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의창의 그림이야기

(1) 대한해협을 건너며

‘아빠’
개찰구를 빠져나가는 나를 부르는 소리에 뒤로 돌아보니
‘찰칵’
떠나는 우리 부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큰아들이 빙긋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엄마와 꼭 함께 오세요.’
‘그래, 집 잘 보고 제 때에 밥 챙겨먹고 잘 있어라.’
여행을 가면 의견 다툼으로 따로따로 오기 쉽다는 둥 떠나기 전부터 농담으로 우리 부부를 놀리던 아들 녀석들이 떠나는 마당에도 농담 반으로 걱정을 해주었다.
처음에는 나 혼자서 일본을 한 바퀴 돌아올 계획이었다. 아내도 혼자 가보고 괜찮으면 나중에 데리고 가 달라고 하였다. 집 걱정도 많이 하는 듯 하였다. 나는 그보다는 아내의 건강이 걱정이었다. 여행사에 부탁하는 패키지 여행도 아니고 달랑 배낭 하나를 매고 떠나는 여행이라 여자의 몸으로 견딜지가 걱정이었다. 더구나 15일간이라는 적지 않은 기간을 견디기가 힘들 거라는 생각도 하였다.
그러나 아들들은 엄마가 아빠와 함께 떠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눈치로 며칠을 함께 떠나도록 엄마를 설득하였다. 나도 두 번씩이나 해외로 출장을 간 경험이 있지만 아내가 한번도 외국에 나가본 일이 없어서, 이번에 자비로 해외로 나가게 되어서는 아내를 데려 가야할 것 같았다. 본인이 원하면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며칠 의논을 하다가 결국 함께 떠나기로 결정을 하였던 것이다. 실은 나도 혼자 가는 것보다는 아내가 옆에 있어주는 것이 좀 위로가 되고 마음도 든든할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갈 일이 있어도 혼자보다는 둘이 가는 것이 낫다는 여행 안내 책자에 씌어있는 글귀가 맞을 듯하였다.
경부선 열차에 몸을 싣고 달릴 때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그저 경치로만 느껴지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멍하니 앞으로 겪게될 이국에서의 하루하루가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느껴졌다. 사실 큰 두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옆에 아내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나 혼자라면 어디에서 잔들 어떠랴 싶지만 가장 걱정이 잠자리였다. 어떻게 되겠지. 이제까지 어딜 가서도 바깥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고생한 적은 없었지.  그 때마다 무슨 수가 나서 잘 해결이 되었으니 이번에도 잘 해결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졌었다.
마침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여행을 하게 되는 큰아들 회사의 서 실장 님과 가족들, 전무님, 또 서 실장의 친구 분 가족들이 당분간은 함께 행동할거라서 조금은 의지가 되었다.

2000년 8월 13일(일) 오전 10시 30분에 새마을호 열차는 부산 역에 도착하였다. 자주 와보는 부산이라 별로 신기할 것도 없었다. 우리 일행은 역 가까이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즉석 김밥을 판다고 적혀있기에 들어간 것이다. 김밥 두 개씩 넣은 도시락을 3000원 한다는 말을 듣고 모두들 비싸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10개를 주문하였다. 그러나 이후로 이렇게 싸고 맛있는 김밥을 두 번 다시 일본 땅에서는 먹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미처 짐작하지 못하였다. 아내와 나는 식당에 부탁하여 빈 플라스틱 병에 찬물을 두 병 받아서 배낭에 넣었다. 여름에 길 떠나는데는 물이 가장 요긴할 것 같아서였다.
아이들도 있어서 부산 역 가까이 있는 부산 국제여객터미널로 택시를 타고 갔다. 기본요금이 나왔다. 보딩 패스를 받고 출국 신고서를 작성하고 검색대를 지나 출국심사를 마치자 대합실로 들어갔다. 검색대도 그냥 배낭을 밀어 넣는 것으로, 출국신고도 그냥 여권과 비자만 보고는 간단히 도장을 찍어주어서 너무도 간단히 출국 수속이 끝났다. 더구나 출국 신고서 옆에 붙은 입국 신고서를 여권에 끼워두었으므로 나중에 입국할 때에는 그 것을 그냥 사용하면 될 것이었다. 비행기를 탈 때에는 짐을 부치고 하는데, 배를 탈 때에는 그냥 자기 짐을 가지고 가니 아주 간편한 듯하였다.
대합실의 면세점은 너무 단순한 물건들뿐이어서 우리 한국인이 살만한 물건은 없는 듯하였다. 그렇게 기다리다 12시경 우리는 비틀2세 쾌속 여객선을 타기 위하여 나아갔다. 어디로. 흔히 배를 타는 다리를 잔교라고 하지 싶은데 이거는 위와 옆이 온통 유리로 덮인 통로를 한없이 걸어 가야하였다. 너무 무더워 모두들 헐떡거리면서 가는데 제복을 입은 한 아가씨가 급히 걸어가면서 옆의 창문을 열면서 나아갔다. 조금은 찬바람이 들어오는 듯하였으나 진작 열어놓지 않아서 그 열기가 몹시 심하였다. 50여 미터를 나아가니 앞에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12시 20분에 출발하는 배를 15분에 타도록 하였으니 우리는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기념 촬영을 한다고 한 컷 찍으려고 배낭에서 카메라를 내니 렌즈가 뿌옇게 흐려 있었다. 아차, 아까 찬물과 함께 넣어 두었더니 카메라가 식어서(?) 더운 열기를 받자마자 렌즈가 뿌옇게 흐려진 것이다. 아니 첫출발부터 좀 꼬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잠시 그런 생각은 접어두고 배에 올랐다.
기적은 없고 싸이렌 소리를 작게 울리면서 여객선은 출발하였다. 이 비틀2세라는 쾌속선은 한려수도를 달리는 엔젤호와 거의 비슷하고 조금 더 큰배로 역시 바다 위를 떠서 달리는 배였다. 후쿠오카까지 2시간 55분에 달린다고 하였다. 여행 안내 책자에는 여객선을 타게 되면 빨리 갑판에 올라가서 부산항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으라고 씌어 있었는데 이층으로 된 배의 좌석에 앉으면 그만이지 갑판도 무어도 없었다.
여객선은 천천히 방향을 바꾸면서 오른쪽으로 부산대교, 영도, 등대, 태종대를 바라보며 왼쪽으로 오륙도를 돌아 외항으로 나오니 파도가 점점 높아졌다. 조용필씨의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라는 노래 가사와도 어울리지 않는 우리 쾌속선이 속도를 더하며 달리자 나는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옛날 아버지께서 12살의 어린 나이로 일본으로 떠날 때에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때 아버지께서는 일본말은 한 마디도 못하면서 14살 되시던 큰아버지와 함께 일본사람 손에 이끌려 시모노세키인가 하는 곳으로 돈 벌러 떠나셨는데, 나는 이제 영어와 일본말을 몇 마디 할 줄 알고, 자비로 여행길에 올랐으니 크게 대조가 되는 모습이었다. 그 순간 짙푸른 파도를 보면서 갑자기 이순신 장군이 생각나는 것은 또 다른 내 내면의 모순인가. 부산 해전의 현장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나 자신이지만 어쩐지 이 근처 바다가 아닌가 하고 상상해보기도 하였다.
10여분 후 망망대해에 나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저 멀리 육지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설마 벌써 일본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 대마도인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바라보니 전체가 산으로 이루어진 땅덩어리가 저 멀리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때 선내에 일본말과 한국말로 안내가 있었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50여km 떨어져있고 길이가 70여km라는 것이다. 진작 이 섬을 우리나라에 복속시키지 않은 선조들을 원망하던 나였지만 지금 바라보니 조상들이 산악 투성이인 이 섬을 영토로 받아들이지 않은 까닭을 알만하였다. 그 때의 농경 사회에서 이 산악 투성이인 섬에 조상들이 눈독을 들였을 리 만무하였다고 생각하였다.
배 안에는 조그마한 매점이 있었지만 우리들은 가지고 간 김밥으로 점심을 때웠다. 승무원이 커다란 비닐을 들고 다니면서 쓰레기를 거두고 있었다. 지금도 의문이지만 이 배가 JR큐슈와 한국고속해운(본사 부산)에서 공동 운행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승무원들이 말투로 보아서는 모두 일본사람들인 것 같았다. 안내 방송도 거의 일본어로만 하고, 간혹 한국말로 안내를 해도 이상한 억양의 우리나라 말이어서 오히려 더 알아듣기 힘들 지경이었다.

3시 10분에 드디어 후쿠오카에 도착하였다. 후쿠오카 항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리 산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산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산들이 온통 나타나기에 역시 일본도 산악국가이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책에서 배우기를 우리나라는 70%가 산악인데 일본은 80%가 산악이라고 하니 항구에 들어서기 전에는 온통 산만 본 셈이다.
일본에서의 입국 수속은 너무도 간단하였다. 우리나라와 같이 입국신고서와 출국 신고서가 한 장으로 되어 있어서 입국 심사관은 입국신고서를 자기가 끊어서 가지고 출국신고서는 친절하게도 내 여권에 붙여주었다. 나중에 출국할 때에 그대로 제시하면 될듯하였다. 그리고는 나가라고 ‘어쩌고 저쩌고 도오조’(どうぞ:모쪼록)하고 안내를 친절히 하였다. 그 말투가 너무도 친절하여서 입국 심사가 까다롭다고 들은 것과는 딴판이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대합실은 텅 비었고 의자들이 많이 있었다. 거기 앉아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제 일본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른 대합실에는 해운대의 모 호텔을 선전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는 것 외에는 별로 눈에 뜨이는 것이 없었다. 먼저 입국 수속을 마친 일본인들이나 한국인이나 (아마도 반반인 듯하였다.) 모두 나가버리고 일행 중 먼저 나온 나 혼자 의자에 앉아서 일행을 기다렸다. 앞으로 다가올 일본에서의 생활을 호기심을 갖고 기다리면서...

