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의창의 그림이야기

호주로 어학 연수를 떠나다 (4)
제25일 : 교정에서

1996년 8월 21일 (수)
  
  오늘도 카메라를 가지고 산책길에 나섰다. Hawken Drives길을 건너 반대쪽으로 나갔다. 조금 가다보니 골프장이 나왔다. St. Lucia Public 골프장이라고 씌어 있었다. 한국에서도 골프장 안에 들어가 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이렇게 울도 담도 없는 골프장이 신기하여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단 한 홀 짜리 골프장이지만 넓고, 잔디가 잘 자라고 있었다. 너무 넓어서 끝까지 가보지는 못하고 홀 컵이 있는 곳까지 둘러보고 나왔다. 아니 이런 조그마한 동네에도 자체에서 마련한 골프장이 있구나!  역시 시민들을 위한 행정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학교에서 오늘 점심은 모처럼 잔디에서 먹었다. 점심을 사서 어디에서 먹을까하고 둘러보고 있는데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교정의 잔디에 여럿이 둘러앉아서 식사를 하려하고 있었다.  모두가 모이니 별 음식이 다 있었다. 식은 밥이지만 쌀밥이 있었고, 김치, 김, 들깻잎까지 있었다. 거기에 고추장도 있어서 호주에 온 후에 처음으로 이들을 맛볼 수 있었다.

   수업을 마친 후에 farewell function을 대비하여 남자들은 밀양아리랑을 제창하는 연습을, 여자들은 부채춤을 연습하였다.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이 대학에서의 생활을 아쉬워하면서 잔디밭에 앉아 사진도 찍고 노래도 부르고 하였다. 모두 일어서려고 하면 내가 기어이 좀 더 앉았다 가자 하면서 붙들어 앉히곤 하였다. 나로서는 한국에서도 이렇게 대학 교정에 앉아 환담하는 이러한 낭만을 겪어보지 못하였으니.. 올빼미처럼 야간으로 모든 과정을 졸업한 내 신세를 아는 몇 명 호주에서 친해진 분들이 나를 생각해서 끝까지 함께 있어주니 고마웠었다.

   저녁에는 George가 구워주는 Ram고기( 이곳 호주에서는 어디를 가나 beef와 ram이 거의 같은 가격으로 모든 식당에서 비슷하게 팔리는 듯하였다.)와 감자를 먹었다. 디저트는 케이크와 아이스크림.  온 식구들이 모여서 X-files란 드라마를 보았다. (귀국하여 보니 국내에서도 이 때에 이 드라마가 번역되어 인기 리에 방영되고 있었다.)


제26일 : Canterbury College와 Farewell Function

1996년 8월 22일 (목)
  
  6시 20분에 일어나서 천천히 산책을 하였다. 이제 아침 산책도 한 번 만 더 남았다.  다니던 Subway 쪽은 내일로 미루기로 하고 교회 쪽으로 가서 교회와 성당을 사진 찍었다.

  7시 20분에 아침 식사를 하였다. 라면이 1개 남았으므로 토스트 4개를 잼을 발라 김치와 함께 먹었다. 식사 후에 대학 교수들 중에 내 마음에 가장 들었던 Jan과 Margaret에게 줄 선물(부채)에 글을 붓펜으로 썼다. 한글과 영어로 써서 그들이 뜻을 알도록 하였다.

  8시 40분에 학교에 도착하여 수업 시작 전에 그들의 방으로 갔다.  많은 분들이 함께 쓰는 방에서 둘에게 선물을 전하니 너무 반가워하였다. 함께 셋이서 사진도 찍었는데 그들은 부채를 펼쳐들고 찍었다. 나중에 우리 일행  중에는 한국 우표를 여러 장 가지고 가서 선물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들은 비싼, 좋은 것보다 마음을 전하는 조그마한 선물을 좋아하는 듯하였다. 2만원 이상의 고가 품은 뇌물로 처벌받는다고 하였다.

  9시에 보통 때와 같이 수업이 시작되었으나 환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여교사 한 명이 열이 심하여 애를 먹었고, 강원도의 황 선생님이 토하기도 하였다. 일행 중에 이 선생님이 수지침을 놓고 하여 좀 진정이 되었다.

  오늘은 좀 일찍 11시에 식사를 하고 12시에 Canterbury College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우리 나라처럼 학교 앞에 어린이들의 백화점이라는 질 나쁜 과자나 문방구를 파는 점포가 없는 것은 어느 학교나 같았고, 교문이나 간판하나 없는 학교였다. 그냥 단층 짜리 건물만 몇 채 있는 것이 학교였다.

  입구에 들어가자 미리 우리들이 온다는 것을 안 제복을 입은 어린이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인사도 하고 반가이 맞아주었다. 마침 우리 식으로 하면 중간 놀이시간인 듯 교내 매점에서 과자를 사들고 온 아이도 있었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놀고 있었는데 우리 일행이 부르니 웃으며 뛰어와서는 함께 사진을 찍자니 포즈를 취하면서 귀엽게 사진을 찍었다. 어른을 보고 피하거나 경계하는 눈빛이 전연 없었다.

   교장이 직접 우리들을 한 교실로 안내하여서는 간단한 학교 설명을 하였다. 이 학교는 5세에서 17세까지의 아동을 80에이커의 방대한 넓이의 학교 부지에 1층 짜리 로만 교실을 지어서 교육을 하고 있었다.  넓은 잔디로 덮인 운동장과 수영장 등 부러운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동 수는 primary 400명, secondary 600명쯤이었다.

