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의창의 그림이야기

15일간의 일본 종주기 (3)
(15)기요미즈데라(淸水寺)
  
4시가 넘었으므로 우리가 여관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체크인 할 수가 있었다. 배낭은 이미 4층의 우리 방에 옮겨두었다고 하였다. 열쇠를 받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오르니 새로 지은 여관이라 모든 것이 깨끗하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현관이 있었는데 호텔과 달리 현관 쪽에 욕실이 있었으나 현관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또 새로이 장지문이 있었다. 그리고 현관 쪽에는 벽장이 있고, 위에는 여분의 침구가 있었고 아래쪽에는 흰  모래와 예쁜 돌로 바닷가를 연상할 수 있게 꾸며 놓고, 조명을 할 수 있게 해서 밤에 들어오는 사람을 배려해놓고 있었다. 욕실은 전의 호텔 욕실과 별로 다를 것이 없고 역시 일회용 면도기랑 세면도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장지문을 열고 들어서니 다다미방이 있었다. 창문 쪽은 천장이 높고 방바닥도 더 넓게 되어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이 나무를 사용하여 지어져 있었다. 바닥의 다다미는 방바닥 모양에 꼭 맞게 깔아져 있어서 빈틈이 없었다. 창 쪽에는 냉장고와 탁자가 있었는데 탁자 위에는 안내문과 여관 소개가 있었다. 일본의 호텔이나 여관에는 오유(お湯:おゆ)라고 하여 뜨거운 물을 내어놓거나 끓일 수 있는 포트를 마련해두는데 그 옆에 차를 준비해둔다. 그런데 이곳에는 봉지 차가 아니고 가루 차를 준비해두었다. 즉, 좀더 고급인 것이다.
다다미 위에는 아주 두꺼운 요를 깔고 그 위에 역시 두터운 이불을 준비해두었다. 한쪽에는 유카타(浴衣:ゆかた)인 듯한 잠옷이 여느 호텔과 같이 가지런히 두벌 준비되어 있었다.

더위에 지친 몸을 샤워로 풀고 시원하게 에어컨을 켠 후에 우리 부부는 우선 여관방에서 좀 쉬었다. 지도를 보면서 기요미즈데라로 갈 것을 연구해보니 전철을 타고 가서 걷기도 힘들듯하고 걸어가기도 힘들듯하였다. 할 수 없이 내려와서 프론트에 가서 의논을 하니 버스를 타는 것이 가장 좋다면서 버스 타는 곳과 번호를 가르쳐주며 6시에 문을 닫으니 서두르라고 하였다.
프론트에서 일러준 대로 역 앞에 있는 버스 승강장으로 가서 206번 버스를 타고, 내리는 곳을 물어서 기요미즈데라 가까운 정류소에서 내리니 220엔이 나왔다. 시각은 거의 5시 40분 가까이 되어서 오르막길을 10여분 허겁지겁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빠른 걸음으로 많이 들 걷고 있었다. 오르는 길의 양측에는 기념품 가게도 많이 있었는데 올라갈 때에는 거들떠볼 생각을 못하고 그냥 올라갔다.
입구에 다다른 것은 6시 10분전. 가까스로 입장을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거기 씌어진 시각을 보니 6시 30분까지로 되어 있어서 우리가 늦을까봐 30분 연장하는구나 하고 아내와 농담을 하였다. 하여튼 입구의 계단에서 이 절의 산쥬노또(三重塔)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서울에서 왔다는 아가씨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곳의 산쥬노또는 단청이 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하였으나 그 단청이 온통 붉은 색으로만 칠해져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다양한 무늬와 다양한 색깔의 단청과는 거리가 멀었다.
본당에는 이상하게 생긴 부처도 있었으나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거기 입장권을 파는 할아버지가 자꾸만 권한다. 이제 문을 닫는 시간이 다 되었으니 빨리 표를 사서 들어가란다. 어쩔 수 없이 거금 300엔씩 주고 표를 사서 들어갔다. 나올 때에는 이 문을 닫으니 뒤쪽 산길을 돌아 내려오라고 안내를 하였다. 안쪽으로는 또 신사도 있었는데 이름하여 지주신사(地主神社).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자랑하는 팜플렛을 주었다. 거기 신사에서도 관음보살과 함께 지장보살을 크게 섬기고 있었다. 종이가 아니라 플라스틱으로 만든 커다란 등이 많이 걸려 있었는데 거기 ‘水かけ地藏さま’라고 씌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절 뒤쪽 산등성이에 나무를 심는데 시주를 하는 사람의 이름을 나무마다 패찰을 달아주고 있어서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시주를 받는 방법을 많이 연구하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다른 곳과 달리 1.5m쯤 되는 긴 국자로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 마시는 샘이 있어서 나도 받아 마셨다. 돌로 지은 벼랑 끝의 집 처마 세 곳에서 물이 흘러 내려와서 떨어지는데, 그것을 긴 국자로 받아 마시니 좀 독특하였다. 안내 책자에는 물을 받는 데에도 돈을 주어야한다고 하였으나 그렇지는 않았고, 중국 관광객들이 소란을 많이 피우면서 즐겁게 물을 받아 마시고 있었다. 조금 더 돌아오니 좀 전의 본당들이 산 벼랑에 버팀목을 대어서 겨우 겨우 지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돌기둥을 깎아서 버티어 둔 곳도 있었고, 나무로 버틴 곳도 있었다. 너무나 아슬아슬하게 지어져 있어서 ‘기요미즈데라의 난간 넘기’라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로 위험한 난간이라는 소개가 안내 책자에 있었다.
기요미즈데라의 입구에서 버스 정류장까지의 길을 니넨자까, 산넨자까라고 하는데 올라갈 때에는 입구의 문을 닫을까 걱정이 되어서 바쁘게 올라가느라 그냥 지나가 버렸는데 이번에는 토산품 점을 구경을 하면서 내려왔다. 많은 점포가 문을 닫아버렸지만 그래도 몇 개의 점포를 구경할 수 있었는데 넥타이에 일본 전통무희의 그림을 그린 것, 차 그릇들, 자기로 만든 인형을 크기별로 일렬로 세워놓은 것들이 특히 인상에 남았다.
내려오는 길에는 다른 절도 좀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큰절에 들어가 보려고 하였더니 벌써 입구에 문을 닫아버려서 기웃거려 구경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는 아무리 밤이 되어도 절의 문을 닫는 일은 없는데(내가 아는 한) 이곳에는 모든 절이 시각을 정해놓고 문을 닫는 모양이었다. 이 절의 입구에 있는 커다란 야자수 나무는 인상적이었다.

