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의창의 그림이야기

제31일 : Waitomo 동굴과 Bungy Jump

1996년 8월 27일 (화)
  
  너무 많이 걸은 탓인지 밤중에 자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고생을 좀 하였다.  좀 아팠으나 여행에 지장은 없을 듯하였다.  5시경에 노 선생님이 깨워서 깼다. 같이 세상살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6시에 샤워하고 산책을 나갔다. 노 선생님이 나서지 않아서 혼자 부둣가로 나갔다. 거기서 일행 중에 길 선생님을 만났다. 그 분은 아침마다 조깅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산책을 하였었는데 계속 조깅을 한 분도 있었다니 놀라왔다. 함께 부둣가를 좀 걷고 사진도 찍었다.

  부두에는 저 멀리 저유 탱크들이 보였고, 제법 큰 화물선도 정박해 있었으나 이른 아침이라 한산했다. 우리 나라 같으면 해산물을 많이 먹기 때문에 새벽의 부두는 바쁘고 비린내가 나는 생선들을 사고 파는 상인들이 많이 북적거릴 텐데... 그러한 기대를 하고 나선 나의 생각과는 달리 싱그러운 부두의 아침이었다.

   그리고 참으로 반가운 것은 우리 나라의 도시들과 같이 구석에 쓰레기가 제법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국내에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오히려 호주가 잘 살고(그 때 1인당 국민 소득이 호주가 약 3만 달러, 뉴질랜드가 약 만 오 천 달러 정도라고 들었다.) 뉴질랜드는 인구가 350만으로 너무 적어서 산업이 발달하지 못하여서 좀 못사는 것으로 들었다. 더구나 빈부의 격차가 매우 심한 듯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출근길의 시민들이 많아지기 시작하는 시가지를 이리저리 걸으면서 호텔을 찾았다. 길은 몰라도 짓고 있는 Sky City Tower가 멀리 보이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8시에 아침 식사, 9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와이토모(Waitomo)로 향하였다. 멀리 별로 높지 않은 야산들이 바라보이는 넓은 벌판을 다른 차들이 없는 한적한 도로를 한없이 달려갔다. 저쪽에 협궤 철로가 보이자 안내자가 설명을 하였다. 인구는 적고 산업이 발달하지 않아서 교통량이 적어 협궤 철로를 그냥 두었단다. 하루에 한 두 번 열차가 다니기 때문에 열차를 구경하기가 어렵다드니 바로 열차 한 대가 지나갔다. 안내자는 우리들이 운이 좋아서 열차를 구경하게 되었단다.

  멀리, 가까이 완만한 경사의 산들에는 목초가 잘 자라고 있었는데 양들이 멀리서 보기에 마치 구더기가 붙어 있는 듯이 산등성이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완전히 목초만 있는 것이 아니라 큰 키의 나무들도 제법 있었는데 이는 일부러 양들이 비가 오면 피할 수 있도록 가꾸고 있다고 하였다.

  유럽에서 이주해온 백인들은 아무런 기계도 없이 200년이란 세월동안 이렇게 목초 지를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니 대단한 장기간의 역사였다. 둘러보니 거의 모든 국토가 목초 지인 것 같았다. 물론 잘 조림된 수풀을 지나는 경우도 있기는 하였다.

  하여튼 인구가 희박하여 아무리 달려가도 다른 차들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가다가 어떤 한국인이 경영하는 휴게소를 들렸다가 다시 계속 달려 11시 30분 경에 점심 식사를 할 뉴질랜드 인이 경영하는 바비큐 식당에 들렸다. 아직 시간이 있어서 식당 안을 둘러보니 아예 한국인 관광객의 환심을 살려고 태극기를 걸어두었다.

  너른 벌판에 뻗어 있는 도로, 그 양편으로 야산 언덕 위에 그림처럼 지어진 집, 그리고 한가로이 노니는 양떼들. 아,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그깟 사슴고기(우리들에게는 귀한 고기였으나 여기서는 흔한 듯) 뷔페가 뭐 그리 중하냐. 이 기다리는 30분쯤의 시간을 할애하자. 가보고 싶다는 욕망이 불끈 솟았다.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이가 다행히 두 사람 더 있었다. 단장인 김 교감 선생님과, 최 선생님이 함께 가기로 하였다. 우리들은 일행에게 빨리 갔다오겠다고 말하고는 무작정 저 멀리 보이는 목장 집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한 700여 미터는 되었을 것이다.

  목장과 도로 사이의 경계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고, 이 철조망에는 고압선이 흐른다는 경계 문구가 씌어진 팻말이 군데군데 있었다. 우리들은 가까이에서 목장을 볼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자꾸만 걸어가고 있었다. 날은 맑고, 길은 멀고, 양떼는 한가로이 풀을 뜯는 그러한 곳이었다.

  한번 조성된 초지는 그대로 영구히 가는 모양, 양떼의 분뇨가 떨어진 곳은 시퍼렇게 풀이 더 잘 자라고 있었고, 군데군데 분뇨 떨어진 것도 보였다. 드디어 우리가 목표로 하였던 목장 집으로 올라가는 샛길이 나타났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포장이 안된 이 길 입구에서 목장 집까지 약 100미터 정도의 오르막길에 기다란 철사가 이어져 있고, 이 철사에 검은 염소 한 마리가 묶이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염소는 올라가며, 내려가며 풀을 뜯지만 달아나지는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다른 양들은 모두 방목을 하면서 이 염소만 이렇게 묶어둔 것이 이상했다.

  이곳에서는 모든 양들을 그냥 목장에 놓아두고 그대로 사육을 하기 때문에 가격 경쟁력이 있다고 들었었다. 저들끼리 일년 사계절을 그냥 밖에서 자란다고 하였다. 비가 오면 나무 밑으로 들어가서 비를 피하고, 새끼도 저희들끼리 낳아서 기르고 하므로 전연 사육에 드는 비용이 안 든다고 하였다. 그래서 양 한 마리에 1달러(우리 돈으로 4,5백원)밖에 안 한다고 들었었다. 그런데 검은 염소를 묶어서 기르다니.

  드디어 목장 집 입구에 다다랐다. 물론 대문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뉴질랜드의 양치는 개 이야기는 TV등에서 소개가 많이 되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우리들은 예기치 않았던 개소리에 모두들 놀랐다.