   학교장의 설명이 끝나자 교실 앞에 우리의 6학년쯤 되는 아이들을 쭉 세웠는데, 우리 일행을 여러 팀으로 나누어서 그 아이들이 학교를 안내하도록 하였다. 우리 팀은 Jamy라는 좀 비만형의 남자아이가 안내를 맡았는데 이 아이가 아주 진지하게 우리들을 데리고 학교 곳곳을 다니면서 안내를 하였다. 우리 식으로 부진아를 지도하는 곳도 있었고, 음악실, 미술실 등을 둘러보았고, 도서실도 보았다. 탈의실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더니 거기에 체육을 하고 들어온 고등학생쯤 되는 남학생들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함께 사진을 찍자니 멋쩍은 듯 웃으면서도 포즈를 취하여 주었다.

    1층 교실에 개방형 복도였는데, 교실 쪽에 학생들이 가지고 온 책가방을 정리해 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책가방이 제법 크고 단단한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었다. 모든 학생은 학부모가 차로 학교에 데려다 준다고 하였다. 물론 이웃끼리 함께 데려다 주는 경우가 많고. 그런데 모든 교실에는 학 반 표시는커녕 아무런 안내나 표어 같은 문구가 없어서 처음 오는 우리로서는 안내를 받지 않으면 무슨 교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허기는 그들은 다 알고 있을 테니까.

  드디어 우리 조가 동화를 들려줄 1학년 교실로 안내되었다. 우리 조가 들어간 교실에서는 여교사가 담임을 하고 있었다. 마침 남극에 대하여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들어서자마자 남극에 사는 물고기를 그려서 오린 것을 들고 어린이들이 너도나도 우리 일행에게 자기가 만든 것을 자랑을 하였다. 우리들은 모두 교사들이라 어린이들의 심정을 잘 아는지라 자세히 보면서 이곳 저곳 잘 된 점을 지적해주며 칭찬을 해주니 너무도 좋아하면서 또 다른 우리 일행에게로 가서 자랑을 하곤 하였다. 너무나 스스럼없이 대하는 아이들을 보니 귀엽기도 하고 티없이 자라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였다.

   담임 선생님의 설명으로는 지금 며칠 째 남극에 대하여 공부를 하고 있는데, 남극에 관한 글을 구해서 읽고 토론함으로써 국어 공부를, 남극의 지형이나 위치, 기후 등에 대하여 공부함으로써 사회, 과학 공부를, 남극에 사는 동물을 그리고 만들어봄으로써 미술 공부를.. 이런 식으로 소재를 남극으로 잡아서 각 교과목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교육 과정만 있지 교과서 없이 하는 수업을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지 실제로 와서 보니 느끼는 바가 컸다. 이 모든 수업을 이 담임교사 혼자 결정하여 하고 있으니...

  우리들의 동화 들려주기는 이 반 아동 20명을 반으로 나누어서 10명은 바깥의 나무 그늘에서, 10명은 교실에서 우리 두 조가 각각 들려주기로 하였다. 먼저 내가 The Sun and the Moon을 들려주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 한국은 아시아의 동쪽에 있는 나라라는 것. 한국의 동화를 들려주게 되어서 기쁘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림을 보여가면서 들려주었다. 그들은 아주 흥미 있는 듯 진지하게 주의 집중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허기는 10명이니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도중에 나는 흥미를 더하기 위하여 예상도 시키면서 이야기를 진행하였다. 어머니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그림을 보며 모두들 탄성을 질렀다. 그런데 이야기가 끝나자, 서슴없이 아이들의 질문이 있었다.  실제 이야기이냐, 누가 그리고 썼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Korean Fairy tale이다. 나와 우리 조의 선생님들이 그리고 썼다고 답하였다.

   일단 이야기가 끝나자 담임교사는 바깥어린이와 교실 안의 어린이를 교대시켜서 두 이야기를 모두 듣도록 하였다. 이번에는 우리조의 이 선생님이 나와 교대하여 발표를 하였다. 모든 발표가 끝나고 나서 어린이들은 그들이 만든 Father's day (호주에는 어머니날 대신 아버지날이 있었다.) 카드를 들고 와서는 자랑을 하기에 우리들은 또 아주 잘 만들었다고 칭찬을 해주고 그들과 헤어져 reception party가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party장은 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이층으로 된 건물이었는데, 계단을 올라가자 우리들을 의식했든지 태극기를 꽂아두었었다. 그 아래에 이 학교가 서울 사대부국과 자매결연을 맺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복도나 어디에 우리 식으로 홍보를 위하여 전시해둔 것은 이것이 유일한 것이었다. 교장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서울사대부국과의 자매결연 이야기를 하고 선택과목으로 이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불어와 이탈리아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한국어도 곧 개설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party장은 조그마한 교실이었는데 주스와 빵(식빵이 아니고)이 고작이었으나 성의 있게 마련되어 있었다. 이들의 차림에는 돈은 크게 들이지 않고 손님을 기쁘게 하자는 뜻이 있었다. 우리들은 빵과 주스를 조금씩 들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왕에 이런 기회에 이곳 교사와의 대화를 해보자는 뜻으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서 한 여교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서울의 한양대학교에서 intensive course로 2개월 동안 영어를 가르치고 지난 목요일에 방금 돌아왔다고 하였다. 그는 한국에 대해서 아주 인상깊고 좋았었다고 이야기를 하기에 나도 한달 쯤의 호주 생활이 아주 좋았다고 좋은 점만 이야기를 하였다. 오는 말이 좋으니 가는 말이 좋을 수밖에.