참고: 준비한 것들
ㅇ 여름 내의 상 하 한 벌씩, 세면도구, 카메라, 필름, 간단한 구급약, 된장(집에서 양념을 넣은 된장인데, 이것보다는 오이지 같은 것이 더 좋았을 것임.), 이쑤시개(일본인은 어디에서나 사용하므로 필요 없었음.), 김, 소주 7팩
ㅇ JR패스 교환권 2주일 권 45,100엔( 전국 여행을 위해서는 JR패스가 좋으며 1 주일용은 더 쌈, 7일 단위로 판매함. 7일 권 28,300엔, 21일 권 57,700엔. 큐슈 지방만 여행하고자 할 경우에는 큐슈철도패스가 더 편리함. 쾌속여객선 왕복 운임 포함하여 5일 권이 22,000엔, 7일 권이 24,000엔임)
ㅇ 부산 후쿠오카 쾌속여객선 왕복 배표 (170,000원)
ㅇ 여권, 90일 체류 비자
ㅇ 현금 150,000엔(아내와 함께이니 300,000엔, 실제로 180,000엔만 사용하였음.), 500,000원(그대로 가져왔음)
ㅇ VISA카드(만일을 위하여 가져갔으나 사용하지 않았음.)
ㅇ 찬물 2병
ㅇ 배낭 1개, 신주머니 같은 작은 배낭 1개
ㅇ 초등학교 학습장 4권(기록과 선물용으로 쓰임, 좀 나은 선물용이 있었으면 좋았겠음.)  
ㅇ 일본여행 안내 책자(아주 유용하였음, 어느 나라를 여행하든 그 나라를 소개하는 책자를 가져가는 것이 좋은 것 같음)

(2) 후쿠오카의 밤

이제 대합실에 일행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낯선 분이 한 분 보였다. 서 실장의 친구인 강 지점장이었다. 이분은 한국의 관광회사 후쿠오카지점에 근무하는 분으로 안내를 해주기 위해 일부러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마중을 나와주셨던 것이다. 우리들의 편의를 위하여 한글로 된 후쿠오카 관광지도를 한 장씩 나누어주었다. 그리고는 일단 하까다 역으로 가기로 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후쿠오카는 후쿠오카 시와 하까다 시가 합쳐서 된 도시로 지명은 후쿠오카로 하고, 역 이름은 하까다 역으로 하기로 주민들의 합의가 이루어져서 역은 하까다로 부르고 있었다.  사실 하까다란 이름은 다른 여러 곳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일행이 모두 강 지점장이 타고 온 차로 이동할 수가 없어서 일행의 반은 택시를 타고 반은 이분의 차를 타고 하까다항국제터미널을 출발하여 하까다 역으로 향하였다. 전에 호주에서도 놀란 일이지만 차가 왼쪽으로 달리는 모습은 신기하기도 하였지만 깜짝 깜짝 놀라게 하기에 딱 알맞았다. 앞으로 한 참은 이렇게 놀라면서 차를 타야할 것 같았다.
거리는 커다란 야자수 나무가 간혹 보여서 남국의 정취를 맛보게도 하였다.  그러나 처음 한국에 오는 일본 사람들이 가장 놀라는 것이 너무도 일본과 흡사한 점이라는데, 나도 일본 땅에 처음 내려 시가지를 달리면서 이곳의 거리 풍경이 너무도 우리나라와 흡사한 점에 놀랐다. 도로가 우리 보다 좀 좁다는 것 외에는 거의 다른 점을 느낄 수가 없었다. 간판에 한자가 많고 간혹 일본의 가나가 섞여 있다는 것 외에는 거의 우리나라와 같은 시가지 풍경이었다.
하까다역 구내는 너무도 복잡하였으나 간단히(이날은 간단히 찾았었다.) 안내소(information center)를 찾아서 JR패스 교환권을 제시하니 옆 창구로 가라고 하여서 모두들 여권을 보이고 신청서를 작성하여 JR패스를 받았다. 다른 일행은 규수레일패스를 교환하였고 나와 아내는 JR패스를 교부받았다. 거기 고무인으로 8월14일부터 8월 27일까지로 (특히 8월 27일은 크게 찍혀 나왔다.) 유효기간을 찍어주었다. 내 생각에는 아예 내일 나가사끼로 가는 열차표도 예매를 하였으면 좋으련만 모두들 그냥 호텔을 구하려고 하였다.
호텔을 쉽게 구하지 못한 탓에 강 지점장님의 차와 택시를 타고 해변의 후쿠오카돔이 있는 곳에서부터 도시고속도로1호선을 타고 계속 달려 다시 도시 고속도로 2호선을 타고 하까다역 가까이를 지나서 이분이 사는 아파트까지 오게 되었다. 이 도시고속도로는 그 1호선이 후쿠오카 항의 해변을 따라 가로로 길게, 그 2호선이 후쿠오카 시를 세로 질러 길게 이어져서 이 도시의 기간도로의 구실을 하고 있었는데 시가지를 지날 때에는 그 높이가 10층 정도의 아파트 높이만큼 솟아올라 있기도 하였다.  이 날은 미쳐 그걸 모르고 차를 타고 갔지만 돌아오는 날 다시 후쿠오카에 들렸을 때에 내가 머문 호텔이 11층이었는데 내 눈 높이와 같은 높이로 이 도로가 저 멀리 다른 건물들 사이로 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새삼 놀랐었다.
하여튼 일이 잘못되었는지 잘 되었는지 강 지점장님의 아파트에 머물게 되었다. 하까다역에서 15분쯤의 거리에 있는 20평쯤 되는 전형적인 일본 아파트였는데 여기에 우리 일행 어른 7명, 아이 5명이 들이닥치게 되어서 그 부인에게는 매우 미안하기만 하였다. 그래도 싫은 기색 없이 반갑게 맞아주니 더욱 죄송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덕택에 일본 아파트의 모습을 안에서 살피게 되었다. 전임 지점장은 독신이어서 더 작은 아파트에 살았는데 강 지점장은 기혼자라고 회사에서 좀 더 큰 아파트를 세를 얻어주었다고 하였다. 사실 이 아파트가 일본에서는 좀 큰 아파트 축에 든다고 하였다. 가구는 모두 고국에서 팔거나 친척에게 나누어주고 맨몸으로 왔는데 여기 가구가 비싸기도 하지만 한국과는 생활방식이 달라서 가구도 다르므로 별로 사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두 개의 방이 다다미가 깔려 있었던 게 특이하였고, 벽이 우리처럼 두꺼운 콘크리트가 아니고 나무로 얇게 되어 있어서 공간 활용이 용이하게 되어 있었다. 또 빈 공간은 모두 벽장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활용을 잘 하면 아파트가 좁지 않게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간단히 주스 한잔씩을 하는 동안에 강 지점장은 차를 주차장에 대고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였다. 이곳에서는 불법주차란 상상도 못하고 모든 차는 주차장에 대어야하므로 자전거를 타고 가서 자전거를 주차시키고 차를 몰고 볼일을 본 후에 다시 주차시키고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모두들 후쿠오카 시가 구경을 하고 싶어하였다. 조금 전에 차를 타고 거의 한바퀴 돈 것 같았으나 나는 여행 안내 책자에 있는 캐널시티하까다를 가보고 싶었다. 캐절시티하까다는 1996년에 만들어진 복합 쇼핑센터로 건물을 양분하며 흐르는 조그마한 인공운하가 있어서 개장 반년만에 입장객수가 무려 1000만을 돌파하였다고 적혀있었다. 안내 책자에도 또 다른 이들도 후쿠오카에는 별로 볼 것이 없다고 하여 우선 이곳으로 가기로 하였다.
무엇을 어떻게 타고 갈 것인가를 의논하기도 전에 모두들 걸어가자고 하였다. 아이들도 있었고, 또 처음 도착하여 후쿠오카 시가지도 구경하고 싶어서였다.  거리의 길은 한국보다 훨씬 좁았으나 교통체증은 없었다.  길가에 불법 주차한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 대신 유료 주차장은 굉장히 많이 눈에 띄었다. 그 가격도 비싼 편이라 1시간에 200엔 이상씩 하였다.
길가의 간판은 예상한대로 한자와, 외래어 때문에 가다가나가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어른 9명, 어린이 6명, 이렇게 대 식구가 두리번거리면서 번화한 가로를 걷고 있는 것도 제법 구경거리였으리라.  철교 밑의 지하도를 걸을 때에는 주위에 자전거를 많이 주차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자전거 도로가 따로 없고 인도로 자전거를 타는데 아주 빠른 속도로 자전거를 타기에 몇 번인가 부딪힐 뻔하였었다.  더구나 기차 역 가까이에는 대규모의 자전거 주차장이 있었는데 종종 분실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걸어가면서 강 지점장이나 그 부인에게서 일본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들을 기회가 있었다.  4학년 짜리 딸아이는 한국말을 잘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한국의 큰집에 방학동안 보내었다는 말에 나는 이분들의 건전한 삶의 일단을 살필 수가 있었다. 둘째 아이는 유아원에 다니는데 일본에 세금을 내기 싫어서 소득 신고를 한국에 하고 일본에는 0으로 하였더니 이 아이의 유아원 비용이 무료일 뿐 아니라 우유 값이 지급되더라고 하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일본이 우리  보다는 사회보장 제도가 더 잘 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또 처음 일본에 와서 살림을 차리고 나서 혼자 집에 있는데 갑자기 집이 흔들리고 지진이 나서 어쩔 줄 몰라하는데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빨리 가스 불을 끄고 밸브를 잠그라는 말을 듣고 거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남편의 안내로 지진 대피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곳 후쿠오카만 해도 일년에 한 두 번씩은 작지만 지진이 일어난다는 말도 들었다.