  ‘Anyone there?" 등을 외치며 우리는 마구 사람을 불렀다. 그러니 쏜살같이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다행히 우리 모두 가만히 서 있으니 개는 우리 주위를 맴돌다가 그대로 짖기만 하였다. 드디어 어떤 백인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우리들은 한국의 교사들이다. 연수차 나왔는데 뉴질랜드의 목장을 꼭 방문하고 싶어서 이렇게 들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인은 우리를 집안으로 들였다. 유치원에 다닐법한 아이 둘이 있었다. 빨래를 마당에 늘어놓고 집안은 낡은 전축하나가 있는 아주 검소한(가난한) 농가였다.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 살림을 나와 이 목장을 경영한지가 얼마 되지 않은 처지라 모든 것이 부족하고 힘들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멀리서 보든 그 그림 같던 집이 안에서 보니 별로 그림 같지는 않고 초라함에 우리일행 셋은 실망하였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을 묻기도 하였다. 아이들은 school bus가 와서 항상 데려가기 때문에 교육에는 어려움이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직은 목장에서의 수입이 적어서 남편은 밖에 돈벌러 나가는 모양이었다.

  우리들이 돌아왔을 때에는 식당에서는 사슴고기 바비큐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지만 우리들도 서둘러서 사슴고기를 먹었다. 나에게 그 맛은 쇠고기나 양고기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식당 주인이 차에까지 올라와서 박하사탕을 나누어주며 한국말로 인사 한마디를 연신하면서 친절을 베풀었다. 한국 관광객이 많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시에 식당을 출발하여 와이토모 석회 동굴(Glow-worm Cave)을 관람하였다. 여기는 우리 나라의 반딧불과 비슷한 glow-worm이라는 벌레가 동굴 천장에 붙어서 빛을 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하였다. 내 생각에 반딧불이의 애벌레와 비슷하리라 여겼다. 입구에 들어서니 우리 나라의 나룻배와 같은 배를 타도록 하였다. 주의 사항으로 절대 소리를 내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는 것이었다. 동굴 속은 캄캄하게 어두웠으나 아마도 뉴질랜드 원주민인 듯한 이 사내는 잘도 삿대질을 하여 배를 저어 나아갔다.  

   한참을 나아가니 캄캄한 동굴 천장에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glow-worm의 불빛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그 수가 점점 많아져서 마치 농촌에서 자다가 새벽 서너 시에 밖에 나가 밤하늘을 쳐다볼 때의 그 숱한 별들처럼, 아니면 은하수의 수많은 별들처럼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우리들은 가만히 입 속으로만 탄성을 지르면서 서서히 조용히 저어 가는 그 배를 타고 가만히 나아갔다. 드디어 입구. 뱃사공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말을 하고 내려서 아열대의 숲길을 걸어 반대쪽으로 하여 입구 주차장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 숲길을 걸으면서 고사리 나무를 보았었는데 이것이 커다란 나무가 되어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사리가 풀로 자라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겨울에 말라죽지 않고 계속 잎이 나서 그런지 굵은 줄기를 자랑하며 교목으로 자라고 있어서 아주 신기하였다.

  다음으로는 타우포(Taupo) 호수 근처의 지열 발전소였다. 저 아래에 지열을 이용하여 하얀 김이 솟아오르는 곳에 발전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 공정은 우리로서는 잘 알 수 없었으나 안내자는 열심히 설명을 하였다. 하여튼 커다란 쇠파이프로 이리 저리 엉키고 설켜 있는 발전소 건물을 내려다보면서 우리들은 사진도 찍었다. 조금 더 가니 폭포에서 거센 물결이 쏟아지고 있었다. 거기에서 우리 반쪽 일행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렸다. 서로 반갑다면서 그간의 지낸 이야기를 하였는데 구경을 한 것이 거의 같아서 역시 뉴질랜드의 관광이란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다음으로는 타이포 번지점프(Taupo Bungy Jump)장. 내가 호주에서 다음 여행으로 뉴질랜드로 간다고 했을 때에 Gerry와 Christine가 극구 이 번지점프를 하지 말라고 말리었고, 떠나던 아침에 한 번 더 말렸었던 그  번지점프다.

   절벽 아래에는 호수 물이 고여 있고, 5,60미터는 됨직한 높은 곳에 마루로 점프장을 만들어 두었었다. 입구까지는 구경을 할 수 있었으나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해 두었었다. 관람을 원하는 사람은 옆쪽에 가서 구경을 할 수가 있었다. 가격은 약 10만원 정도를 주면 비디오 테이프까지 주었다. 여러 가지 기념품을 팔기도 하고 뛰어 내린 유명 인사들의 사진 등도 게시되어 있었고, 한글로 된 안내문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 20명 일행 중에 혼자 강원도에서 온 황 선생님이 용감하게 뛰어 내리기로 하여서 우리들은 옆에 가서 그분이 뛰어 내리는 것을 구경하기로 하였다. 그 분 앞에 몇 사람이 뛰어 내렸는데, 아직 이 점프장이 개설된 이래로 한 차례의 사고도 없었다 고하였다. 겁 많은 여자가 못 뛰어내리자 직원이 안고 함께 뛰어 내리기도 하였다.  아래에는 조그마한 배가 대기하고 있다가 태워서 돌아오곤 하였었다.

  황 선생님 차례가 되어 용감하게 뛰어 내릴 때에 나도 가서 뛰어 내리고 싶은 욕망을 참는데 아주 힘이 들었다. Gerry와 Christine가 나이 먹은 사람은 위험하다고 그렇게도 말리던 말들이 생각나서 꾹 참았었다. 나중에 귀국한 후에 황 선생님이 친절하게도 테이프를 복사하여 보내어 주었는데, 자기 회사의 선전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황 선생님이 뛰어내린 부분은 약 5분 정도 녹화가 되어 있었다.

  저녁은 중국음식으로 먹고 타우포 호숫가에 있는 Motel에 여장을 풀었다. 이곳 주인에게 그림 엽서를 부쳤는데 나중에 잘 도착했었다. 모여서 술도 한 잔 하였는데 수영을 하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각자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하였다. 단층 짜리 객실이 두 줄로 있었는데 그 사이에 수영장이 있었다. 물을 데워서 넣었기 때문에 따뜻하고 겨울에도 야외에서 수영을 할 수가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 실제 수영을 한 것은 남자 너 댓 명이었는데, 여 선생님 한 분이 우리가 수영하는 것을 보고는 돌아가더니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함께 수영을 하였었다. 이제 우리들이 나오려니 한 분이 기어이 붙잡았다. 알고 보니 수영은 하고 싶고 수영복은 없어서 그냥 맨몸으로 들어왔는데 여 선생님이 수영장에 들어온다고는 상상도 못한 듯. 자, 나갈 수도 없고 하여 어두운 밤이라 그냥 수영장 물에 몸을 담그고 놀고 있었는데 나갈 수가 없었던 것. 나중에 그 여 선생님이 들어가고 나서 이분도 우리와 함께 나왔다.  객실 바로 옆이 수영장이라 가능했었던 이야기이다.
  