   그런데 그들은 모국어가 영어라서 이렇게 어디를 가나 그것으로 벌어먹을 수 있다는 것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아니 이 생각은 우리 일행 모두가 갖는 것으로 영어가 모국어인 덕택에 받는 프리미엄이 굉장히 크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4시 20분에 대학으로 돌아왔다. 오늘 6시에 Farewell Function이라고 파티가 있으니 빨리 집으로 가서 Gerry와 Christine를 데려와야 한다. 아침에 그렇게 약속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일행 중 별로 집으로 돌아가는 이가 없다. 황 선생님도 같이 산책이나 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집으로 전화를 하였다. Christine는 자주 참석하는 Farewell Function이라 장소와 시간도 다 알고 있었다.

  황 선생님과 함께 학교를 둘러보기로 하였다. 이제 내일이면 떠난다고 하니 더 정답게 느껴지는 교정이었다. 뒤쪽으로 둘러보니 기숙사도 있었다. 공원처럼 아름다운 호수와 분수를 보고, Brisbane강을 따라 이어지는 야자수 길, 잔디로 덮인 축구장, 수영장...  너른 교정을 천천히 산책하니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그냥 파티 시간이 다되어 버렸다.

   6시에 파티가 시작되었는데 한 쪽에는 마실 음료수와 술들이 있고, 직원이 계속 안주를 날라다 주는 식으로 파티가 이어졌다.  참석자는 우리 일행과 우리를 지도했던 교수들, 그리고 home stary 주인내외들이었다. 그런데 그 안주 중에 꼬치로 되어 있는 것이 맛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캥거루 고기다 라고 해서 더 맛이 있는 듯 (일행 중에는 시내에서 캥거루 고기를 먹은 이도 있었다.) 모두들 가져오기 바쁘게 그걸 빼서 안주로 먹었다. 먹는데는 호주 사람들도 뒤질세라 두 세 개 씩 고치를 빼어서는 정신없이 먹고 있었다.

   그런데 Christine와 Gerry가 오지를 않았다. 할 수 없이 밖에 나가서 오나 보고, 다시 들어오고 하였다. 6시 30분에 그들이 왔다. 파티가 어우러지니 교수들이 모여서 한쪽에 서서 먼저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노래에 가사만 우리 한국 교사들이 연수를 와서 열심히 하여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간다는 내용으로 고쳐서 불렀다. 다음에는 우리 남자들이 민요를 불렀다. 그리고는 여교사들의 부채춤이 있었다. 한국인인 내가 보아도 여교사들의 부채춤은 일품이었다.  이를 위해서 서울에서 연수를 할 때부터 한복과 부채를 준비하기로 하였었는데 너무나 아름답고 잘 하여서 모든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었다.

  Gerry의 반응은 이렇다. 우리 일행 중에 한복을 입은 남 교사가 한 사람 있었는데 나보고 왜 안 입었느냐, 남 교사들이 부른 노래는 술 마시면서 부르는 노래냐, 등등,  나는 우리 일행 중 친했던 분을 몇 사람 소개를 시켜주었는데 모두들 Gerry가 남자답고 잘났다고 하였다. 그는 꼭 뚱뚱한 해리슨 포드같이 생겼으니. 나는 여교사를 인사시킬 때마다 그에게 ‘This is my girl friend."라고 하면서 놀렸는데, 그는 웃었으나 Christine는 처음에는 깜짝 놀랬었다. 그러나 농담인줄 알고는 모두들 웃었다. 나도 다른 동료들의 하숙집 주인들에게 소개되었었다. 그렇게 어울려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파티는 무르익어 갔다.

   8시에 집으로 돌아오니 저녁 생각이 없다. Christine는 수프와 빵을 넣은 아이스크림을 주어 모두들 맛있게 먹고 저녁을 때웠다.
  
   내방으로 와서 방 정리랑 짐을 정리하였다. 내일은 아예 내가 밖에서 저녁을 먹고 올 것으로 알고 있다. Christine는 빨래를 잘 해두었다. 짐을 챙기기가 좋게.
  

제27일 : 수료식
1996년 8월 23일 (금)
  
   오늘이 마지막 산책이라는 생각도 들고, 이제 지리도 좀 익혀서 알만하기에 멀리까지 갔다.  조그마한 공원이 곳곳에 있고, 급수 시설, 쓰레기통 등이 있었다. 너무 오래 산책을 하여서 다리도 좀 아팠고, 지난 밤 잠을 설쳐서 머리도 약간 무거웠다.

   마지막 라면 1개와 토스트와 잼, 김치, 사과 한 조각으로 아침을 때웠다. Christine의 안내를 받아서 집안을 돌아보며 사진도 찍었다. 사실 나는 내방만 오갔지 다른 방에는 거실 이외에 가보지를 않았다.  그들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 같기도 하였지만 혹시라도 의심받을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약간은 언덕에 집이 있기 때문에 지하(혹은 1층)에 멀리간 이 집 딸 Anne의 방이 있었고, 그들 부부의 방은 가장 안쪽에, 그 다음이 아들 George의 방, 그 다음이 조그마한 내방. 내방 맞은 편이 화장실 겸 욕실, 욕실 다음이 다용도실, 그 다음이 거실로 쓰는 식당과 부엌, 현관 쪽에 응접실과 거실. 거실에는 벽난로가 있었고, 모든 가구들은 흠도 있는 낡은 것이었으나 제법 어울렸다. 빈틈이 있는 계단이나 코너에는 어김없이 책장을 마련해서 수많은 책들을 꽂아두었었다.