지나면서 ‘燒肉(やきにく)라는 간판을 보고 ’한국의 불고기를 흉내낸 일본 불고기인데 느끼하지만 억지로 먹을 만 하다‘고 하였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거리 구경도 잘 하였고, 드디어 캐널시티하까다에 도착하였다. 우리나라 대도시의 일반 대형 백화점과 겉보기에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캐널 시티하까다로 들어섰다. 그런데 입구에 들어서던 강 지점장이,
‘아, 위험지구다!’                                                 하면서 왼쪽으로 급히 일행을 인도하였다. 그런데 서 실장이나 그 친구 분도 급히 눈치를 채고 왼쪽으로 황급히 아이들을 이끌고 가는데 나는 멍하니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있는가. 그저 예쁘장한 어린이 장난감들이 숱하게 전시되어 있는 매장이 휘황한 불빛에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아내가 싱긋 웃었지만 그 때에도 나는 그 의미를 몰랐었다.  이런 미련퉁이.
입구의 좀 너른 곳에는 예쁘게 치장을 한 손수레 두 대가 있었는데 거기에 선물용품이 전시되어 있는 것은 너무도 깜찍해서 누구나 탐내어 살펴 볼 수 있게 해두었었다.  역시 일본인들의 상술이 대단하구나 하면서 점점 나아가니 운하가 나타났다. 나는 대단한 운하인가 하였더니 그저 10여 m되는 폭으로 물이 천천히 흐르도록 해둔 이름만의 운하로 물 속에 분수나 다른 불빛이 비치는 장치를 해두어서 예쁘게 꾸며두었었다. 좀더 운하를 따라가니 넓은 공터에 공연장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서양인이 아들과 딸인 듯한 아이 둘을 데리고 기예를 보여주고 노래도 부르고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구경도 하고 앉아서 쉬기도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일행은 해산을 하기로 하였다. 취향이 서로 다르니 한 시간 동안 각자 구경을 하고 이곳에서 8시에 만나자고 약속을 하였다. 헤어지기 전에 강 지점장이 이곳은 물건이 비싸니 쇼핑은 하지 말아 라고 하였다.  그런데 둘러보니 어떤 물건들은 가격이 그렇게 비싼 편은 아니었다.  안내 책자에는 이곳에 호텔이 2곳, 각종 상점이 100여 곳, 식당이 30여 개가 있다고 되어 있었는데 아내와 내가 돌아다녀 보니 넓기도 하였고 다리도 아팠다. 마침 전화기가 있어서 동전을 넣지 않고 비상 단추를 누르고 데이콤을 이용하여 집에 전화를 하였다. (일본에는 국제 전화카드를 위조하여 전화하는 사례가 너무 많아서 국제 전화를 할 수 있는 전화기가 따로 있었고, 전화기가 다양하고 카드도 다양하여 국제 전화하기가 아주 곤란하였는데 이 때에는 이상하게도 전화가 잘되었었다.)
좀 번듯하게 비싼 물건을 파는 매장에는 손님이 거의 없고, 세일을 한다고 씌어 있는 저가품을 파는 곳에는 젊은 층이 많이 몰려 있었으며 그 가격도 아내의 말로는 별로 비싸지 않다고 하였다. 사실 나는 물건값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어서 그냥 따라 다닐 뿐이었다. 너무 복잡하여 제자리 찾기가 어려울듯하였으나 운하를 따라가면 되므로 쉽게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동안 고맙게도 강 지점장은 우리들을 위하여 식당을 예약해두었었기에 그곳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름도 모르는 메뉴를 들이대며 주문을 하라는데 황당하였으나 음식 이름 옆에 사진이 있어서 대략 짐작을 하고 주문을 하였는데 우리들이 한 가지씩 주문을 한 후에, 강 지점장은 그 외에 그 식당에 있는 다른 것들을 한 가지씩 주문을 한 모양으로 갖가지 음식이 계속 들어왔다. 어른들은 맥주 한 잔을 곁들여 맛있고 배부르게 잘 먹었지만 한 가지에 8,9백엔 하는 것을 그렇게 먹다보니 전체 계산이 2만 엔도 넘게 나왔는데 이분이 고국에서 온 친구들을 대접을 한다고 낸 모양이었다. 잠도 재워주고 저녁까지 푸짐하게 대접을 받으니 미안하기만 하였다. 더구나 나는 초면인데...
배도 부르고 이제 후쿠오카의 밤 경치나 구경을 했으면 좋겠는데... 이분이 우리들을 인도한 곳은 유흥가로 유명한 나까스(中洲)란 곳이었다. 콘크리트로 제방을 만들어둔 좁은 강가에 공원처럼 넓은 길이 있었다. 강에는 아마도 바닷물이거나 바닷가라서 그런지 처음 갈 때에는 거의 바닥을 드러내었었는데 나중에는 어느새 물이 들어와 있었다.
강 지점장의 설명으로는 이곳에는 포장마차도 많고 사람이 붐비는 곳인데 지금은 명절(8월 15일)이 다가와서 사람이 적다고 하였다.  좀 특이한 것은 길가에 금붕어를 파는 사람들이 몇 군데인가 있었다.  그런데 그냥 파는 것이 아니라 돈을 내고 자기가 국자 같은 것으로 뜨면 자기가 뜬 만큼의 금붕어를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 금붕어가 새끼인지 아주 작은 것뿐이었다. 그리고 전화부스 같은 데에는 온통 콜걸들을 소개하는 전단(야한 사진과 전화 번호가 적힌 명함 크기의 카드)이 빈틈없이 붙어 있었다. 산책을 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밤이 깊어가면서 많아지고 있었다.
조금 더 나아가니 덴진중앙공원(天神中央公園)으로 이어졌다. 그 근처에는 13층 짜리 특이한 건물이 눈에 띄었는데 ACROS fukuoka라는 건물로 한쪽이 계단식으로 층수가 높아짐에 따라 좁아지게 설계가 되어 있었는데 그곳에 나무를 심어서 멀리서 보면 꼭 언덕같이 만들어두었었다.  양쪽이 그렇고 가운데는 원형의 건물로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니 아주 번화가가 나오는데 바로 앞에 후쿠오카역이 있었다. 강 지점장의 말로는 전에는 하까다역이 중심가였는데 이제는 여기 후쿠오카역 쪽으로 중심지가 옮겨지고 있다고 하였다. (하까다역은 JR 기차역이고 후쿠오카역은 전철과 지하철역임.) 거기 도로에는 공사를 한다고 아주 복잡하였고, 너무 멀리 왔으므로 걸어서 돌아가기가 곤란하니 지하철을 타고 가기로 하였으나 사람이 많아서 택시를 타면 더 싸게 갈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러 택시를 타기로 하였다.
저녁도 얻어먹었고, 잠도 재워준다고 하니 이제 택시비는 내가 내어야할 것 같았다. 그런데 기본요금이 590엔이니 이것도 만만치 않아서 1500엔 정도의 택시비를 내었다. 우와 장난이 아니다 싶었다. 그래도 속으로 앞으로의 15일 중에 오늘은 최대한 절약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파트로 돌아온 우리들은 대략 잠자리를 정하였다. 아내와 나는 이 집 아이들의 놀이방에서 자기로 하였다. 내일 아침에 일찍 떠나는데 다른 이들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도 않고, 나는 원래가 다른 이의 방해를 받으면 전연 잠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일행은 두 개의 방과 마루를 이용하여 자게 되었다. 강 지점장의 부인에게 부탁하여 찻물을 끓여달라고 하여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여름 여행에 물이 가장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다른 이들은 아이들을 위하여 내일 하우스텐보스(나가사끼 근처의 테마파크로 네덜란드 풍으로 만들었는데 입장권만도 4,200엔이나 하는 놀이 동산 같은 곳)로 갈 거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바로 나가사끼로 간다고 하였다. 내일 저녁에 나가사끼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내 여행 목적이 놀이터에 가는 것이 아니고,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함도 아님을 분명히 자신에게 당부하였다. 그러면 무어냐. 그들 일본인들의 삶을 보기 위함인 것이다. 그들의 역사 현장, 그들의 땅덩이, 그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왜 그들은 선진국이 되었고, 우리는 못되었는지. 무엇이 그들을 선진국민으로 만드는지를 보고 싶은 것이다. 서양 나라에 갔을 때에 그들이 일본인은 사람으로 보는데 왜 우리는 사람과 동물의 중간쯤으로 밖에 보지 않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아파트 복도 쪽으로 난 문을 여니 방충망으로 제법 바람이 들어오는 듯하였으나 몹시도 더웠다. 강 지점장 부인이 선풍기를 가져다주었다. 집에 있으면 편안하게 에어컨을 켜고 잠이 들련만 등에는 아이들의 그림 맞추기를 깔아서 푹신하고 좋은데 아내와 둘이 누우니 꼭 맞는 답답한 공간에 그래도 선풍기를 트니 좀 나았다. 그런데 이 서민 아파트의 복도로 그 아무도 지나가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고, 그 너머의 도로에 경적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였다. 남에게 전연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그들의 생활 태도를 이런 조그마한 것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 나가사끼로 출발하면 완전히 혼자서 이 일본을 헤쳐 나아가야 한다는 긴장감을 맛보면서 그래도 제법 잠이 잘 들었다.