  샤워 후에 호숫가를 산책하였다. 이 호수라는 것이 넓어서(서울시와 넓이가 비슷하다고 하였다.) 바다 같이 파도가 치고 있었는데 물론 짠물은 아니었다. 바닷가 해수욕장 모래밭을 거니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32일 : Maori 마을 방문

1996년 8월 28일 (수)
  
  6시에 일어나서 샤워하고 산책에 나섰다.  비가 약간 내리는 듯하였으나 타우포(Taupo) 호숫가를 거닐고 싶어서 나섰다. 그런데 어느 듯 비는 멈추고 호수 저 멀리 무지개가 뜨기 시작하였다. 호수의 오른쪽 끝에도 무지개가 서고, 왼쪽 끝에도 무지개가 서드니 어느 듯 두 무지개가 하나가 되어 호수 위로 반원을 그리고 있다. 그 무지개가 호숫가의 커다란 야자나무와 어울러 장관을 이루었다. 이 야자나무라는 것이 큰 소철과 같아서 두 아름도 넘는 굵은 나무로 커다란 잎과 어울려서 아주 멋진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에도 제법 무지개가 아름답게 나왔다.)

  8시에 옆 호텔의 식당에서 양식으로 식사를 하고 9시에 출발하여 제2의 호수가 있는 로토루아(Rotorua)라는 도시로 출발하였다. 도중에 임업 시험장을 방문하였는데 커다란 열대림이 빽빽이 들이찬 숲 속을 걸었다.(그들은 bush walking이라고 하였다.)

  다음에 방문한 목장에서는 말을 타기로 하였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일행 중에 14명이 말을 타기로 하고 우의를 입고 장화를 신고 대기하였다. 나는 제주도에서 조랑말을 타본 경험이 있는데 제주도에서는 말 타는 한 사람에게 말을 모는 사람이 한 사람씩 붙어서 안전에 유의하면서 천천히 걸어가며, 말을 모는 사람이 고삐를 잡고 고작 10여분을 돌아오는 것이었으나 이곳에서는 전연 달랐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박차로 말 배를 눌러라 는 것과, 오른쪽으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고삐를 당기고, 왼쪽으로 가려면 왼쪽으로 고삐를 당겨라. 서려면 양쪽 고삐를 당겨라 는 설명이 고작이었고 이어서 말에 모두들 올랐다. 나는 덩치가 좀 크니까 조금 큰말이 배정이 되었지만 이 말도 내 80 kg을 태우고는 코를 버러렁 거리면서 기분 나빠하는 눈치였다.

   하여튼 우리 일행 14명을 한 줄로 세우고는 앞뒤에 여자 기수 한 명씩이 우리를 안내하여 목장을 한 바퀴 도는데 1시간이 걸렸다.  도중에는 아주 경사진 곳과, 비가 와서 미끄러운 언덕길도 있었고, 너른 벌판도 있었지만 모두들 두 사람만 낙마를 하고 무사히 돌아왔다. 낙마를 하여도 재빨리 인도자가 달려와서는 다시 태우고 유유히 다시 나아가는 그러한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이들은 안전에 대해서 그렇게 걱정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 말이라는 것이 우리를 아주 초보자로 아는지 설명한대로 고삐를 당겨도 제 마음대로 갈 길을 유유히 가고, 한 30분 정도 타고나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어서 배를 차면서 빨리 가기를 종용해도 그렇게 내닫지를 않았다. 더구나 내가 탄 말은 내 무게를 못마땅해하는지 연신 코를 부르릉거리면서 더운 김을 내 몰았다.

   그렇게 제법 즐거운 말타기가 끝나고 말에서 내리자 허벅지가 굉장히 아프고 근육이 당기는 듯하였다. 즉, 말을 탈 때에는 양다리를 오무려 말의 배를 힘껏 눌러야하는 것 같았다. 문득 삼국지에서 유비가 허벅지에 살이 오른 것을 보고 무위도식하고 있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구절이 생각났다.

   한국 식당에서 해물 탕으로 점심 식사를 마친 뒤에 와카레와레와(Whakarewarewa) 라는 마오리 족의 마을을 방문하였다. 호주와 달리 뉴질랜드에서는 원주민인 마오리족과 이주한 백인들이 사이좋게 살고 있는 듯하였다. 또 원주민을 위한 여러 가지 혜택을 부여하여서 원주민도 제법 잘 살고 있는 듯하였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버스의 기사도 마오리 족이었는데 우리들에게 참으로 친절하게 잘 하여주어서 특히 여교사들의 인기를 차지하고 있었다.

   원주민은 대개 자기들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유황온천 등)을 관광지로 개발하여서 소득을 올리고 있는 듯하였다. 그래서 백인을 키위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키위라는 새, 특산과일인 키위와 함께 그렇게 부른다고 하였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마오리 족 추장이 환영하러 나와서 마오리 족 특유의 이마를 대는 인사를 하였다. 우리 일행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였다. 예전에 하와이 민속촌을 방문했을 때에 식인종 추장이 창을 들고 앉아 있어서 모두들 무서워했는데, 알고 보니 하와이 대학의 아르바이트 학생이었던 것처럼 이 사람도 진짜 추장인지는 모른다고 속으로 혼자 생각했었다.

   마오리 족들의 특산 공예품을 만드는 곳(The New Zealand Maori Arts and Crafts Institute.)을 방문하였는데 입구에는 뉴질랜드의 역사와 백인들과의 여러 조약들을 전시한 곳이 있어서 그걸 보면 간단히 뉴질랜드의 유래를 알 수 있게 해두었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왕골 같은 것으로 짜서 옷을 만드는 것을 시범을 보이는 곳도 있었고, 나무를 다듬어서 여러 가지 공예품을 만드는 곳도 있었다.