   그러고 보니 7개의 방중에 내가 머문 방이 가장 작았었다. George의 방은 그야말로 온통 어지럽게 물건들이 흐트러져 있어서 난장판이었다. 그들 부부의 방은 아주 안쪽에 아늑하게 잘 마련되어 있었다. 딸의 방도 비교적 좋았다. 이러한 것들을 나는 모두 사진에 한 장씩 담았다. 기념이 될까?

  학교에서는 9시에 시험이 있었다.  들어오던 날 치른 시험과 거의 비슷하였었다. 개인의 성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 연수생들의 진척의 정도를 보는 건데도 모두들 신경을 많이 쓰는 듯하였다. 나는 그 동안 4주일이 지나도 성적이 별로 나아진 듯하지 않았다.

  오늘 수료식을 마치면 내일부터는 자유 관광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은 서울에서 미리 여행사와 계약을 해두었었고, 다른 일행은 호주에 와서 여행사와 계약을 해두었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약 1주일간 호주와 뉴질랜드 관광을 하게 되어 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그런데 그 분이 오늘 짐을 모두 챙겨서 나타난 것이다. 혼자 관광을 안하고 돌아가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교육부에서 우리들에게 내려준 선택권은 자기 돈을 내어서 1주일 한도로 함께 관광을 하든지 아니면 귀국을 하든지 둘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그분 혼자 귀국하기로 결정을 한 것이었다.  서울에서는 모두들 멀리까지 간 김에 조금만 돈을 쓰면 관광을 하는데 하고 함께 관광을 하기로 하였었다.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모두들 그분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던지.  나도 속으로 1주일간의 관광을 하기로 결정한 나 자신을 많이 나무랐다. 모두들 그분을 보면서 멍하니 그리운 고국 식구들 생각을 하였다. 그분은 의기양양하게 자기 짐을 들고 우리들 앞을 지나갔다.

  11시에 수료식을 하였다. 연수 원장이 처음으로 나타나서 수료증을 개인별로 나누어주었다. 그 동안 Jane이 항상 조그마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곤 하였었는데 오늘 그 사진들이 몽타쥬가 되어서 4절지 만한 사진이 되어 우리들 손에 쥐어졌다. 보니 수업 중, 혹은 문화 탐방 기간에 찍힌 내 사진도 4곳에나 나와 있다.

   수료식이 끝나고 가든파티가 조촐하게 있었다. 역시 빵(식빵이 아닌)과 음료수를 간소하게 차리고 아름다운 그 교정에서 마지막 담소가 선 채로 이어졌다.

   Brisbane에서의 마지막 날이라 그냥 무료하게 지내기가 싫은지 모두들 City로 나갔다. 우리 일행 몇 사람은 Queens Street에 있는 음식 몰에 가서 타이 음식을 주문하였다. 조금 단 맛이 나는 국수로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먹게 되어 있었는데 흔히 말하는 데로 한 번은 먹을 만하였다.

   South Bank 공원으로 나가서 마지막 장을 구경하였다. 또 China Town으로 갔다. 된장 찌개를 먹고 현대 백화점에 가니 아주머니가 야한 곳이 있다고 하였지만 우리들은 물리치고 노래방을 물었다. 한국인이 경영한다는 노래방으로 가서 맥주를 시키고 노래를 부르고 놀았다.  연수가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에 모두들 즐겁게 오랜만에 한국 노래를 불렀다.

  다시 City로 가서 마치 시험을 끝낸 고등학생들이 번화가를 노니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돌아다녔다. 어디 가서 한 잔 하자는 의견이 많아서 지하에 있는 한 술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앞에 서 있는 덩치가 크고 정장을 한 백인 여자가 우리들의 옷차림을 보고는 모자를 벗어라. 티셔츠를 바지 안으로 넣어라 고 하였다. 들어오는 손님을 일일이 체크하고 있었다. 복장, 연령, membership 등. 그냥 그렇게 들어가면 될 것을 기분 나쁘다고 다른데 가자고 하는 일행이 있어서 또 다른 술집으로 들어갔다. 결국 다른 술집에서 맥주 한 잔씩을 앞에 놓고 마지막 Brisbane에서의 밤을 즐겼다.

  시간을 맞추어서 나왔는데 조금 늦어서 512번 버스를 놓쳐, 30분을 더 기다리게 되었다. 거기 Queens Street 거리의 벤치에 혼자 앉아서 밤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던 그 30분이 아직도 아련히 추억으로 떠오른다. 마침 여자 기마 경관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내 앞으로 지나가기에 얼른 카메라의 플래시를 터뜨렸다. 그리고 마지막 Queens Street를 눈에 넣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내가 쓰던 수건까지 모두 빨아 말려서 잘 개어서 내방에 쌓아두었다. 그리고 Christine가 아내에게 주는 선물도 내 책상 위에  있다. 지금부터 짐을 꾸리고 자야지. (나중에 귀국하여 보니 그 선물이라는 것이 호주의 동물들을 그린 예쁜 편지지 묶음이었다. 그것도 단 한 권. 그들이 얼마나 인색하고, 선물은 마음이지 돈을 들이지 않는다는 생활 태도를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

제28일 : Brisbane이여 안녕 Sydney로

1996년 8월 24일 (토)
  
   Brisbane에서의 마지막 밤이라 그런지 지난밤에는 잠을 설치었다.  여기 숲 속의 마을에서 자다보면 침대 위에 벌레들이 올라올 경우가 많다. 자는데 목으로 메뚜기 비슷한 곤충이 기어 올라와서 잡았다.  5시 가까이 되면 온갖 새들이 지저귄다. 오늘 아침에는 잠도 오지 않고 하여서 5시에 일어나서 산책을 하였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Subway를 돌아 왔다.