(3) 나가사끼로 가는 길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화장실에 다녀와서 간단히 세수를 하였다.  여름에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하는 내 버릇대로 하지 못하여 몸이 몹시 찌뿌둥하였으나 간단한 세수로 참았다. 냉장고의 물을 비닐 병에 담는 등 출발 준비를 간단히 마치고 일찍 깬 부인네들에게 조용히 인사를 하고 우리 부부는 강 지점장의 아파트를 나섰다.


8월 14일 월요일 아침 6시 30분, 아직 이른 후쿠오카의 아침은 싱그러웠다. 우리 두 부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맑은 아침 공기를 마시며 일본에서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우선은 하까다 역으로 향하여 걸어갔다. 내가 대략은 방향을 잡고 큰길로 나서서 걸어갔으나 실은 자신감은 좀 적었다. 어제 저녁에 걸어간 길을 조심스레 간판을 보면서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 길로 10여분 가면 될 것 같았다.
‘Excuse me.  How can I get to the Hakada Station? '
길가는 사람을 잡고 물었다.
‘.... ? ? ’
아니, 일본인들은 영어를 잘 못한다드니 간단한 말도 모른단 말인가?
‘실례합니다. 하까다역은 어디입니까? (失禮します. 博多驛は どこですか)’
옛날에 배우고는 써먹지 않았던 일본말을 조금 써먹기 시작하였다.  그제서야 이 아저씨, 자세히 가는 길을 가르쳐주었다.  그러고 보니 방향은 잘 잡은 모양이었다. 신호등 두 번째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10분 정도 걸어가니 어제 처음에 도착하였던 하까다역이 나타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건 하까다역 뒷편이었다.) 일단 역구내에 들어섰는데 이건 또 웬 일인가? 뒤죽박죽 사람과 간판이 뒤엉켜서 도대체 어디로 가야 나가사끼로 갈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럴 때에는 묻는 것이 가장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 직원인 듯한 사람을 붙들고 나가사끼행을 타려면 어떻게 하느냐고 영어로, 일어로 물었다. 그들의 친절은 대단해서 하던 일을 멈추고 일부러 데려다주기까지 하면서 두 번 물어서 나가사끼행 열차를 타는 승강장(프래트홈)까지 도착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다음 나가사끼행 특급의 출발 시각은 7시 30분이었다. 예약을 하지 않았으니 지정석을 탈수는 없지만 아침 출근시간이 되지 않아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하였다. 30분 정도의 시간이 있어서 구내에서 우동으로 아침을 때웠다. 우동 한 그릇에 350엔. (아무것도 없는 가락국수가, 너무 비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내는 유부초밥을 사먹었는데 한 개에 120엔 하였다. )
열차가 들어와서 타려다가 만사 튼튼하게 한다고 다행히 지나가는 직원에게 물었더니 내가 타려고 한 열차는 다른 곳으로 가는 열차였다. 열차 두 대가 붙어서 가는데 중간에 떨어져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다음부터는 조심을 하였지만 그래도 꼭 한 번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다.
그 직원의 안내로 우리는 훨씬 앞으로 가서 5호 차에 탔다. 깨끗한 객차에 자리도 많아서 편안하게 앉았는데 열차가 출발하고 조금 가는데 여기 저기서 담배 연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아니 끽연석이란 말인가.  그 때에 안내 방송이 나오고 객차 앞의 전광판에도 안내가 나오는데 몇 호 차는 지정석이고, 몇 호 차는 자유석이며, 몇 호 차는 끽연석이고, 몇 호 차는 금연석이라고 방송을 하였다. 그런데 그 발음이 지유세끼(自由席:じゆうせき) 등 세끼라는 말이 많이 들어가니 아내가 막 웃었다.  담배연기를 우리는 견디지 못하고 4호 차로 가서 금연석이고 자유석인 객차에서 편안히 자리에 앉았다.
차내는 조용하고 아늑하여 장거리 여행을 하기에 알맞았다. 손님이 적은 탓도 있었지만 모두들 조용히 자기들 일에만 관심이 있었지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하지 않았다.  차장이 들어왔으나 조용히 들어와서 입구에서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고는 무어라 작은 소리로 자기가 할 일을 이야기 한 다음에 차표를 검사하였다. 물론 우리는 JR패스를 보여주었더니 ‘하이’하면서 돌려주었다. 용무를 마치고 나가면서도 모자를 벗고 인사를 공손히 하고는 나갔다. 그리고는 다시는 오는 일도 없었다.
그 때에 아주 조그마한 아가씨가 검은 옷을 입고 물건을 팔러 들어왔다. 혼슈에 갔더니 아가씨들의 옷차림이 달랐는데 규슈에서는 항상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북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키가 큰 아가씨도 보였지만 이 때 후쿠오카에서 나가사끼까지의 열차에 탔던 이 아가씨가 가장 작고 가장 공손히 잘 하는 것 같았다. 들어와서는 인사부터 아주 공손히 하고는 조용히 물건을 팔고 또 나가면서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나갔다. 혹시 손님이 지나가면 물건을 통로 한 옆으로 비켜놓고 공손히 기다리고, 없는 물건을 손님이 주문을 하면 적어두었다가 다음에 올 때에 그 좌석에 가서 가져다주곤 하였다. 물건을 사면 그 자리에서 바코드를 찍어서 계산을 하였다. 혹시 손님이 물으면 팔던 물건을 그대로 비켜두고는 그 손님을 데리고 친절히 안내를 해주고는 하였다. 정말 그 아가씨가 들어와서 나갈 때까지의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기까지 하였다. 아주 작은  아가씨가 너무도 공손히 물건을 팔고 있는 그 직업 정신이 놀라왔던 것이다.
처음으로 열차를 타고 여행하는 터라 우리는 바깥 경치에 시선을 온통 빼앗기고 있었다. 도로는 좁았으나 소통이 잘되고 있었다. 15일간 일본에 있으면서 경적소리를 요란하게 들은 기억이 없으며, 차가 심하게 밀리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집들은 다양하게 지어져 있었는데 나중에 홋카이도 등 북쪽으로 갈수록 신식 양옥이 많았지만 이곳에는 전통적인 일본 가옥이 많았다. 그런데 그 집의 방향이 우리처럼 남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로 지어져 있었다. 지붕도 일본 기와로 이어져 있었지만 단순하지가 않고 2,3층으로 여러 조각으로 되어 있어서 각양각색이었다.
그런데 시골로 가면 갈수록 집의 크기가 더 큰 것 같았다. 도시보다는 오히려 시골이 더 잘 사는 듯 하였다. 건평이 아마도 우리 식으로는 4,50평은 족히 될 듯 싶었는데 1층보다는 좀 좁지만 2층이나 3층으로 되어 있으니 전체 건평은 꽤 될 듯 하였다. 이런 집들이 담이 없으니 보기에 아주 좋았다. 담이 있는 집도 있었으나 아주 낮았고, 예쁘게 되어 있었다. 특이한 것은 지붕의 색깔이 거의 회색 기와이고, 벽은 연한 회색이거나 노란색이 약간 들어간 연한 회색이어서 차분한 느낌을 받게 하였다. 큐슈 지방 거의가 이러하였으나 북쪽으로 갈수록 지붕의 색깔이 다양해졌다.
간혹 병원 간판도 보였으나 우리처럼 거창하게 큰 건물이 아니라 그저 가정집과 같은 일본식 주택에 병원 간판이 달려 있었다. 특이한 것은 내과가 있고 위장과가 따로 있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위장병이 많은지.... 그리고 우리나라처럼 갑자기 시골길에 우뚝 높이 솟은 아파트 같은 것은 없었다.  아니 도시에도 아파트 단지 같은 것은 거의 눈에 뜨이지 않았다. 더구나 신축한 커다란 아파트 단지는 없는 듯하였다. 시골에는 그저 일본식 주택이 2,3층으로 가지런히 모여있었지 아파트는 없었다.
큰 도시의 입구는 지저분하기 마련인데 그러한 곳이 전연 없었다. 집들의 뒤쪽이나 어디나 더러운 곳이 없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농경지정리는 하지 않았는지 들 전체가 반듯한 논밭으로 되어 있는 곳은 없었다. 시골길도 모두 잘 포장이 되어 있고,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으나 도로는 한산하였다. 비닐하우스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과수원이나 채소밭도 별로 없었다. 거의 논농사였던 것 같다.
신기한 것은 마을 한 복판에 납골당이 있는 것이었다. 도시의 한 쪽이나 아니면 어디든 납골당을 모아둔 곳이 있었다. 10여 년 전 케네디 공항에서 맨하탄으로 가는 길에 마을 한 쪽에 묘지가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했었는데 이곳 일본에는 그러한 큰 묘지가 아니라 우리네 마당 만한, 아니면 집 한 채 들어설 만한 터에 돌로 된 비석(그 안에는 유골이 있으리라)들이 뾰족뾰족 솟아 있는 그러한 묘터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산을 살펴보아도 산에 묘터가 보이지를 않았다. 15일간 일본을 다니면서 산에 있는 산소는 꼭 3기를 보았을 뿐이다. 그게 진짜 산소인지는 모르나 우리들 산소처럼 되어 있어서 그런가 하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나라처럼 넓은 들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거의가 산 속에 조그마한 분지에 농사를 짓는 듯하였다. 산이 우리보다 확실히 많은 듯하였는데 거기 나무가 아주 울창하였다. 우리나라도 이즈음에는 산에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으나 10여 년의 연륜밖에 되지를 않아서 큰 나무는 드문데 이곳에는 수 십 년씩 자란 나무들이 온통 숲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건너편 앞쪽에 앉은 가족인 듯한 세 사람이 무언가 내어 먹기 시작하였다. 어머니와 두 아들인 듯 하였는데 전형적인 일본인 모습으로 좀 왜소한 식구들이었다. 그런데 무어라 중얼거리듯이 계속 이야기하면서 셋이 번갈아 무언가 도시락 등을 내어 먹는데 김 초밥, 유부초밥, 조그마한 주먹밥, 캔 음료 등을 계속 내어 먹었다. 일본인이 적게 먹는다는 말은 거짓인 듯하였다. 그런데 먹고 난 찌꺼기 종이와 캔을 들고 나가드니 캔은 다시 들고 들어왔다. 이들의 분리 수거하는 것은 나중에도 계속 눈여겨보았지만 너무도 철저하였다. 아마 캔을 넣을 쓰레기통이 없었던가 보다하고 생각하였다.  나중에 내가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보니 일반 쓰레기 버리는 쓰레기통이 있고, 타는 것을 버리는 쓰레기통이 있었으나 캔을 넣는 쓰레기통이 이 객차에는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보통 객차에는 화장실, 세면실, 쓰레기통 등이 기본으로 있었다. 모든 승객은 자기 쓰레기를 자기가 가져다 쓰레기통에 넣으므로 객차 안에는 쓰레기가 하나도 없었다. 의자 앞에는 그물이 있었으나 JR을 선전하는 책자나 열차에서 살수 있는 물건들의 소개 팜플렛이 있을 정도이지 쓰레기는 전연 없었다. 15일 동안 신문을 보다가 둔 것이 한 두 개 보였을 뿐이었다.

두 시간쯤 지나 9시 10분 경에 드디어 나가사끼 역에 도착하였다. 도깨비 방망이 같은 JR패스를 보이고 그대로 개찰구를 통과하였다. 그런데 안내소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역 직원인 듯한 사람이면 붙들고 묻기를 여러 번 하여서 나가사끼의 지도도 구하고 구마모토 행 내일 아침 열차를 8시 30분에 지정석, 금연석으로 예약을 하게 되었다. 이 때에도 영어의 위력을 절실히 느꼈다. 먼저 영어로 시작하면 그들은 기가 죽어서 친절한 위에 더 친절하게 잘 해준다는 것을 알았다.
지도를 보니 일행과 약속을 해 둔 센츄리 호텔은 평화공원 쪽으로 10분쯤 걸어가면 될 듯하였다. (전차 역으로 3 정거장이었다.) 그래서 나가사끼 시가를 구경도 할 겸 걷기로 하였다. 육교를 건너 (이 육교 위에서 나가사끼에 왔다는 증명 사진을 찍고) 한참을 걸어갔다. 나가사끼는 길쭉한 도시여서 길게 전차 길이 도로의 한 가운데에 왕복으로 나 있고, 그 양쪽에 편도 3차선의 자동차 도로가 있는 이 도로가 가장 기간 도로인 듯하였다.
걸어서 도착한 센츄리 호텔에는 오전인데도 방이 없다고 하였다. 마침 옆 호텔에서 온 사람이 자기 호텔에 가자고 하여 이분의 차를 타고 3분쯤 가서 New Urakami Hotel에 묵게 되었다. (트윈룸 2인 조식 포함 8000엔) 우선 기분 좋게 샤워부터 하고 나서 관광에 나서기로 하였다.

