때문일까.  

  기념으로 부메랑을 현대 면세점에서 산 것과 똑 같고 조금 큰 것을 10달러에 하나 더 샀다. 혹시 귀국하여 누군가에게 줄 선물이 필요할 때에 요긴하지 싶어서였다.

   집으로 돌아오니 오늘은 George가 나를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Christine가 준비해준 스파게티를 George가 전자레인지에 데워주어서 같이 먹었다. 국내에서 먹는 것보다 냄새가 아주 진하게 나서 처음에는 먹기에 곤란하였었으나 이번에는 아주 맛이 좋았다. 그러나 양은 너무 많아서 억지로 다 먹었다.

  후식으로 과일에 카스타드를 얹어서 먹었다. 국내에서 카스타드라는 과자를 맛있게 사먹은 나는 카스타드가 과자 이름인줄 알았는데 크림의 일종이었다. 달고 맛이 있었다.

  오늘부터 짐을 챙겨야겠기에 9시쯤 내방으로 돌아와서 짐을 챙기기 시작하였다. 빨리 고향집으로 돌아가고픈 마음과, 이곳의 생활이 그리운 그러한 마음이 교차하니 내가 생각하여도 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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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호주로 어학 연수를 떠나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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