   6시 30분쯤에 돌아오니 마지막 산책에서 열쇠가 없다. 새로 옷을 갈아입느라 수첩에 넣어두었던 열쇠를 수첩 째 그냥 방에 둔 모양이었다. 올라가며 내려가며 집 앞뒤를 헤매면서 George를 불렀다. 드디어 Christine가 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열쇠 잊어버린 이야기를 하고 열쇠와 카메라를 반납하였다. 고맙게 잘 사용하였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6시 50분에 좀 이른 아침 식사를 하였다. Christine는 마지막 내 조찬을 위해서 맛있는 크라상 3개를 준비해두었었다. 나는 크라상 2개와 잼, 김치 사과로 아침 식사를 하였다. 이 때에 먹은 그 크라상 빵이 너무 맛이 있어서 귀국해서도 한 번 사먹었는데 국내 제과점의 것은 크기는 좀 작아도 맛은 역시 좋았었다.

    나는 그 동안 사용하던 회중시계를 내 방에 그대로 두었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몰라도 다음에 home stay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싶었다. 또 어떤 일본인이 남겨두고 간 일본 선전 팜플렛 옆에 김포공항에서 가져온 서울이나 경주를 소개하는 팜플렛을 잘 정리해 두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여분으로 갖고 간 속옷 한 벌을 Christine에게 주면서 그 동안 빨래해준 고마움의 표시라고 하고, 원래 한국 섬유제품이 세계 제일이지만 이건 2등 품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사실 고급품은 아니었지만 평소에 Gerry가 입던 속옷과 비교하면 월등히 좋은 제품이었다.

   7시 10분에 Gerry가 운전을 하여 Christine와 함께 학교로 향하였다. 모두들 모이고 있었다. 교정에 서 있는 버스 앞에는 하숙집 주인들이 대여섯 명 서성이고 있었다. 드디어 출발할 시각이 되었다. 나는 Gerry와 악수를 하였다. 그리고 Christine에게도 악수를 하려고 하였는데 그녀는 나를 끌어안더니 내 뺨에 뽀뽀를 하였다. 차안의 모든 일행이 박수를 치고...그렇게 한 달 가까이 함께 지내던 하숙집 식구들과 헤어졌다. 차안에서는 한 여 선생님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밖에서 손 흔드는 하숙집 아주머니와 이별의 손을 흔들면서... 버스는 천천히 출발하여 Queensland University의 아름다운 교정을 벗어나고 있었다.

   Brisbane 공항에 도착하여 이번에는 시간이 좀 있었으므로 공항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Brisbane은 호주에서 3번째의 도시로 인구 약 130만의 그리 크지 않은 도시인데 그 공항의 크기는 대단하였었다. 탑승하는 gate가 60개나 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구 250만의 대구공항은 gate가 1개라는 것과 비교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호주는 넓어서 항공 교통이 발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9시 40분에 Brisbane을 출발하여 11시 5분에 Sydney 공항에 도착하였다. 도착하기 전에 왼쪽 귀가 너무 아팠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전에도 비행기를 탈 때면 이렇게 왼쪽 귀가 간혹 아팠다. 승무원은 그런 사람이 간혹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었지만 나는 가만히 짐작하건 데 어젯밤에 술을 마신 탓일 것 같았다.  이제가지 술을 먹었을 때마다 귀가 아팠으니까.

   12시부터 환영 나온 여행사 직원의 안내를 받으면서 이제부터는 관광버스를 타고 정말 관광을 시작하게 되었다.

   먼저 경치가 좋다는 맥과이어 포인트(Mrs Macquaries Point)라는 곳으로 안내를 받았다. 바닷가여서 옆으로는 암벽이 아름다운 경치를 만드는 그러한 곳이었는데 특히 전망이 좋았다.  멀리 그 유명한 오페라하우스(Operahouse)와 하버브릿지(Harbor Bridge)가 바닷가 저편으로 바라보이는 그러한 곳이었다. 한 쪽으로는 Sydney 시가지의 고층 빌딩들이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성 메리 캐톨릭 성당을 구경하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여러 가지 유물을 관람하였다.  성당 안 한가운데에 있는 성모자상이 아름다웠었다. 다음으로는 크루즈를 타고 바다 유람을 하게 되었다. 이 크루즈에서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배에 탄 관광객도 거의 90%는 한국인이고 그 식단도 거의 한국식이었다. 하얀 쌀밥을 실컷 먹을 수 있게 하였는데 이 밥이 한국식 밥이었다.

   선상 유람선에서의 시드니 항의 유람은 정말 시원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 할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이었다. 저 멀리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릿지를 바라보면서, 시드니 시가지를 바라보며, 수많은 욧트들의 하얀 돛이 수 놓여져 있는 맑디맑은 바다를 나아가는 그 유람선의 갑판에서 우리들은 사진도 찍고 오랜만에 연수에서 오는 피로를 풀 수 있었다.

   크루즈에서 내려 간 곳은 Bondi(그들은 본다이라고 말하였다.) 해변이었다. 모처럼 바닷가에 나온 일행은 다리를 걷고 바닷물에 담그기도 하고 모래밭에서 딩굴기도 하면서 즐거워하였다. 시드니에는 이런 바닷가 모래밭이 32곳이나 있다고 하였다.