(4)원자폭탄 투하 지점을 찾아서
  
이제 샤워도 하고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니 빨리 나가사끼에서 볼만한 곳을 찾아 나서고 싶었다. 물론 제일 목표로 하고 있는 곳은 원폭 투하 지점이었다. 프론트에 있는 두 할아버지(이 두 노인네는 칠순은 되어 보임직 한데 아주 친절하게 손님을 대하고 있었다.)에게 물으니 아주 자세하게 지도를 놓고 설명을 해주었다.
내가 묵게되는 호텔은 큰 도로에서 한 블록 들어온 곳에 위치해 있으므로 바로 큰 도로로 나와서 곧장 나아가면 될듯하였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아서 한 10분 걸어가니 언덕길로 안내가 되어 있었다. 언덕길을 오르니 여러 가지 조형물을 만들어 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서 아래로 계단을 따라 내려오니 원폭 자료관이 있었다. 입구에는 일본 사람들이 기원할 때에 많이 만드는 종이 학이 주렁주렁 늘려 있었다.
자료관 입구에는 자동 매표기가 마련되어 있어서 200엔 짜리 두 장을 사기 위하여 500엔 동전을 넣었더니 100엔 거스름이 나왔다.  그런데 표가 나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그렇지 않아도 일본인들에게 400엔을 보태어준다고 기분이 나빠 있는 판에 400엔을 기계에게 빼앗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입구에서 표를 받는 아가씨 둘이 있기에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그 자리에서 표 두 장을 만들어 주었다.  내 불순한 의도(?)를 기계도 아는지 입장권을 주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에 들어가 보니 내 짐작이 맞았다. 원폭 투하 후에 당한 수많은 사람(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을 기해 약 75,000명이 사망했다고 함)의 참상을 사진으로 찍어서 전시를 해 두었었고, 그 당시에 현장에 있던 여러 가지 유물들을 모아 두었었다. 예를 들면 그 때 어느 초등학교의 나무 계단이라든지, 성당(원폭이 떨어진 우라까미성당)의 마리아상의 목이 돌아간 모습이라든지 등등 원자폭탄의 열기에 녹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랬다. 분명 그들이 당한 비극을 보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자꾸만 이를 보면서 그들이 저지른 비극은 덮어두려고 하는 것에 분이 올라와서 참느라 애를 먹었다. 내가 씩씩거리며 입에서 무언가 말이 나오려고 할 때마다 아내는 나를 말렸다. 2차 대전을 일으킨 가해자인 그들이 마치 피해자인양 그들의 피해상황만 이렇게 거창하게 전시를 하고 있다는 것이 내 치를 떨게 하였다. 며칠 전 어느 사이버 공간에 실린 ‘7일간의 중국여행’이란 글에서도 그들이 중국인을 굴에 가두고서 물을 조금씩 넣어 수많은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이야기가 있는데, 독립기념관에만 가 보아도 그들의 잔학상을 얼마든지 알 수 있거늘.
하여튼 한 쪽에는 비디오로 참상을 보여주기도 하였고, 원자탄의 모형을 전시하기도 하였으며 현재 각 국의 원자무기를 비교하는 도표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한쪽에는 식당도 있어서 그들의 상술을 알 수 있었다. 입구에는 옛날 우리나라의 사구려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100엔에 팔고 많은 사람들이 사먹고 하였다.(보통 아이스크림은 300엔이 넘었다.)
이제 원폭 투하지점에 가고자 한 사람에게 물으니 도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한참 가서 내려가라고 하였는데, 이 사람이 잘 못 가르쳐준 것이었다. 바로 내려가면 될 것을 우리는 한참을 가서 내려가서 다시 돌아왔다.
거기 원폭 투하지점은 제법 너른 광장이었는데 비석을 세우고 동심원을 그려서 그 자리가 투하지점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게 해두었었다. 그 옆에는 옛 우라까미성당의 잔해도 남아 있었다. 여기에 왔다는 증명 사진을 찍고 나서 둘러보았다. 역시 조각품이 몇 개 주위에 있었다. 평화를 기원하는 조각이라고 하나 내게는 아이러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서 평화 공원으로 향하였다. 한 5분쯤 거리에 공원이 있었는데 이 때쯤 우리 부부는 시장하기도 하였지만 피곤하고 덥기도 하여 어딘가에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도 계단을 올라가서 평화공원에 이르렀다. 근육질의 남자가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커다란 조형물 아래에는 물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곳곳에는 조형물들이 있고 그들 나름대로 평화를 기원한다면서 종이 학을 수없이 접어서 걸어두었다..
어떤 노 부부가 파는 아이스크림을 200엔 주고 두 개를 사서 우리 부부도 벤치에 앉아 좀 쉬었다. 야자수도 있는 아늑한 공원이었지만 그만큼 사람도 붐비고 있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함께 평화를 기원하는 뜻에서 기증 받았다는 여러 조각품들을 보면서 가해자인 그들이 피해자로 변신하는 일본인들의 위선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영 나빴지만 우선은 배가 고파서 무얼 좀 먹을 궁리를 해야 하였다.

평화 공원에서 내려오며 음식점만을 살피었다. 무어 먹을 것은 없나 하고. 그러다가 결국 라면 집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보통은 가격을 먼저 알고 먹지만 설마 라면이 얼마 하랴 하는 마음에 흔히 많이 눈에 뜨이는 집이 라면 집이라 무작정 한 집으로 들어갔다.
거기 친절히 맞이하는 주인은 70은 되었음직한 할아버지 두 분이었다.  일본인답게 머리에는 수건을 동여매고 열심히 일하면서 손님에게 친절히 인사를 하였다. 우리 둘은 의자에 앉았다. 우리 옆에는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젊은이들이 역시 라면을 먹고 있었다. 무슨 라면을 먹을 것이냐고 묻는데 벽에 붙은 라면의 종류를 보니 대 여섯 가지는 됨직하다. 가격은 500엔부터 800엔까지 다양하다. 옆에 학생들이 먹는 것을 보고 그저 보통의 라면을 달라고 하니 알았다고 하면서 부지런히 만들었다.
우선 끓는 물에 라면을 넣었다.  그러더니 그것을 건져내어서는 그릇에 담아서 국물을 담고 거기에 삼겹살 같은 돼지고기를 3점쯤 넣어서 주었다. 나는 국물이 구수하였으나 아내는 먹기가 곤란한 모양이었다. 앞에 찾아보니 생강 같은 것이 빨갛게 물이 들여져서 있는데 조금 집어먹으니 조금은 느끼함을 줄일 수 있었으나 먹기가 역시 거북하였다. 아니 단무지도 주지 않고 채소라고는 없는 이런 라면을 어떻게 먹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잘 먹었고 아내는 억지로 시장기를 때운 모양이다. 500엔씩. 정말 비싸기는 하다.

옆의 학생들에게 다른 관광할 만한 곳을 물으니 지도를 보면서 ‘구라바엔’에 가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가는 방법은 전차를 타는 것이 가장 좋고 편도에 100엔이며, 1일 권이 500엔이라고 하였다. 그냥 동전을 주면 되고 표를 살 필요도 없다고 하였다.
전차를 타기 위해서 전차 역으로 갔다. 그런데 반대쪽에 서 있다가 전차가 와서 타려니 건너가라고 하였다. 이들은 차는 좌측으로 다니니 전차 역도 우리와는 다른 쪽에 있기 마련이었다. 다행히 전차는 자주 왔으므로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아마 2,3,분에 한 대씩 오는 것 같았다. 파란색 전차를 타라고 하여서 데지마로 가는 파란색 전차를 탔다.
우리가 아침에 걸어왔던 나가사끼 거리를 반대로 달려 나가사끼 역을 지나 전차는 훨씬 더 나아갔다. 우리는 데지마 근처에서 내렸다. 여기가 나가사끼 항구 쪽이었다. 거리에는 무슨 행사를 한다고 조그마한 깃발이 가로등에 꽂혀 있었다. 더구나 무료라고 씌어 있어서 올 때에는 이곳도 구경을 하기로 하고 우선 오란다자까(オランダ坂:네델란드언덕)쪽으로 갔다. 이곳은 일본이 개화를 하면서 제일 먼저 외국인들(네델란드인)이 살던 곳으로 서양식 건물이 눈에 뜨이기 시작하였다.
이곳을 구경하면서 지나가는데 아마도 중국인 같은 일단의 관광객들이 떼를 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아내는 자꾸만 그들 뒤를 따라가면 된다고 따라가자고 하였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라고 여기고 그들을 따라가니 여행 안내 책자에 있는 공자묘에 이르렀다. 온통 붉은 색으로 칠을 한 중국식 건물이었는데 이제는 박물관으로 되어 있었다. 입장료가 무려 500엔이나 하였다.  아니 내가 뭐 그들의 유물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여 밖에서 사진이나 한 컷 찍고 말았다. 물론 중국 관광객들은 모두가 그 비싼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그냥 구라바엔을 물어서 길을 나아갔다. 갑자기 양쪽으로 기념품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고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하였다. 옳다구나 오기는 바로 온 모양이었다. 이상하게도 이곳에서는 카스테라를 많이 팔고 있었다. 카스테라를 조그맣게 잘라서 점포 입구에 내어놓아 맛을 보게 하였는데 먹어보니 우리나라 카스테라나 그게 그거였지만 이들은 예쁘게 포장하여 엄청난 값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가사끼에서 유명하다는 짬뽕은 2000엔 하는 곳도 있고, 2500엔 하는 곳도 있고, 조그마한 중간 정도의 수박이 2500엔이었으니 무엇을 산다는 것은 엄두를 못 낼 지경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천천히 아픈 다리를 끌면서 구경을 하며 지나갔다.  특히 유리 제품을 전시 판매하는 곳에는 너무도 예쁘고 비싼 유리 제품들이 너른 상점에 가득히 전시되어 있어서 한동안 구경을 하였다.
조금 더 가니 중국인 상점이 있었는데 손님을 끌기 위하여 찻물을 차게하여 마시도록 해둔 곳이 있었다. 우리 부부는(물론 내 등에는 물이 있었지만) 거기에서 두 컵씩 무료로 찬물을 마시었다. 사실 이곳 일본에서는 이상하게도 물을 마실만한 곳이 전연 없었다. 나중에 내려오며 다시 마시려고 이 상점에 들렸더니 준비중이라고 적혀 있었다. 물론 마시지 못하였다.
이제 그 유명하다는 오우라성당에 당도하였다. 아니 이럴 수가. 성당에 들어가는데 입장료가 있다니. 그것도 500엔이나 하니. 이 곳도 생략하고 기념 사진만 찍고 돌아서 구라바엔으로 향하였다.