   키위를 기르는 곳이 있어서 구경을 하였는데, 이 새는 빛을 싫어한다고 하여서 캄캄한 곳을 마련하여 커다란 우리가 있었다. 그 곳에 들어가서 자세히 보면 보인다고 하였으나 내 눈에는 전연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아무 것도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정말 있었는지.  밖에는 우리가 흔히 보는 키위를 소개할 때에 등장하는 그 X-ray 사진이 붙여져 있었다. 그 사진으로 보아도 몸 안에 커다란 알이 자기 몸의 반쯤 되게 들어 있는데, 실제로 키위는 자기 몸의 1/3만한 알을 낳기 때문에 알을 낳을 때에 많이 죽는다 고하였다.  그래서 번식이 잘 안 된다고 하였다. 옛날 키위라는 구두약에 키위의 그림이 있었는데 나는 주둥이가 길다란 그 새를 볼 기회를 이렇게 해서 놓지고 말았다.

  다음으로는 마오리들의 마을을 방문하였다. 음식물 갈무리하는 곳, 손님을 접대하는 곳 등이 특색이 있었다. 우리 식으로 하면 민속촌과 같은 곳으로 그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게 보존해둔 곳이었다. 그 뒤쪽은 유황 온천지대였다. 간헐천이 있어서 뜨거운 온천물을 뿜어 올리는 곳도 있었고, 뜨거운 진흙이 끓고 있는 곳도 있었다. 또, 교실 두세 배나 될 듯한 너른 바위가 있어서 거기에 우리 일행이 모두 드러누워서 찜질을 해보기도 하였는데 제법 뜨뜻하였다. 달걀, 옥수수 따위를 익혀서 팔기도 하였다.

   안내자가 역시 한국 상점으로 데리고 가서 기념품을 사도록 유인하였는데 유황 온천의 진흙으로 만들었다는 머드팩, 양모로 만든 내의 등이 인기를 끌었다. 나도 어머니 드릴 양모 내의 한 벌을 116뉴질랜드 달러로 샀다.

   뉴질랜드 제 이의 호수라는 로토루아 호숫가에 도착하였다. 여기는 물새들의 천국으로 많은 새들이 호수에 노닐고 있었고, 풀밭에도 놀고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옆에 함께 있어도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커다란 검은 고니, 백조 그 외에 많은 종류의 새들이 인간과 함께 공원에서 노니는 모습은 정말 낙원 같았다.

   다음으로 옛날 온천 탕이 있었던 곳을 박물관 겸 미술관으로 꾸며 놓았다는 곳으로 갔다. 바깥에서만 구경을 하였는데 그 건물의 아름다움에 모두들 반하여 사진을 찍었다. 근처에는 커다란 쓰레기 통 같이 둥글게 콘크리트로 만든 것이 있었는데 그 안에서 김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온천지대로 곳곳에서 김이 나오고 있었다. 마치 뉴요크에 가면 도로에 김을 내어 뿜는 굴뚝이 간혹 간혹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나 할까. 뉴요크는 지하에 설치한 난방용 증기가 새어서 나오는 것이지만 이곳은 온천수가 끓어서 나오는 증기이므로 유황 냄새가 많이 났다.

   신기한 것은 여기 정원에 잔디를 가꾸는 사람이 있었는데 커다란 트랙터 같은 것을 타고 하는 일이 잔디밭에 아주 작은 많은 구멍을 뚫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무엇을 하는지 몰라서 물어보니 이곳은 습기가 많아서 그냥 잔디를 심어두면 잘 자라지 않아서 이렇게 땅에 구멍을 뚫어서 공기를 통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우리 일행은 온천장(Polynesian Spa)에 가서 1시간 동안 온천 욕을 하였다.  커다란 공중 탕이 있었는데 미네랄 욕탕이라고 하였다. 수영장 만하였다. 남녀가 수영복을 입고 함께 들어가서 헤엄도 치고 놀았다. 그 앞으로 작은 칸이 있는 노천 온천 탕이 여럿이 있었는데 라듐 탕, 유황 탕 등으로 물이 비눗물처럼 희뿌옇게 되어 있었고 냄새가 났다. 모두들 여러 탕에 들어가면서 돌아다니고 하였다.

   온천 욕을 마치고 호텔에 check in을 한 다음 식사 겸 마오리 민속 예술 관람을 하러 갔다. 그들은 식사를 ‘항이(hangi)’ 라고 하였는데 한 곳에는 긴 뷔페 코스가 있었고, 손님이 식사를 가지고 다른 쪽에 가면 식탁이 있어서 식사를 하면서 민속 예술을 관람할 수 있게 해 두었었다. 무대가 있고, 무대 앞에는 작은 수영장 같은 풀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무대에서 여러 가지 마오리 춤 등을 보여주다가 나중에는 이 풀의 가장자리를 돌면서 여러 가지 춤을 보여주고 관객들도 함께 춤을 출 수 있게 하였다. 혀를 길게 내어 뽑는 춤도 추고, 추를 돌리는 춤, 막대로 하는 춤도 추고, 전사들의 창을 휘두르는 춤도 추었으며 이상한 몸짓과 소리를 질러서 관객의 흥을 돋우었다. 그들은 남녀가, 특히 여자가 몸이 비대하였었다. 우리 일행도 어울려서 함께 춤을 추며, 사진도 찍었다.

  9시에 호텔에 돌아오니 모두들 마지막 여행의 밤을 한 잔 하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노래방으로 가기로 하여 한국인이 경영하는 단란주점을 소개받아 갔다. 12시까지 17명이 즐겁게 술 마시며 노래하며 놀았다. 1인당 35뉴질랜드 달러를 내었지만 술은 거의 몇 사람이 기분으로 내는 바람에 계속 마시게 되었다.

  호텔에 돌아와 로비에서 일행 중 4사람이 환담을 하고 있는데 호주와 뉴질랜드 청년 두 사람이 함께 끼이게 되었다. 이들은 1년에 한 차례씩 서로 방문을 하면서 친하게 지낸다고 하였다.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우리를 보고 미국에서 왔느냐고 하였다. 우리가 호주에서 왔다니까 발음이 미국식이라고 하였다. 그랬었나보다.

   나중에 황 선생님이 진저비어(ginger beer : 이곳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는 것으로 도수는 거의 없고 생강을 넣어 향기가 독특하여 특히 여자들이 좋아하는 맥주)를 두 병 사 가지고 와서 마지막 밤을 이를 마시며 2시까지 마지막 이별의 밤을 환담을 나누며 보내었다.

제33일 : 연수의 마지막날 Fiji로

1996년 8월 29일 (목)
  
  겨우 잠이 들었는데 노 선생님이 TV를 켜는 통에 3시경에 잠에서 깼다. 그는 나의 코고는 소리에 깨었다고 하였다. 내가 잠을 못 자니 그는 밖으로 나가고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그의 이야기로는 그 시각에도 아직 로비에 몇 교사가 있어서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고 하였다. 긴 여정의 마지막 밤을 모두 잠 못 이루어하는 것 같았다.