  시간이 좀 남아서 Sydney National Harbor Park이라는 곳으로 갔다. 옛날 빠삐용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절벽을 촬영한 곳이라고 하였는데 저 멀리 보이는 절벽이 그 영화에 나오는 곳 같았다. 이곳을 달리 자살 절벽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늦게서야 오페라하우스에 갔다. 그 앞에 있는 하버브리지는 60년 전에 영국 차관으로 건설하여 2년 전까지 통행료를 받았는데 이제 모두 갚아서 무료라고 하였다. 도로 8차선, 철로 2차선, 인도 2차선이 있는 아름다운 다리였다.

   오페라하우스는 바다 위에 조립식으로 지었다고 하였다. 시간이 없어서 공연을 관람하지는 못하였다. 입구에 들어가니 기념품을 파는 곳이 있어서 내 버릇대로 조그마한 건물 모형을 9달러에 샀다.

  저녁은 한국 식당에서 먹었는데 푸짐한 식사를 오랜만에 하게 되었다. 한 분이 소주를 20달러에 1명을 사서 몇 친한 사람끼리 한잔씩만 돌려서 마셨다. 이런 것을 꿀맛이라고 할까.

    패키지 관광이라 그런지 Hotel은 이름은 Hilton이지만 시드니에서 아주 떨어진 변두리에 있었다.  나는 부산의 노 선생님과 한 방을 배정 받았다. 방이 정해지자 산책을 나가기로 하였다. 노 선생님이 원하지 않아서 언제나 처럼 혼자 산책을 나갔다. 호텔 가까이에 공원이 있었다. 그런데 그 공원에는 바비큐 시설이 되어 있어서 누구든지 고기만 준비해오면 구워먹을 수 있게 철판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아래에 글자가 만일 가스가 나오지 않으면 시의회로 연락을 주세요 라고 되어 있었고 전화 번호도 있었다. 세금을 받는 민주 국가이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옆에 구운 고기를 가족과 함께 먹을 수 있게 벤치며 탁자가 있었다. 몇 군데나.

  도로를 따라 한없이 걸어보았는데 주로 주유소나 중고차 판매장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주유소는 조그마한 수퍼를 겸하고 있었다.

  돌아와서 호텔 로비의 상점에서 50센트를 주고 그림 엽서를 사서 독일의 조카에게 호텔 프론트의 직원에게 부탁하여 부치니 95센트를 내어 라고 하였다. 어떻게 대학 우체국보다 더 가격이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에 내 옆에 한 한국 학생이 다가와서 애덜레이드 (Adelaide)로 가는 비행기를 놓쳤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왔다. 내가 영어를 더 잘 하나?  그래 프론트의 직원에게 대신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였는데... 잠은 어떻게 이 호텔의 객실을 잡았는데 식사가 안 된다고 하기에 아까 보아두었던 주유소에 가면 간단한 요기할 것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일러주었다.

   그런데 일행은 그 동안 무엇을 했느냐하면 모두들 연수가 끝난 기분에 호텔 바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곳 저곳에서 나를 부르고 하여 할 수 없이 그들 틈에 끼었는데 모두들 기분을 내느라고 자꾸 맥주를 사오기에 어쩔 수 없이 좀 비싸다 싶은 맥주를 마셨다. 그런데 우리 일행 20명이 그 호텔 바의 맥주를 동을 내어버렸다. 원래 그렇게 많이 팔리지 않으니 준비도 좀 적었겠지만, 우리 일행이 너무 마신 탓도 있었다. 그제서야 모두들 객실로 올라갔다.

   돌아와 샤워하고 12시경에 잠이 들었다.

제29일 : Blue Mountain 관광

1996년 8월 25일 (일)
  
   6시에 일어나서 같은 방을 사용한 부산의 노 선생님과 함께 아침 산책을 하였다. 호텔 근처에는 테니스 코트도 있고, 공원도 있고 제법 산책을 할 만한 곳은 있었다. 호주란 나라는 어디를 가나 자연이 아름답고 잘 가꾸어지고 또 보존되어 있어서 산책하기에는 어디든 좋았다.

   Hotel에서 뷔페로 아침 식사를 하였다. 양식은 양식인데 쌀밥도 있고 콩나물까지 있는 그러한 양식이었다. 즉, 한국 관광객이 너무 많으니 값싸고 손쉬운 한식은 함께 마련해 둔 모양이었다.

  9시에 버스에 올라 블루마운틴(Blue Mountain)으로 관광을 가게 되었다. 이곳은 고무나무가 너무 많아서 그 증기가 하늘로 오르기 때문에 먼 곳의 산이 푸르게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허기는 원근법을 조금만 배운 사람이면 왜 먼 산이 푸르게 보이는지는 알만한데. 그런데 커다란 세 바위를 세 자매 바위(The Three Sisters)라고 이름 붙이고, 작은 그랜드캐년이라 고 경치도 좋고 볼만한 곳이었으나 우리 일행에게는 그들이 설명하는 것만큼 대단하지는 않았다. 우리 나라의 여느 산에 가도 그만한 경치는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궤도 열차를 탈 때에 조그마한 불상사가 있어서 더욱 기분을 망치었다.  이 궤도 열차가 그들이 선전하기를 세계에서 가장 경사가 큰 열차(World's steepest Scenic Railway)라고 하지만 그걸 탈 때에 앉자마자 내 옆자리에 있는 여교사가 뒤에서 오는 물벼락을 맞았었다. 급히 돌아보니 짓궂은 호주 청년 몇 명이 웃으면서 장난을 치면서 저네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단다.  손에 플라스틱 물병이 들려있는데도. 울화가 치밀었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별로 안 좋은 듯하였는데.
  이 열차는 벤치를 앞뒤로 연결하고 위에 지붕을 덮은 것과 같은 그러한 것이었다. 즉, 구부려서 들어가 앉을 수 있고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천장이 낮은 그러한 열차였다. 이걸 타고 내려가다가 올라가고 하여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내려보니 험한 산골짜기에 도착하였다. 협곡 속의 좁은 길을 걸어가니 아열대의 숲과 골짜기가 나타났다.