(5)오페라 나비부인의 흔적
  
오우라성당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길옆에 역시 카스테라나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쭉 이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가는 대로 따라가니 언덕을 올라 구라바엔의 입구에 다다랐다. 입장료가 무려 600엔. 좀 비싸다 싶었으나 공자묘, 오우라성당을 그냥 지나쳐 왔으므로 이곳에는 들어가기로 하였다.
우선 이곳을 알기 위해서는 일본의 근대사를 알아야 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본 역사를 제대로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나로서는 단편적인 지식으로 겨우 겨우 이해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17세기까지 일본으로 서양나라(특히 네덜란드)의 상인들이 와서 조금씩 무역을 하게 되어 그들이 가져온 화승총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후 1639년 이후 막부 정권은 이들의 내항을 금지시켰다. 단지 이 나가사끼에 인공 섬인 데지마(手島)를 만들어 십 여 채의 집에 네덜란드인들이 살게 하고 1년에 한 차례만 네덜란드 상선이 들어오도록 하였으니 이들이 오는 날 이 데지마와 나가사끼와의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통로를 통하여 무역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우리와 같이 쇄국정책을 폈다고 하여도 조그마한 숨통은 틔어두었던 것이다. 또 뜻 있는 일본 학자들은 이날을 기하여 이 데지마를 통하여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으니 나중에 1868년 일본의 개국과 메이지 유신 때에 이들 학자들이 큰 공로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개항과 더불어 나가사끼는 일본 무역의 중심지가 되고 이 데지마를 중심으로 오란다자까등에 서양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고 무역도 활발하게 되었다. 막부정권과 왕당파가 싸우게 되었을 때에 네덜란드인 토머스 글로버(Thomas Glover)는 왕당파에게 신무기를 팔아서 공도 세우고 돈도 많이 벌었던 것이다. 이 때에 전투가 가장 치열하였던 도꾜의 우에노는 거의 파괴가 되어 이곳을 공원으로 만드니 바로 우에노 공원이다. 신무기로 무장한 왕당파가 이겨 메이지  유신이 이루어지고 글로버는 많은 돈을 벌고 네덜란드를 비롯한 서양인들이 이곳에 집을 짓고 많이 살면서 일본 여인들과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리며 살았는데 이 집들이 모여 있던 곳에 공원을 꾸미니 바로 구라바엔인 것이다. 그 때에 그 일본 여인들 중에 가장 유명한 여인이 미우라 다마끼란 여인으로 바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모델이 된 여인이다.
구라바엔에는 서양인들의 집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서 그 때의 서양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해 두었었다. 특히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미쯔비시 제2도크하우스 란 집의 이층에는 옛날의 데지마의 모형도 만들어 두었었다. 또, 그 당시의 선원들의 생활상과 배의 모형, 사진, 그림들을 전시하였다. 우리나라의 민속촌과 같이 그 때의 서양 집들이 그 외에도 10여 채가 잘 보존되어 있어서 구경을 하고 돌아왔다. 길가에는 나비부인의 모델이 되었다는 미우라 다마끼와 토마스 글로버의 동상도 있었고, 집 안에도 그 당시 서양인들의 생활을 알 수 있는 물건들(탁자, 의자, 축음기, 책들, 집기류)과 사진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 구라바엔은 나가사끼항 근처에서는 가장 높은 곳으로 이곳에서 나가사끼 항을 내려다보니 건너편에 미쯔비시 중공업의 웅장한 공장 모습이 내려다 보였다. 그리고 저 멀리 깊숙하게 나가사끼 시가지가 보이고 양쪽으로는 산들이 막아있었다.  어떻게 보면 미국이 원자탄을 떨어뜨리는 도시로 나가사끼항을 정한 까닭을 알만할 것 같았다. 삼면이 산으로 막히고 한쪽은 바다로 되어 있어서 이곳에 원자탄을 떨어뜨리면 적어도 다른 도시로의 피해는 줄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은 아닐까. 더구나 군함이나 전쟁 물자를 만드는 미쯔비시 중공업이 있는 도시가 아닌가. 그러나 하필이면 실수로 라지만 성당 한복판에 원자탄을 떨어뜨린 것은 또 다른 아이러니라고 생각되었다.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구라바엔을 내려오니 나가사기전통예능관이 있었다. 넓은 강당 같은 곳에 전면의 스크린에는 나가사끼의 가장 유명한 마쯔리인 오꾼찌(おくんち)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픈 다리를 쉬면서 한참을 보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이 축제에서 사용하던 장식한 배며 용 같은 것들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었다.

이제 구라바엔을 떠나 바닷가로 갔다. 올 때에 무료로 보여준다던 데지마로 향하였다. 물론 옛날의 데지마는 없지만 그 근처 바닷가에 너른 터를 마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쉴 수 있도록 해두었었다. 그곳에 역시 전시장이 있어서 들어갔다. 그런데 한 곳은 무료이고 한 곳은 300엔을 내라고 되어 있었다. 우선 무료 전시장에 들어가 보니 아무 것도 없고 의자만 있었다. 역시 전통 민속놀이 등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돌아 나오니 유료 전시장에는 입구에 아가씨가 돈을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도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손해볼 것은 없다는 마음으로 가서 이야기를 걸었다. 도로에서 보니 무료라고 씌어 있어서 왔는데 돈을 받으니 이상하다. 그랬더니 그 아가씨 한 참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냥 들어 가랜다. 그래, 우리 부부는 유유히 돈도 안내고 들어갔다. 조금 전 구라바엔에서 본 것과 같은 그러한 배며 용이며, 기타 일본의 많은 전통 의상, 음식의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민속 박물관과 같은 곳이었는데 특이한 것은 통로를 굵은 통 대나무로 만들어두었는데 역시 일본은 대나무가 흔한 나라인 듯하였다. 조금 전에 구라바엔에서 보았기 때문에 흥미는 반감하였으나 훨씬 더 크고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이제 저녁때가 되어오니 사람들이 이곳 데지마로 오기 시작하였다. 옆으로 많은 음식점들도 있고 유흥가인 듯하였다. 우리는 서둘러 호텔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후쿠오카에서 헤어진 일행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은 역시 전차를 탔다. 나가사끼 역을 지나 3번째 역을 지나려는데 센츄리 호텔 입구에 우리 일행이 있는 것을 아내가 발견하고 빨리 내리자고 하여 함께 내렸다. 호텔 프론트에 가니 역시 우리 일행이 반갑게 맞이하였다. 방이 없어서 새로 호텔을 정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우리 호텔 사람이 와서 우리를 데리고 갈 때와 같이 우리 일행도 데리고 갔다. 어른 5명, 아이 5명이 방 두 개를 얻어서 남자는 남자끼리 자고 여자는 여자끼리 자기로 하는 듯하였다. 우리 두 부부가 너른 방을 하나 차지하여서 좀 미안하였지만 아내는 나중에 아이들을 좀 맡아주기로 하면 된다고 하였다. 우리가 샤워를 하는 동안 그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데지마로 간다고 나갔다.
샤워 후에 아무래도 과일이 먹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일본에 와서 채소와 과일을 너무 못 먹은 탓에 이상하게도 과일이 먹고 싶었다. 아내와 저녁도 먹고 과일도 사려고 호텔을 나섰다. 프론트의 노인에게 과일을 사러 가겠다고 하니 호텔 가까이에 편의점이 있다고 일부러 호텔을 나와서 한 구역까지 나와서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그 노인네가 가르쳐 준대로 가니 역시 편의점이 있었다.
그냥 저녁 먹을만한 곳을 찾아 어두운 밤거리를 걸어 나아갔다. 주위를 잘 살피면서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한 골목에 이르니 다꼬야께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 아주머니가 만드는 모양이 너무도 재미가 있었다. 나중에 일본을 돌아보니 이 다꼬야께라는 것이 눈에 많이 띄었으나 이 때에는 처음 보아서 더욱 신기하였다. 우리나라의 옛날 국화빵과 비슷하지만 속으로는 조그마한 문어조각을 넣는 것이 다르고 굴리면서 만들기 때문에 동그랗게 되는 것이 달랐다. 철사 같은 기구를 두 손에 쥐고 아주 재빠르게 굴리면서 연신 두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만드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한참을 보다가 가격을 물으니 한 상자에 350엔 한다고 하였다. 한 상자를 샀다. 조그마한 것이 12개 들어갔는데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시커먼 이상한 소스를 발라서 주었다.
그리고는 길가의 어떤 식당에 들어가서 짬뽕과 기무찌쨔한이라는 것을 시켜서 먹었다. 짬뽕은 나가사끼에서 유명하다고 하여 일부러 내가 시켰고, 기무찌쨔한이라는 것은 김치비빔밥이라고 주인아주머니가 설명을 하기에 아내가 시켰다. 각각 500엔과 580엔이었는데 아주머니가 우리 마음을 아는지 음식을 내어오면서 빈 그릇 두 개를 주어서 우리는 각각 다 맛을 보았다. 짬뽕은 우리나라 것보다는 맛이 있고 채소도 제법 들어 있어서 나는 먹을 만 하였다. 한이라는 것은 반(飯)의 일본식 발음으로 김치가 들어간 볶음밥과 같은 것이었는데 실제 김치가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를 모를 정도로 흉내만 내었지만 김치 맛은 났다. 식당은 흐름한 집이었지만 너무도 깨끗하고 아주머니도 아주 친절한 그러한 식당이었었다.
돌아오면서 편의점에 들렸더니 볼품 없는 조그마한 사과 1개에 125엔, 수박 조각 조그마한 게 280엔이나 하니 도저히 살수가 없었다. 과일 주스를 158엔에 샀다. 역시 이곳 사람들도 계산을 잘 못하는 모양이었다. 160엔을 주었더니 한참을 생각을 하고 계산을 하고 곤란을 겪은 다음에야 내 말을 듣고 2엔을 내어주었다. 그리고도 좀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호텔에 돌아와서 쉬면서 가져간 팩 소주와 다꼬야께을 먹으며 아내와 이야기를 나눈 것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이곳 일본인 노인네들의 생활이었다. 후쿠오카에서 강지점장의 부인도 그 이야기를 하였지만 이곳 일본의 노인네들은 절대로 젊은 사람들에게 의지하면서 허송세월을 하며 보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살면서 봉사활동도 많이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젊은이들보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그들의 삶을 보람 있게 산다는 것이었다.
라면 집에서 두 할아버지가 땀을 흘리면서 친절하게 음식을 내어오고 계산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또 이 호텔의 두 할아버지의 친절하면서도 자기 일에 충실한 모습이 떠올랐다. 심지어 평화 공원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던 두 노인 부부의 바삐 움직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젊어서 번 돈을 자식에게 다 물려주고 늙어서 자식들에게 구박을 받으면서 사는 한국 노인네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노인네들이 늙은이는 법규나 사회 규범을 무시해도 된다는 사고를 가지고 신호등이나 교통규칙은 전혀 무시하면서 교통순경을 나무라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도 항상 젊은이들의 대접만 받고자 하는 우리나라 노인네들과는 비교가 되지를 않았다. 길거리나 기차역에는 간혹 배낭을 맨 노인네들이 눈에 띄었는데 그들의 활기찬 노후 생활을 보는 듯하였다.
밤중에 잠이 들었는데 불꽃놀이 소리에 깨었다. 구라바엔에서는 밤에 불꽃놀이도 한다고 팜플렛에 적혀 있었는데 그 소리인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바로 아래에서 들리는 것이 아닌가. 동네 불량배의 소행인 듯 하기도 하였으나 일본에도 이렇게 남의 잠을 설치게 하는 나쁜 무리가 있나 하고 의아해하였다.

(6)구마모토 성에서 만난 노인
  
8월 15일 화요일. 아침 7시에 호텔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들이 말하는 일본식 음식(和食)이었는데 아주 정갈하고 무엇보다도 밥이 우리네 밥과 같아서 너무도 반가웠다. 생선도 있고 나물도 있고 국도 있었다. 물론 된장국이 우리네와는 다르지만 먹을만하였다. 네모난 조그마한 쟁반(お盆:おぼん)에 담아 내어오는 음식을 그대로 밥과 반찬을 다 먹으니 그게 딱 맞았다. 즉, 남는 반찬이 안 생기게 주었다.
방에 돌아와서 짐을 챙기고 출발 준비를 하였다. 서 실장 님 부인이 깨었으므로 우리 방을 남은 시간이나마 편안하게 쉬도록 내어주고 우리 부부는 또 구마모토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규슈의 한 가운데에 있는 중심도시로 그 유명한 가토오기요마사(加藤淸正)가 쌓았다는 구마모토 성을 보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분명히 밝힐 것은 우리 호텔에서 나가사끼 역까지는 전차로 다섯 정거장이나 되므로 20여분이 걸린다. 그래서 나는 전차를 100엔씩 주고 타고 가기를 희망하였으나 걸어가자고 한 것은 아내였다. 나는 물론 걷는 데는 취미가 붙은 사람이라 좋다고 걸어가기로 하였다.(지금도 후회한다. 이렇게 무리하게 걷는 것이 아닌데) 일본에 도착한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 부부는 아직도 신기한 나가사끼의 아침거리를 부지런히 걸어갔다.
조그마한 빈터만 있으면 쓰레기가 쌓여있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이곳에는 그러한 곳이 있기만 하면 무언가 귀신을 섬기는 곳을 만들어 두었었다. 조그마한 빈터에 돌로 된 사람모형이 몇 개 있고, 그 돌 인형에 헝겊으로 웃옷을 한 개씩만 해 입히고, 그리고는 종이 학이라든지 온갖 것으로 치장을 주렁주렁해놓은 그러한 신을 모신 곳이 보여서 사진을 찍고 나가사끼 역으로 향해 부지런히 걸어갔다.