  5시 30분에 기상하여 이번에는 노 선생님과 함께 호텔 앞 거리를 산책하였다. 이제 이 산책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니 어쩐지 이 아름다운 경치를 눈에 넣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아내와 자식들이 그리워오는 마음이 뭉클 일어났다. 아내의 손을 한 번 잡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왜 집에 있을 때에, 아니 거리를 거닐 때에 나는 아내의 손을 요즈음 잡지 않고 다녔을까하고 후회가 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나도 피식 웃어버렸다.  요즈음 만들었는지 좀 조잡하지만 원주민 모양을 한 조형물이라든지, 혹은 커다란 야자나무가 있는 한적한 도로를 걷는 다는 것은 참으로 정답고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리운 한 때였었다.

   7시 20분에 아침 식사.  엊저녁에 술을 좀 과하게 마셔서 입맛이 좀 적었다. 8시 5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오클랜드로 향하였다. 도중에 안내자가 양가죽으로 옷을 만드는 교포의 상점에 데려갔다. slink skin(그들 말로 어린 양가죽으로 만든 무스탕)으로 만든 무스탕 점퍼를 아내를 위하여 62만원을 주고 샀다. 또 양모 이불을 만드는 교포의 공장을 방문하였는데 여기에서 양모 이불을 220 뉴질랜드 달러를 주고 샀다. 이걸 공기를 빼고 아주 조그마하게 만들어 포장해주었다.

   시내에 들어와서 식사를 하고 Eden동산이라는 곳으로 올라갔다.  분화구가 있고 오클랜드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그러한 곳이었다.

   다시 녹용을 파는 한국인 상점으로 안내하였다. 이곳에 많은 녹용들이 있었는데 한 분이 서울에 있는 아는 한약방으로 전화를 하였더니 이 가격이 별로 비싸지도 않고 싸지도 않다고 하여서 모두들 망설이고 있었다. 날은 흐리고 간혹 비를 뿌리기도 하는 그러한 날씨였는데 Harber Bridge를 관람하고 수많은 요트들을 보면서 공항으로 갔다. 7시 10분에 정시보다 20분쯤 늦게 비행기가 출발하여 한달 남짓의 긴 연수가 끝을 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10시 10분 경에 비행기는 피지의 나디(Nadi) 공항에 내렸다. 중간 기착지인 모양이었다. 직행이 아니라서 시간이 더 걸리는 점은 있고 여행사에서 이익을 조금이라도 더 내려고 헐한 경유 비행기를 타도록 한 점이 있으나 오히려 피지도 구경을 할 수 있다고 모두들 좋아하였다.  그러나 공항 안에서만 행동이 묶이는 터라 별 구경도 하지를 못하였다.

  ‘Fiji Welcomes You'라고 써둔 것과 같이 그들도 우리처럼 경유하는 승객들을 위하여 커다란 매점을 운영하여 잇속을 차리고 있었다. 예의 호기심이 발동하여서 위, 아래층을 온통 휘젓고 다니면서 구경을 하였다. 대합실에는 커다란 피지 전래의 돛단배를 전시해두었고, 그 외에 피지의 공예품들이 조금 전시되어 있었다. 정장을 한 예쁜 검둥이 아가씨가 지나가기에 부탁을 하여 함께 사진도 찍고 상점을 구경하면서 돌아다녔는데 가격이 예상외로 비쌌다. 한 상점에서 우리끼리 하는 말을 듣고 점원 검둥이가 ’안비싸, 안비싸‘하고 한국말로 권하였다. 아니 우리 나라 관광객이 이렇게 많이 들 오는가. 조그마한 이곳에는 미국, 호주, 뉴질랜드 달러가 다 통용이 되었다. 탈 1개를 10뉴질랜드 달러를 주고 샀다.

   11시 50분에 다시 비행기가 출발하였으니 약 1시간 40분 동안 기착하였던가 보다. 이제는 잠을 자려고 기내에서 제공하는 담요로 배를 덮고 의자에 기대어 잠을 청하였다. 그런데 모두들 중얼거리고, 비행기 엔진 소리는 요란하고,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마음에 들떠서 잠은 오지를 않고, 어쩌나 하고 그대로 눈을 떠서 밖을 보면 깜깜한 밤하늘이고, 그러한 시간이 1시간쯤 지나갔다.

  아니, 내가 왜 이럴까. 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다니.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 달 여 동안 지낸 호주와 뉴질랜드에서의 생활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교육부에 보고를 하는 데에는 연수 소감도 들어가지 않나.  나이 먹은 사람을 대접을 한다고 젊은이들이 모두 맡아서 보고서를 작성하기로 하였는데, 그 때에 소감을 쓸 사람을 두 사람 정하였는데 다른 사람도 쓰고 싶으면 쓰라고 했겠다.

   나는 일기를 쓰던 노트를 끄집어내었다. “기대와 부푼 꿈을 안고 김포공항을 출발한 지 어언 한 달이 지나 이렇게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 앉아 있다....”이렇게 하여 한 시간 여 동안 쓴 글을 찢어서 보고서를 담당하는 분에게 주면서 ‘읽어보고 쓸만하면 보태어 넣고, 가치 없으면 휴지통에 버리세요.’ 하고는 주었더니 나중에 보고서가 왔는데 내 것도 들어 있기는 하였다.

  
제34일 : 연수의 끝

1996년 8월 30일 (금)
  
  드디어 8월 30일 아침 비행기는 김포 비행장으로 내려 앉았다.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짐을 찾아 모이자 마자 서로들 서둘러 인사를 하고는 짐을 부치고 국내선 순회 버스를 바쁘게 올라탔다. 한 달 동안 함께 했던 분들끼리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국내선 비행기에 타고서는 승무원에게 제일 먼저 부탁한 것이 신문이었다. 내가 뭐 그렇게까지 국내 사정이 알고 싶었는지.

  대구 공항에서 짐을 찾고 있는데 저 쪽에 아내가 보였다. 이 때 만큼 아내가 반가왔을 때가 있었을까. 짐을 차에 싣고 아내에게 차를 몰게 하였다. 내가 몰기에는 어딘지 서툴 것 같아서였다. 역시 차에 앉고보니 지나가는 차들이 오른쪽으로 달리는 것이 어색하고 위험하게만 느껴졌다.