   점심은 가까이에 있는 한국 식당에서 바비큐로 식사를 하였다.  한 곳에서 계속 고기를 구워 주고 먹고 싶은 사람은 계속 가져다 먹을 수 있는 식사였다. 그런데 이 식당 한 쪽에 오팔을 비롯한 기념품들을 전시하며 팔고 있었는데 한 떼의 한국 관광객이 몰려들어오면서 한없이 사고 있었다. 정말이지 우리 교사들은 구경만 하면서 입을 딱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는 가까이에 있는 동물원(Australian Wild  Life Park)을 관광하였다. 입구에서 코알라를 안고 사진을 찍도록 하였는데 코알라에게서 조금의 냄새가 나는 듯하였으나 너무 얌전하게 가만히 있어서 안기는 쉬웠다. 코알라 아래에 코알라 인형을 받쳐서 안도록 했다.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계속 찍으려는 사람이 있어서 한 사람에게 한 번의 기회밖에 오지 않았다. 여기서는 무료였다. 동물원 안쪽에는 우리에 가두어두었지만 호주에서 나는 독특한 동물들은 거의 기르고 있어서 이제까지 사진으로만 보았던 모든 동물들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이제부터 우리 일행은 한국 관광 회사의 횡포(?)를 겪어야만 했다. 그들은 우리들을 데리고 무스탕 공장을 견학한다면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무스탕 상점에 들어가서 은근히 사기를 권유하였고, 다음으로는 면세점으로 데리고 가서는 또 사도록 하는 바람에 오후일정은 그렇게 마쳤다.

  무스탕은 질은 좋은 듯하였으나 너무 비싸서 엄두를 못 내었다. 90만원에서 140만원 짜리가 마음에 들었으나 이 정도 가격이면 국내에서도 아주 좋은 것을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거의 사지를 않았다. 그들의 말인즉 기왕에 살 테면 한국 상점에서 사는 것이 교포들을 돕는 일이라 지만 바가지가 이만 저만이 아닌 듯하였다.

  다음으로 간 면세점은 일본계 호주인이 경영하는 듯하였으나 점원은 거의가 한국인으로 한국말로 물건을 팔고 인사도 하고 하였다. 아주 고급품들이 많았는데 살 엄두는 못 내고 구경만 하였다. 세계 유수의 브랜드를 자랑하는 물품들이 큰 백화점 만한 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녁 식사는 중국 식당에서 뷔페로 먹었는데 볶은 밥이 있는 양식이라고 하면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호텔에서는 8시부터 9시까지 한 시간동안 호주 교육에 대한 토론을 가졌다. 연수를 마치면 교육부로 보고를 해야하기 때문에 이러한 토론회에서의 여러 이야기들이 그 보고서를 쓰는 사람에게 유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주로 교육 과정만 있고 교과서는 없이 행해지는 호주 교육의 특징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그리고 열린교육이 한국 교육을 망친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단 한 사람이 열린교육을 열렬히 지지하고 다른 모든 이들이 반대 의견을 내었었다. 생활기록부를 학생종합생활기록부라고 이름을 바꾸고 내용은 조금만 바꾸는 일, 그리고 이년도 안되어서 이걸 다시 학생기록부라고 바꾼다는 교육 행정의 졸속에 대한 성토가 나왔었다.

(물론 이러한 토론 내용 중에 나중에 보고서를 보니 호주 교육에 대한 것만 나왔지 교육 정책이 잘못 되었다는 내용은 전연 없었다. 나는  열린교육을 안델센의 벌거벗은 임금님과 같다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즉, 공식 석상에서는 열린교육이 한국 교육을 살리는 길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사람이 사석에서는 이게 한국 교육을 죽이는 것이라고 태연히 말하는 높은 분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이 열린교육에 대한 책자를 번역하고 지어내어서 지금 돈을 벌고 있지만 외국에서도 이의 나쁜 점에 대한 숱한 책들이 나올법한데 아무도 그걸 소개하는 사람은 없다. 단지 비공식적으로 쉬쉬하면서 영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실패한 교육이라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그들은 학급당 20명 안쪽으로 열린교육을 하기에 알맞은데, 우리는 40명도 넘어서 도저히 열린교육을 하기에는 불가능한데도. 그러나 나쁜 것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나중에 곪아터지고 난 다음에야 저 윗사람이 알게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에게는 자정 능력이라는 것이 없는 듯하다. )

  10시에 샤워하고 잠이 들었다.

제30일 : Auckland로

1996년 8월 26일 (월)
  
  3시경에 함께 자던 노 선생님이 TV를 켜는 바람에 깨어버렸다. 그 분은 나의 코고는 소리에 깨었다고 오히려 나를 나무라고.  6시경에 함께 산책에 나섰다. Hotel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이름이 Hilton Hotel이지 규모도 작고 변두리의 조그마한 그러한 hotel이었다.

   7시에 아침을 뷔페로 먹고 8시에 Hotel을 출발하여 공항으로 향하였다. Sydney 공항이 파업이라는 말이 있어서 걱정을 하였으나 10시 30분 출발 비행기가 11시에 출발하는 정도로 무사히 New Zealand로 갈 수 있었다.