나가사끼에서 도스까지 1시간 25분, 도스에서 갈아타고 구마모토까지 1시간 정도 걸려서 11시 10분 경에 구마모토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정석을 예약해두었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도 없었고, 알맞게 도스 역에서 갈아탈 수도 있었다. 모두가 특급열차여서, 빨리 달리고 편안한 그러한 열차였다.  농촌을 지날 때에는 우리와는 다르지만 간혹 초가집도 보였고, 동네에는 납골당도 보였다. 열차가 서고 새로 손님이 들어와 앉으면, 차장이 와서는 공손하게 표를 검사하고 좌석을 확인하였다. 손님이 다른 곳으로 갈 일이 있으면 열차 안에서도 표를 발매하였는데 보통 만엔 짜리가 몇 장씩 오가는 것을 보면 기차 요금은 굉장히 비싼 편인 모양이었다.
구마모토 역에 도착하자마자 내일 아소산에 오를 계획이므로 아소까지 기차표를 예매하였다. 또, 안내소(information center)에 가서 지도를 구하고 호텔을 확인하였다. 일행은 홋께구라부호텔(法華クラブホテル)에서 만나기로 하였었다. 지도를 보니 강둑을 따라 15분 거리에 있었다.
아내와 나는 뜨거운 여름 햇살을 받으면서 강둑을 걸어갔다. 강둑에는 자전거도로가 잘 닦여져 있어서 간혹 자전거가 지나가고 물도 별로 없는 강에 낚시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 건너편에는 높은 빌딩도 간혹 보이고, 이쪽 둑의 아래에는 도로에 차들이 달리는 그러한 곳을 걸어갔다.
호텔은 바로 찾을 수 있었다. 호텔 프론트의 두 아가씨는 그렇게 친절하지는 않았으나 방이 정하여지자 짐을 맡아주었다. 그들의 안내로 지도를 보고 구마모토 성을 찾아 나섰다.
호텔에서 구마모토성 입구까지는 15분 정도의 거리였지만 중간에 지하 상가가 있어서 우리 부부는 이 상가도 구경을 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큰 도시에는 어디나 지하 상가가 있고, 이것이 우리처럼 길쭉한 지하 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널찍하게 상가를 만들어서 그야말로 모든 종류의 상품을 파는 대형 시장이 되어 있었다.
식당도 여럿이 있었으나 초밥 도시락을 샀다. 둘이서 먹을 수 있을 만큼 좀 큰 도시락을 1,080엔에 샀는데 세금을 따로 계산하여서 밖에 진열된 것보다는 좀 더 받았다. 그런데 진열된 것을 주지 않고 새로 초밥을 만들어주어서 아주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근처의 다른 상점에서 과일을 사려고 하였으나 너무 비싸서 할 수 없이 사과 1개를 200엔에 사서 이것으로 점심을 때우기로 하였다.

지하 상가를 나와서 조금 걸으니 저 쪽에 구마모토 성이 보였다. 시내에서 바라보고 사진을 한 컷 찍으려니 글쎄 카메라가 없다. 배낭에 넣어두고 호텔에 맡긴 모양이다. 날은 덥고 터덜터덜 걸어서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가 다시 이곳까지 오는데는 아무리 시가 구경도 좋다지만 좀 짜증나는 일이었다. 그래도 힘을 내어 구마모토 성으로 다가갔다.  여행 안내 책자에 있는 것과 같은 가토오기요마사의 동상이 바로 해자 앞에 요상한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여기서 요상한 모습이라고 한 것은 이 동상을 보는 사람은 모두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안내 책자에도 장화를 뒤집어 쓴 것 같은 모습이라고 하였지만 꼭 옛날 상주가 쓰는 좀 긴 두건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쭈그려 앉은 모습이 좀 이상하게 보인 것은 틀림없었다.
해자를 지나 좀 넓은 길을 올라가는데 입구를 알 수가 없다. 관광버스도 올라가기에 그대로 따라 가다가 물어서 성문에 다다랐다. 입장료는 500엔. 입구에는 안내 책자에 있는 대로 한 아르바이트생이 옛날 군복을 입고 창을 들고 장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성은 우리와는 개념이 다르고 내 생각에는 서양의 성과 같을 거라는 생각을 하였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는 성이라면 성벽과 같은 개념이다. 즉, 길게 성벽을 쌓아 경계를 넓게 삼는데, 사진에서 종종 보는 서양의 성과 같이 일본은 좁은 면적에 높은 누각을 지어놓았다. 아마도 우리나라와 중국은 나라와 나라가 대결하는 전쟁이 많아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반면, 일본이나 서양은 제후들끼리 싸우는 소규모 전투가 많아서 작은 규모의 성이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고 혼자 생각을 하였다. 성벽도 우리나라는 거의 수직으로 쌓는데 이들은 비스듬히 쌓았다. 우리보다는 큰돌로 쌓았는데 축성술은 제법 훌륭한 듯하였고, 많이 망실되어 요즈음에 쌓은 부분이 많았고, 또 지금도 복원 공사를 하는 곳도 있었다.  그런데 그 돌이 검고 좀 특이한 돌이었다.
좀 시장하였으므로 들어가자마자 점심을 먹을만한 곳을 찾았다.  그야말로 그늘 좋고, 반석 좋은 곳을 찾아 한쪽 성벽 으슥한 곳에 자리를 잡은 우리 부부는 가져온 초밥 도시락과 사과를 먹었다.  그런데 잠깐 동안에 웬 무는 것이 많아서 반소매 반바지 차림인 우리 둘은 여러 군데 물려서 온통 벌겋게 살이 부풀어올라 허겁지겁 점심을 먹고 일어섰다. 모기는 아닌 듯하였는데 보이지도 않고 잠깐 동안에 살이 부풀어올랐었다. 더구나 200엔이나 주고 산 사과가 속이 좀 썩어서 더 기분을 잡치게 되었다.
이제 성을 둘러보려고 하니 오늘 따라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그런데 단체로 여행을 온 여행객에게는 안내자가 있어서 우리 두 부부도 이들 틈에 끼어서 설명도 좀 듣고 하였다. 한국 사람들의 안내자는 한국말로 하니 알아들을 수도 있었으나 설명이 너무 단순해서 안내 책자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일본 여행객의 안내자는 자세히 설명을 하기는 하였으나 알아듣기가 좀 거북하여 결국 우리 둘이 둘러보는 수밖에 없었다.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성이지만 우물이 여러 곳 있었는데 역시 물이 있어야 군사들이 주둔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 외에는 저희들끼리 싸우면서 목을 자른 곳, 어떤 이의 동상 등을 일본 안내자가 길게 설명을 하였으나 나에게는 별로 관심도 없었다. 가장 높은 천수각(天守閣)에 오르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일본의 성은 대개 둘레에 해자를 팠고, 그 다음에 성벽을 쌓고, 그 가운데에 5,6층의 높은 건물을 지어 이를 천수각이라고 하였다.
6층으로 된 천수각까지 오르는 도중에 각층마다 여러 가지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고, 어떤 층의 한 쪽에서는 두 사람이 사무라이 옷차림을 하고 그림 연극으로 그 때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었는데 어린이들이 10여명 앉아 듣고 있었다. 잠시 앉아서 쉴 겸 설명을 들었다. 거의 가토오기요마사의 일대기를 설명하고 있었다. 또 한 쪽에는 가토오기요마사의 일대기를 글과 그림으로 설명해 놓고 있었는데 도요도미히데요시에게 이 성을 쌓겠다는 허락을 얻어 쌓았고, 임진왜란 이후에도 돌아온 가토오기요마사가 더욱 출세를 하고 자식들의 축복 속에 숨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6층에 오르니 전망이 참으로 좋아서 구마모토 시를 한 눈에 돌아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성이 구마모토 시내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전시물 중에는 1935년 규슈에서 일어난 반란군 만 명이 이 성을 쳐들어 왔을 때에 정부군은 지원군이 올 때까지 52일 동안이나 버티어내면서 지켰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견고하고 시내 한 가운데에 높이 솟아서 적들의 동태를 훤히 알 수 있는 성에서 지키는 것이 수월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수각을 내려와서 옆에 있는 이보다 좀 낮은 우토로(宇土櫓)라는 곳으로 갔다. 이곳은 조금 떨어진 곳이라 관람객이 별로 없었다. 입구에는 노인이 기다리고 있다가 친절하게 비닐 주머니를 주었다. 구두를 담고 맨발로 오르라는 뜻이었다. 바닥이 깨끗한 마루로 되어 있었다. 여기는 유물은 없고 아마도 군사들이 주둔하던 방인 듯 한 곳이 많이 있었다. 꼭대기까지 오르는 동안 보수 공사를 하는 곳이 여러 군데 눈에 띄었다. 제일 꼭대기 층에 오르니 전망도 좋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마루라서 앉아서 좀 쉬기로 하였다.
여기도 한 노인이 앉아서 일행을 안내하고 있었다. 함께 앉아 쉬면서 말을 붙였더니 이 노인이 자신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나이가 75세이며 여기 자원봉사로 일을 하는데 하루에 5000엔씩 받고 있으며 맡은 역할을 매일 바꾼다고 하였다. 아주 건강해 보인다니까 자기 아내가 더 건강하다면서 자기는 30년 동안 야구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한국에 대해서는 아들의 친구가 서울에 있어서 두 번 다녀왔는데 그 아들친구 집에서 머물렀다고 하였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아주 친해져서 헤어질 때에는 각별하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나오는 출구에도 노인이 있어서 비닐을 접어서 상자에 넣도록 안내를 하고 있었는데 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너무도 가지런히 벗어두었으므로 우리도 그렇게 하였다. 이제 성을 나오다가 아내가 뒤로 돌아보고 나에게 손짓을 하였다. 아니, 아까 우토로의 그 노인이 저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지 않은가?  우리도 손을 흔들었다. 성벽을 돌아 나오는데 이제는 다른 쪽에서 또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내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이었다. 사람의 정이란 이상한 것이었다. 아내는 아마도 장인 어른을 떠올렸으리라. 우리가 손을 흔들면서 오다가 길을 잘못 들게되자, 방향을 바꾸라고 팔을 커다랗게 흔들다가 우리가 바른 길을 접어들게 되자 그제서야 아래위로 팔을 흔들어주었다. 우리는 고니시유끼나가(小西行長)의 흔적이 남아 있는 스이젠지쇼쥬엔으로 가기 위해 전차를 타러 간다는 것을 말해두었으므로 전차 역 쪽으로 가도록 팔을 흔들며 안내한 것이었다.