   학교에서는 전 직원이 모인 곳에서 다녀온 소감을 발표하라고 하였다. 나는 교육부에서 온 보고서가 도착하는대로 전에 쓴 것을 요약하여 직원 연수회 때에 발표를 하였다.

  다시 시 교육청에서 다녀온 모든 어학 연수자들을 모은 dsu수회가 있었다. 나는 또 그 때의 소감을 다듬어서 제출하고 발표를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7년부터 초등학교 3학년생들이 영어를 배우게 되었을 때에 나는 영어 교과 전담을 맡게 되어서 오늘까지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비록 실력은 내가 생각해도 별로이지만 해외 연수까지 갔다 온 경력을 인정 받는 듯하다.


  아래에 그 때의 소감 발표문을 옮겨 적어본다.

   내 나이 50이 넘어 해외 어학 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교육부 예산으로 가게 되니 소위 말하는 국비 유학생이 된 셈이다.  기대와 부푼 꿈을 안고 호주 행 비행기에 오른 나는 단 한 가지를 굳게 마음먹었었다.  적극적으로 연수에 참여하여 여러 가지 많은 경험들을 쌓고 오자고.  이제 돌아보아 아무런 후회도 아쉬움도 없다.
  
   많은 현지인과 대화를 가졌었다.  하숙집 주인의 눈치를 보아가며 늦게까지 그들 가족들 틈에 끼어 한 마디라도 더 영어로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했었다.  강의 시간에는 될 수 있으면 많은 질문을 하였고, 기회가 닿는 대로 실제 수업 경험을 쌓고자 하였었다.

   주말에는 버스 여행, 열차 여행을 하여 보았고, 머물고 있던 Brisbane에서 북쪽으로 Bundaberg, 서쪽으로 Toowoomba, 남쪽으로 Byron bay까지 가 보았다.  잠도 Homestay, Hostel, Inn, Hotel에서 고루 자 보았다.  거리에서 상점에서 여러 외국인들과 사귀었고, 여러 가지 음식도 먹어 보았다.  두 번이나 길을 잃어서 헤매며 물어서 찾아오기도 하였었다.

   그들이 권하는 이름난 관광지가 아닌 엉뚱한 소도시를 열차와 버스를 이용하여 작은 그룹을 만들어 방문하였었다.  넓은 국토에 시원스레 뻗은 도로들, 대자연에 펼쳐지는 목장과 소 떼, 양떼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지는 사탕수수 밭을 보면서 자연의 혜택을 한껏 누리는 그들이 부러우면서도 좁은 국토에 이만한 경제력을 갖게 된 조국이 자랑스러웠다.

   (하숙집)
   갓 대학을 졸업하여 취직한 딸과 대학 1 년 생인 아들을 둔 네 식구의 가정으로 딸은 직장을 따라 떨어져 살고 있었다.  부부가 교대를 졸업하여 교직에 있으면서 남편은 의대를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고 아내는 시간 강사로 세 학교에 나가고 있었다.  남편이 전문의 시험을 치기 위하여 노력하는 동안 아내가 집안 살림을 맡아 하는 아주 부지런하고 검소한 가정이었다.

   그들은 나 외에도 벌써 수 십 명의 외국인을 하숙시킨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어서 능숙하게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처럼 손님을 위하여 자기 생활을 희생하면서까지 배려하는 일은 결코 없고 그렇다고 무례하게 대하는 것도 아닌 알맞은 정도의 배려만을 하였었다.

   언어 장벽은 거의 느끼지 못하였다.  나는 더듬거리면서도 나의 의사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었고, 그들은 모두 나에게 바르고 또렷한 영어로 천천히 말하여 주었으므로 못 알아듣는 말이 거의 없었다.  못 알아들으면 자꾸 되묻고, 천천히 말해 달라고 부탁하여 결국은 알아들었다.  시제와 어순이 틀리기도 하고, 정확한 용어를 선택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내 의사를 그대로 다 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끼리의 대화는 거의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까닭을 그들은 slang을 많이 섞어 사용하고 빨리 말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었다.

   식사는 아침은 거의 먹지 않는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porridge라고 하는 오토밀 죽이나 검은 빵 한 두 조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저녁은 굉장히 많이 먹었었다.  아침에는 나 혼자 억지로 이것저것 먹어보았지만 잘 먹을 수 없었고, 등교하여 보면 우리 일행 모두가 아침을 굶다 시피하고 와서는 배고픔을 하소연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녁은 양고기나 쇠고기, 혹은 닭고기로 만든 맛있고 푸짐한 식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겨우 먹고 나면 먹을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양의 디저트가 또 기다리고 있었다.  몇 번은 소화제를 먹어야만 할 정도의 양이었지만 그들은 항상 나보다 더 많이 먹었었다.  점심은 학교 구내 식당에서 해결하였었다.  일 주일을 참다가 아침에 흰 빵을 먹어야겠다고 하였고, 또 일 주일을 참다가 못 견디어서 라면과 김치를 사 가지고 와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나만 아침에 라면을 갊아서 먹었다.  물론 그들의 허락을 얻고서이다.

   그들은 매우 부지런하고 검소하였다.  음식을 남기는 일은 없었다.  접시에 조금 남은 기름기도 핥지는 않았으나 포크와 나이프로 다 먹었다.  식사가 끝날 때쯤이면 온 식구가 접시에 남은 음식을 나이프로 긁는 소리가 요란하였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옷은 꼭 걸레 같은 것을 걸치고 살았다.  주인이 정장을 한 모습은 한 달 동안 단 한 번도 구경을 못하였다.  집안의 가구는 모두가 낡고 오래된 것이었고 전자 제품도 예외는 아니었다.  쓰레기 분리 수거는 철저하였고 재생 가능한 것은 코르크 마개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모으고 있었다.

   온 집안에는 책이 수 백 권이나 있었는데 주인은 기회만 있으면 책을 읽고 있었다.  텔레비젼 앞에서도 책을 읽고 식사 후에 바로 드러누워서도 책을 읽고, 나와 대화를 하면서도 읽고 하였다.  부자간의 갈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한국과의 공통점이 많은 것에 우리 둘이 모두 놀랬다.  집안 일은 거의 아내가 다 하였다.  역시 신세대 부부는 같이 일한다지만 나와 동갑인 이 집주인은 나와 똑 같이 집안 일을 거들 생각을 하지 않아서 안 주인이 우리 둘을 모두 나무랐다.  그러나 즐겁게 농담을 하면서 한 식구처럼 지낼 수 있었다.