   마침 공항에는 태권도 대회를 마치고 오는 호주의 어느 고교 태권도 팀을 만날 수 있었는데 외국에서 보는 외국 태권도 선수들이 신기했다.  출국 심사를 마치고 들어서자마자 세관원이 복도 가운데에 앉아서 면세품을 신고하라고 했다. 나는 카메라를 신고하였더니 봉인한 것을 뜯어서 서류는 자기가 가지고 가고 카메라를 넘겨주었다.

  기내에서 시계를 2시간 당겼다. 기내식으로 점심을 먹고 3시 30분에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하였다.

  오클랜드 공항의 통관 절차는 아주 철저하였다. 짐을 모조리 다 뒤집어 검사를 하였다. 그리고 또 마약 단속견이 와서는 냄새로 모두 검사를 하고 묶은 짐을 전부 풀라고 하여서는 일일이 검사를 다 하였다. 공항을 나와보니 시골 공항 같은 조그마한 청사에 사람이 붐비고 있었다.  옆에는 새로 확장 공사 중이어서  길도 더욱 좁고 불편했었다.

  마중 나온 여행사 안내자를 만나서 버스를 타고 오클랜드 시내를 관광하였다. 미션 베이라는 공원에 갔었는데 비가 조금 내리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새로 산 사진기로 촬영을 하였다.

  저녁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음식점에 가서 민물 장어구이와 소꼬리 곰탕으로 먹었다. 우리는 귀한 음식인지 몰라도 아마도 이곳에서는 흔하고 값싼 요리 재료인 듯 하였다.

  마침 가지고 간 팩으로 된 소주가 있어서 여행사 안내자에게 식당에서 마셔도 되겠느냐 고하니까 실례가 되니 사먹어라 고 하였다. 그러나 소주 값이 금값인걸 아는 나로서는 그럴 수 없어서 음식점 주인에게 이야기하니 아주 친절하게 소주잔을 몇 개 가져다주었다. 내 이웃에 앉은 동료들과 맛있게 한 잔씩 나누어 마신 그 소주 맛을 무어라 말할까. 입에 짝 붙는다 고나 할까? 그런데 그 여행사 안내인이란자가 아무래도 우리  편은 아닌 듯.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와서 조금 시간이 있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주위의 상점이나 식당들이 마치 장난감 같이 예쁘게 꾸며져 있어서 그냥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을 느끼게 하는 그러한 집들이 10여 채 있었다. 별로 크지도 않은 레스토랑이었지만 너무나 예쁘고, 또 그러한 집이 여러 집이 나란히 있는 것이 신기하였다.

  오클랜드에는 높은 탑을 건설 중이었는데 그 탑(Harrah's Sky City Casino Tower) 옆이 가장 번화가가 되어 있었다. 인구 130만쯤의 뉴질랜드 최대의 도시인 이 도시는 조금은 한적하고 소규모인 조그마한 도시였다. 우리는 이 탑 근처에는 커다란 hotel에 묵었는데 Harrah's Sky City Hotel 이었다.

  방 배정이 끝나자 노 선생님과 함께 시내 산책에 나섰다. 전에 하던 대로 방향을 정하여서 조금씩 나아가는 그러한 방법으로 시내를 나아갔다. 그런데 하필 이러한 내게 어떤 백인이 다가와서 길을 물었다. 나도 방금 도착하여 잘 모른다고 하였다. 세상에 이 남반구의 오클랜드에서 내게 길을 묻다니.

   둘이서 Bar를 찾아 들어가서 생맥주 2컵을 7달러 90센트에 사 마셨다. (뉴질랜드 달러는 호주 달러보다 약세고, 호주달러는 미국 달러보다 약세이니 우리 돈으로 약 3,4백원 정도)에 사서 마셨다. 우리 둘 이외에도 젊은이 몇 명이 있었다. 바닥은 목재 마루로 되어 있고 테이블도 우람한 나무 탁자였다. 조금은 어두운 술집이라 간단히 기분 내는 흉내만 내고 나왔다.

   부산의 노 선생님은 영화광인 모양이라 기어이 영화를 하나 보고 가자고 하였다. 지금은 우리 나라도 그러한 영화관이 보편화되었지만 커다란 건물에 영화관이 여럿 있는 그러한 건물에 들어갔다. 9시부터 11시까지 Stealing Beauty라는 영화를 보았다. 14달러가 아까웠다. 우리 둘 이외에는 백인 남녀가 10여명 너른 관객석에 있었는데 그들은 재미있는 장면에서 웃고 하는데 우리 둘은 그냥 묵묵히 점잖게(?) 보다가 나왔다.  아무런 줄거리도 기억에 없다. 여행을 하면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쩌면 아까운 시간의 낭비인 듯하였다. 고향 마을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데. 아니면 비디오로도..
  
    
제목: 호주로 어학 연수를 떠나다 (4)


사진가: kec

등록일: 2010-03-09 06:59
조회수: 471 / 추천수: 147
△ 이전글

호주로 어학 연수를 떠나다 (5)
▽ 다음글

호주로 어학 연수를 떠나다 (3)
오랄   2018-11-20 05:48:54 [삭제]
야동 재가자주 이용하는 야동사이트 입니다

https://yasilhouse.com

볼개 너무많튼대요

즐거운시간보내새
  ~의견을 남겨주세요.
남겨주신 의견은 kec님에게 큰 보탬이 됩니다.
-
+
 
이름(별명)    비밀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