(7)신의 덕으로 사는 일본인들
  
전차를 타는 방법은 미리 책에서 읽고, 설명을 듣고 하여서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구마모토성에서 나와 스이젠지쇼쥬엔으로 가는 전차를 탄 순간 당황하였다. 세이리껜(整理券)이라는 것을 뽑아야 하는데 그걸 뽑지 않고 그냥 타버린 것이었다.(전차의 임구에 있는 상자에서 정리권이 삐죽이 내밀려 있어야 하는데 유독 이 전차는 아주 조금밖에 내어 밀지 않았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옆에 앉은 아줌마에게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 아줌마와 그 옆의 아줌마가 아주 친절을 발휘해서 다음 정류장에서 정리권 두 장을 뽑아 주었다.(문이 열리면 정리권이 내어 밀고, 문이 닫히면 다시 들어갔었다.) 그런데 잔돈이 없다고 하니 또 천 엔을 나에게서 받아가서는 앞 운전수석 뒤에 있는 상자에 천 엔을 넣으니 100엔 짜리 9개와 10엔 짜리 10개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다음 내리고 싶은 곳에서 내 정리권의 번호(예를 들어 9번이면 9)와 요금표와 대조해보고 그 요금을 내면 되는 것이었다. 운전수석 앞 위쪽에 있는 요금표는 차가 달림에 따라 요금이 조금씩 오르고 있었다. 즉, 자기가 가는 거리만큼 요금을 내는 것이었다.
우리 둘이 스이젠지쇼쥬엔에 간다는 것을 안 이 아줌마들과 운전수가 합세(?)하여 안전하게 우리 둘을 수이젠지쇼주엔역에 내려주었다. 그렇게 정신 없이 실수를 하는 동안 또 나는 카메라를 차에 두고 내리는 실수를 더 하여버렸다. 전차가 달리는가하더니 다시 서고는 아줌가가 ‘わすれもの:잃어버린 물건’하고 외치면서 카메라를 들고 전차문밖으로 내어 주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그렇게 하여 우여곡절 끝에 스이젠지쇼쥬엔(水前寺成趣園) 입구에 다다랐다. 짧은 거리지만 양쪽에는 상가가 있었고, 입구에는 전형적인 천(天)자 모양의 조형물이 있고, 입장료를 400엔이나 받았다.
들어서자 입구에서부터 신사가 있고, 사진에서 보던 정원이 나타났다. 사진에는 그럴듯하였지만 실제로 보니 그저 연못이 조그마한 것이 있고, 잉어가 노닐고, 오리 몇 마리가 있는 것이 전부였다. 조그마한 언덕이 하나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게 부사산을 본떴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니 또 신사가 있었다. 이름하여 출수신사(出水神社). 보통 신사마다 물을 마시도록 대나무로 국자를 여럿 만들어 두었고 대나무 대롱에서 물이 나왔는데 우리도 목마른 김에 물부터 마셨다. 일인 아낙들이 하는 것을 보면 자기가 마신 국자를 깨끗이 씻어서 얌전하게 걸어두는 것이 아닌가. 다음에는 우리도 그렇게 하였다. 신사 앞에는 긴 줄이 있어서 이 줄을 당기면서 종을 치게 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이것을 치고 기도를 하였다. 앞에 돈을 담는 상자가 있었는데 동전 정도를 넣었다. 신사 안에는 사람의 형상은 없었으나 신사마다 다르지만 여러 가지 잡동사니 모시는 것들을 놓아두었었고, 옆에는 신자들의 이름을 적은 패가 많이 붙여져 있었는데 이것은 한 옆에서 팔고 있었다. 출수 신사이므로 물을 마시는 곳이 또 있었는데 장수 우물(長壽の水)이라고 하였다. 많이 마시면 오래 사는 모양이라 나도 많이 마셨다. 실은 목이 말랐으므로. 그런데 이 신사 앞 기둥에 씌어 있는 글이 바로 이들 일인들의 신앙심을 나타내는 것 같아서 여기에 옮겨 적어본다.

神は人の敬により威を增し
人は神の德により運を添し

신은 사람의 공경을 받아 위엄을 높이고
사람은 신의 은덕을 입어 운을 더한다.

그러니 (내 번역이 맞는지 잘 모르지만) 신을 잘 섬기라는 뜻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잘 사는가보다고 생각해보았다. 사실 이들의 신을 모시는 것은 대단해서 유적지마다 신사가 있고,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비싼 배관권(排觀券)을 사서 들어가서 참배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성당이나 절이나 신사에 들어가서 참배하기 위해서는 돈을 내고 표를 사야되었다.
조금 더 나아가니 또 신사가 하나 있었다. 그러니 이 조그마한 공원에만 신사가 3곳이나 되는 셈이다. (그런데, 스이젠지(水前寺)라는 절은 없었다.) 좀 더 나아가니 바로 고니시유끼나가(小西行長)의 동상이 보였다. 이들 집안의 정원이 개방된 것이 바로 이 공원이므로 고니시의 동상이 있는 것은 당연하였지만 나에게는 이상한 느낌으로 와 닿았다. 임진왜란 때에 그렇게도 악명을 떨쳤던 이들 고니시 유끼나가와 가토오 기요마사의 동상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이들 일인들이 추앙을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한 인물을 평함에 있어서 두 나라 국민이 갖는 마음이 이렇게도 다르다니. 우리나라에는 그렇게도 해를 입힌 악당이지만 일본인에게는 훌륭한 위인으로 비치어진다니 이상하였다.
공원을 한바퀴 도는 데에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원체 많이 걸은 우리 부부는 지쳐서 입구 쪽의 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한 떼의 한국 관광객이 들어서고 안내자가 설명을 하고 있었다. 아내와 이야기를 하다보니 광주에서 온 처녀 두 명이 반갑게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그 때에 한 부인이 내 옆 벤치에 앉자 그녀의 딸인 듯한 여자아이가 어리광을 부리면서 안기며 ‘엄마!’ 하고 불렀다. 일본 여자들의 왜소한 체격만 보다가 아마도 고등학생은 됨직한 커다란 아이가 엄마에게 안기는 것이 좀 신기하였다. ‘한국서 오셨어요?’ 내가 말을 걸었다. 서울에서 단체여행으로 왔는데 아소산 구경을 하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남편인 듯한 사내가 다가와서 자기들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내가 15일간의 일본 종주 여행을 계획하고 이제 시작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배낭여행보다는 패키지 여행이 훨씬 좋다는 것과, 자기들은 특급 호텔에서 자고 잘먹고 잘 구경한다는 투로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호주, 미국을 여행한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은 호텔비가 비싸다는 이야기를 하니 이 사람이 하는 말이 자기는 영국에서 오래 살았고, 호주, 미국은 물론 세계 여러 곳을 다녔고, 일본도 세 번째라고 하였다. 일본은 15일동안 볼 곳이 없고, 일본은 섬이 다섯 개로 되어 있는 나라인데 한 5일이면 다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냥 듣고만 있었는데, 이 사람이 신이 나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내일 내가 아소산에 갈 계획이라는 것을 안 이 사람, 아소산에는 산길이 아주 험하기 때문에 차를 타고 가면서 차멀미를 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아예 멀미약을 사 가지고 먹고 가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차멀미를 잘 하지 않는 자기도 귀밑에 붙이는 멀미약을 사서 붙였지만 멀미를 하였고, 식구들은 500엔을 주고 멀미약을 사서 모두 먹고 올라갔는데 멀미약을 먹지 않은 사람은 모두 토하더라고 하였다.
이야기를 들은 아내가 걱정을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저 사람 말은 좀 떨어버리고 들어야 된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일본이 다섯 개의 섬으로 되어 있다는 말을 들을 때부터 나는 이상하게 듣고 있었기 때문에 차 멀미약은 사지 않아도 될듯하였다. 그래도 속으로는 아소산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좀 걱정이 되기는 하였다. 허기는 석굴암에 올라가면서도 차에 타고 있던 사람의 반이 차멀미를 하였으나 나는 차멀미를 하지 않았는데 설마 이번에도 차멀미를 할까하고 자신감이 들었으나 아내가 어떨까 걱정이 되기는 하였다.
그 때에 놀랍게도 우리 일행이 이리로 온 것이 아닌가? 그들은 구마모토에 오자마자 성에도 가지 않고 바로 이곳으로 왔다고 하였다. 잠깐 쉬고 있는 동안 5시가 되자 정문을 닫아버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곳에는 5시가 넘으면 입장권을 사지 않아도 들어올 수 있을 듯하였다. 정문 옆의 샛문으로 나오니 입구의 상가도 거의 문을 닫아버린 후였다.
전차를 타기 전에 마침 슈퍼가 있어서 들어갔다. 그런데 저녁 좀 늦은 시간이라 김밥을 파는 코너에 가보니 반값으로 해둔 김밥도 있고 50엔을 인하한 김밥도 있었다. 두 가지를 사 가지고 호텔로 돌아가서 먹으려니 역시 반값으로 인하한 김밥은 먹기가 곤란했다. 좀 상하려는 듯하여서 버리고 다른 김밥만 먹었다. 여행 중에 혹시라도 건강에 이상이 있으면 곤란할 듯하여 음식에는 유의해야 하였으므로 다음부터는 절대로 값을 인하한 물건은 사지 않기로 하였다.

전차를 내려서 낮에 가보았던 지하 상가에 다시 들어갔다. 과일이나 채소를 사기 위해서였다. 일본인들은 과일과 채소를 먹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아내가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채소와 과일을 먹고 싶었다. 양배추와 홍당무를 샀다. 아내가 가져간 된장을 찍어서 먹으면 좋겠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수박이 2,500엔이나 하고 양배추는 조그마한 것이 1,000엔 혹은 2,000엔 하였다. 그 대신 쇠고기나 쌀은 가격이 한국보다 좀 싸다 고 아내가 말하였다.
호텔에 돌아오니 너무 피곤하였다. 오기 전부터 아내는 아이들 장가보내고 나중에 조용히 늙어서 여행을 하자고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이렇게 늙기 전에 온 것이 다행이다 고 말하였다. 둘 다 몹시 피곤하여 정신 없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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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5일간의 일본 종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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