   (학교 생활)
   Queensland University에서의 연수는 영어 연수와 영어 교수법 연수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영어 연수는 회화, 듣기, 문법, A/V 등이었고, 영어 교수법 연수에는 방법론, CAI교수법, 실제 교수 참가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일 주일에 한 차례식 문화 탐방이 있었고, 학교 방문이 두 차례 있었다.

   실제 교수 참가를 위하여 금요일마다 학습 자료를 만들었다.  즉 우리 나라의 전래 동화 가운데 한 가지씩을 골라서 호주 어린이에게 이야기해 줄 준비를 갖추었다.  첫 주에는 이야기를 영역하였다.  우리 조에서는 ‘해님 다님’ 이야기를 준비하였다.  내가 영역을 하여서 강사에게 보여서 수정을 하였다.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그림을 그리고 준비를 하였는데 그들이 예시로 보여준 일본 교사들의 것보다 훨씬 잘 만들자고 모두들 작심하고 열심히 만들었다.

   더구나 강의 시간에 몇 번 연습할 기회가 있기는 하였으나, 호주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내가 동화를 들려줄 기회가 있었다는 것은 정말 보람있는 일이었다.  강의실에서 연습할 때에는 자신감이 별로 없었는데 실제로 어린이들을 앉혀 놓고 질문을 하기도 하고 그들의 질문을 들어가면서 ‘해님 다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잘 진행한 것 같아서 크게 자신감을 얻었다.  영어는 영어로 가르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는데 어쩌면 교수 용어를 영어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화 탐방)
   대학에서의 문화 탐방은 주 1회 4차례 있었는데 한나절의 문화 탐방은 Brisbane 시내의 작은 공원인 The Australian Woolshed와 Lone Pine Sanctuary 두 곳이었고, 하루가 소요되는 문화 탐방은 Gold Coast와 Sunshine Coast 두 곳이었다.

   모두가 인상적인 곳이었으나 우리 나라에도 흔히 있는 관광지 정도였으므로 일행은 모두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정부와 민간이 똘똘 뭉쳐서 함께 관광에 힘쓰고 있는 모습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정부에서는 사회 간접 자본에 많은 투자를 하여 모든 도시와 국토를 공원으로 가꾸었고, 학교 인사들은 우리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관광지를 홍보하고 안내하며 주선도 하였었다.  모든 거리와 관광지에는 쇼핑을 잘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관광지에는 반드시 상점을 거쳐서 나갈 수 있도록 출입구를 만들었다. 또한 그 물건값이 관광지라고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어서 마음놓고 살 수 있었다.

  특히 Sunshine Coast의 상점들은 퍽 인상적이었다. 각 상점들이 동화에 나오는 그림 같은 집들이었고 그 안의 물건들은 모두가 상점마다 다른 특색 있는 물건들을 취급하고 있어서 모든 상점을 모든 관광객이 다 들어가 보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어 두었었다.

  (주말 여행)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호주에는 예약(booking)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미리 예약을 하면 가격이 더 싸게 되는 여행도 많이 있었다.

첫 주말에는 그들(학교 강사진)이 권하는 Byron Bay로 갔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동해안 여느 바닷가와 별 다른 점을 느낄 수는 없었다. 물론 등대와 시장 등이 우리와 조금 다른 점은 있었다. 관광 버스를 이용하였는데 그들은 버스 안에서 서는 것도, 음식을 먹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으나 우리 일행은 이를 모르고 잘 지키지 못하여 버스 기사와 별로 좋지 않은 관계를 맺고 말았다. 또 그들은 여행사에서 Hostel 만 정해주고 식사는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침식을 완전히 제공하는 한국 여행사에 길들여진 우리들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그러나 Hostel에서의 하룻밤은 참으로 즐거운 추억이었다. 주로 유럽의 각 나라에서 온 젊은이들과 포도주를 마시며 흥겹게 자기 나라의 민속 노래를 부르며 밤늦게까지 즐기었다. 물론 잠도 그들과 한 방에서 허술한 침대에서 함께 자게 되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주말은 그들 호주 인들의 추천을 거부하고 좀더 용기를 내어 작은 그룹을 만들어 떠났다. 서쪽으로 소도시 Toowoomba, 북쪽으로 소도시 Bundaberg를 찾아갔다. 물론 더 멀리 가고 싶었으나 원체 넓은 나라라 버스로 하루 종일 서쪽으로 달려도 고작 Toowoomba이고, 기차로 6시간 동안 달려도 Bundaberg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시외 버스는 학생 할인이 되었고 열차는 예약을 하고 표를 미리 샀었다. 열차에서는 도중에 흡연을 하도록 10분간 정차하는 역도 있었고, 여승무원이 점심 주문을 받아서 날라다 주기도 하였다. Toowoomba에서는 Inn에서 잤고 Bundaberg에서는 Hostel에서 자면서 견문을 넓히고자 하였다.

인구 만 명 남직한 도시였지만 공원, 박물관, 여행자 안내소 등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시가지가 아름답게 정비되어 있었다.

(학교 방문)

대학에서는 두 차례 Milpera Special School과 Canterbury College를 방문하였었다. Milpera Special School은 이민 자들을 위한 현지 적응 교육을 하는 학교로 우리나라에서 갓 이민 온 여자 어린이도 한 명 있었다. 일반 중등학교 여자아이들이 봉사 활동으로 이들 이민 자들의 영어 학습을 돕기 위하여 수업 시간에 참께 참가하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Canterbury College는 서울 사대 부국과 자매 결연을 맺은 학교였는데 우리들이 방문하였을 때에는 사전에 한국 교사들이 재미있는 동화를 들려준다고 예고가 되어 있었는지 퍽 반갑게 어린이들이 맞아 주었었다. 넓고 공원 같은 학교에서 다양한 학교 system에 의하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여기 어린이들에게 내가 영작한 '해님 다님'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다는 것은 지금도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하교 길에 혼자서 내가 살고 있는 동네(St. Lucia)에 있는 한 학교를 비공식적으로 용기를 내어 방문해 보았다. Ironside State School이었는데 4시경에 방문하였지만 한 두 사람의 교사이외에는 모두가 퇴근하고 없었고, 청소부 아주머니들이 커다란 진공 청소기를 가지고 교실 청소를 하고 있었다. 학교측의 허락을 받아서 사진도 찍고 교실을 둘러보았다. 부모들이 하교하는 아동을 늦게 데리러 오는 경우를 대비한 방과후 과외 활동으로 보조교사들이 테니스, 농구, 야구 같은 것을 지도하고 있었다. 별로 컴퓨터 같은 교구 교재는 좋은 것이 없었으나 많은 외국, 특히 일본 학생들이 어릴 때부터 이 학교로 유학을 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를 생각하게 하였다.

(Brisbane 시가와 시민들)

인구가 대구의 반쯤 되는 도시이지만 박물관, 미술관이 있고 공원이 많이 있으며 무척 아름다운 도시였다. 공무원들이 시민을 위한 행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뚜렷이 알 수 있게 모든 것이 정비된 도시였다. 시청의 전망대에 오를 때에 두 번이나 잘 못 찾아서 물었더니 장애자인 듯한 공무원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들을 인도하며 자세히 일러주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전망대에 오르는 엘리베이터를 운전하는 공무원은 한국에 대하여 알고 있다면서 친절히 우리들을 안내해 주었다.

1988년에 엑스포를 열었던 자리에는 South Bank라는 공원이 넓고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었는데 그 아름답고 조화로움은 우리 일행을 여러 번 찾아가게끔 만들었다. 공원 옆에 박물관과 미술관, 공연장을 연계시켜 놓았고, 주말이면 장터가 열리어서 모두들 팔고 사고 하였다. 이들 상인들을 위하여 시에서 전기 사용이 용이하게 콘센트를 마련하여 줄 정도로 시민을 위한 행정을 베풀고 있었다.

Queens Street를 중심으로 번화가가 집중되어 있어서 높은 빌딩들이 몰려 더욱 시가지가 아름다웠는데, 이 거리의 한복판에 작고 둥근 야외 무대가 있어서 누구든 소규모 연주를 할 수 있었다. 그 근처에 긴 의자들이 제법 놓여 있고 심심찮게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거기 긴 의자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반 수 이상이 동양인이라 세계 각 국 사람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고 호주의 세계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이전에는 그들도 백호주의를 외치고 폐쇄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책은 바뀌고 새로운 이민법을 만들면서 미터법을 사용하고 화폐도 호주 달러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0년, 그들은 세계화에 성공한 듯하였다.

많은 외국인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 중에는 한국인도 굉장히 많아서 이제는 거리나 식당, 상점에서 많은 한국인을 만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고, 점원이 한 두 마디의 한국어를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상점은 오후 5시경이면 문을 닫지만 점원은 무척 친절하였다. 손님은 자기 차례를 기다려야 했지만 한 번 차례가 되면 물건을 사든 안 사든 점원이 그 손님에게 최대한의 친절과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버스 기사도 일요일에는 5시에 운행을 끝내지만 운행 중에는 무척 친절하였다. 여유 있게 운행을 하였고, 누구든지 길을 물으면 버스에서 내려서까지 자세히 안내하고 다시 버스를 운전하였다. 행인에게 길을 물어도 자신의 일을 젖혀 두고 친절히 가르쳐 주고 다시 따라오며 더 자세히 일러주고는 돌아가는 등 모든 시민이 한 마음으로 외국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문제점은 많이 있었다. 그 첫째가 국민들의 도박 습성이라고 하숙집 주인은 말하였다. 그렇게 개탄하고 검소하고 부지런한 이들 내외도 한 주일에 너 댓 장의 복권은 꼭 사서 맞춰보곤 하는 것이 내 눈에 띄었는데, 전 호주 인이 경마와 카지노에 많은 돈을 허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특히 Brisbane의 웅장한 카지노 건물은 퍽 인상적이었는데 여기서 운행하는 버스는 무료이고 식사도 무료로 제공된다고 하였다. 한국 학생도 3명쯤이 거기서 숙식을 하며 거액을 탕진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 둘째가 원주민인 Aborigine과 불법 체류자들의 문제였다. 이들 외에도 가출 청소년도 굉장히 많아서 TV에서 불법 가출 청소년 문제를 특집으로 다룬 것을 시청하였었는데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 * *

넓은 호주 땅의 극히 일부를 둘러보고 소감을 말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국토가 넓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없이 펼쳐진 목장과 사탕수수밭, 천혜의 땅 호주를 돌아보며 조국의 국토 좁음을 안타까워하기도 하며 이 넓은 땅을 한없이 부러워하기도 여러 번 하였었다. 그런데 에이즈 록(Ayers Rock)을 구경하기 위하여 현지 호주 여행사와 한국인 여행사를 몇 번이나 찾아보았지만 너무 멀어서 주말 여행으로는 갈 수가 없다고 하는 순간부터 국토가 너무 넓은 것도 좋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오히려 좁은 국토를 잘 개발하면 물류 비용도 적게 들고 생활하기 더욱 쾌적하고 좋으리라는 생각을 하였다. 전 국토를 1일 생활권으로 가꾸어 가고 있는 우리나라가 더 좋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인구가 적다고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뉴질랜드에 가기 전까지는 호주보다 뉴질랜드가 더 선진 되고 부유한 나라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지에 가보니 정 반대였다. 뉴질랜드는 국민 소득 15000달러에서 정지되어 있었다. 여러 가지 산업이 인구 부족으로 발달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1.5배나 되는 국토에 겨우 350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어서 협궤 철도를 따라 하루 2회 정도 기차가 다니고 그것도 겨우 두 세 량의 객차를 달고 있었다. 그 철도를 새로 놓으려고 해도 이용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 공장을 지어도 생산된 물건을 사 주는 구매자가 없어서 곧 문을 닫아 버린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자원은 바로 우수한 인력이고 이것이 국력으로 이어진다고 느꼈다. 따라서 인구 정책도 새로운 각도에서 세워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세계화를 실감하였다. 5년 전 국제 도시인 뉴욕을 방문했을 때에도 느끼지 못하였는데 이제 호주의 Brisbane 거리를 거닐면서 온갖 세계 여러 나라의 다양한 인종, 다양한 음식, 다양한 문화가 공존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대구나 서울 거리에 외국인이 넘쳐나는 날이 와야 진정한 세계화가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그 때를 대비하여 우리 일행이 선두 주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들고, 그 세계화를 준비하는 일꾼을 우리들이 길러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돌아보아 후회 없는 알찬 연수였다고 자부한다. 또 동료들끼리 서로 돕고 의지하여 외국에서의 외롭고 고달픈 연수를 견디어 내게 한 점도 고맙다. 교육부에서 이같이 연수를 시켜 준 것도 고맙다. 모쪼록 이 연수에서 얻은 많은 것들이 앞으로의 나의 교직 생활은 물론 살아가는데 큰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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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호주로 어학 연수를 떠나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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