돌아와서는 역 앞의 시가지도 좀 둘러보고, 지하 상가도 둘러보았다. 역시 지하 상가에서 저녁을 사먹었다.
여관에 돌아와서 집으로 전화를 하려고 하여도 잘 되지 않았다. 앞에서도 쓴 일이 있지만 보통 전화기와 IC전화기가 있는데 모두 잘 되지를 않았다. 프론트에서 IC카드를 사서 전화를 하라고 하여 1,000엔을 주고 하나 샀다. 이것은 전화기에 꼽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전화기의 놓는 곳에 놓고 전화를 걸도록 되어 있었다. 1,000엔을 주고 샀는데 액정 모니터에는 100으로 나타나고 나중에 이 숫자가 10이하로 내려가니 국내통화는 되지만 국제 통화는 되지를 않았다. 즉, 11,000원쯤 주고 샀는데 1,000원 어치는 그냥 날리게 되는 셈이다. 하여튼 이 때에는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서 잘려니 에어컨이 너무 찼다. 두터운 이불을 덮어썼는데도 좀 얼굴이 찬 듯하여 보니 19도로 조정이 되어 있다. 온도를 좀 올려야지 하면서도 그냥 잠결에 자버렸다. 지금 이러한 일들이 여행에서 위험요소로 작용하게 될 줄은 이 때에는 미쳐 몰랐었다. 이날 밤 너무 차게 자는 것이 아닌데. 지금도 이 때의 일을 후회한다. 여행기간에는 조그마한 일이라도 건강에 해로운 일이 없도록 세심한 주의를 해야하는 건데.

(16)나라(奈良) 공원
  
8월 19일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루 교토에 더 머물기로 하고 배낭을 여관방에 그대로 둔 채 프론트에 내려가서 만 엔을 더 주었다. 그러고 보니 세금 500엔을 깎은 셈이 되었다.
교토 역에 가서 삿포로로 가는 열차 표를 예약하였다. 신칸센을 타고 도쿄로, 도쿄에서 신칸센을 타고 모리오카까지, 모리오카에서 특급으로 삿포로까지 갈 계획이었으나 아무래도 무리인 듯하였다. 삿포로에 밤 9시에 도착하면 여관을 구하고 숙박하기에 곤란하고 피곤할 듯하였다. 결국 아오모리까지 가서 일박하고 아오모리에서 다시 모레 삿포로로 가기로 하고 표를 끊었다. 역 직원은 나와 함께 계획을 세워주고 종이에 시간표를 적어가면서 설명도하고 내가 무리라고 생각하면 새로운 열차 시각표를 제시하기도 하면서 열차 타는 계획까지 도와주었다. 그런데 도쿄에서 갈아탈 때에 1시간 정도 시간이 남는 듯하였다. (이러한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담당자가 현재의 고객과 시간이 오래 걸릴 듯하면 줄 뒤의 다른 사람의 일도 조금씩 보는데, 일본에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이 지금의 고객과 일이 끝날 때까지 다른 사람과의 업무나, 잡담이나, 전화 받는 일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 물론 내 뒤의 고객도 지루한 시간을 그대로 참고 기다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주었다.)

어제 나라에 한번 내렸던 경험이 있어서 오늘 나라에 오니 별로 낯설지 않았다. 710년부터 784년까지 약 74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으며 한국의 경주와 같이 고적이 많다고 하지만 지도도 간단하였다.  거의 모든 유적은 나라 공원에 있고  바로 역 앞에서 걸어가면 되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나라 역 앞을 가로지르는 큰 도로를 건너서 똑 바로 난 길을 계속 걸어 나아갔다. 2차선 도로라 좁은데 길에 공사를 하고 있어서 좀 걸어가기가 곤란한 곳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이 토요일이라 오후에는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이라는 생각에 우선 오전에 관광을 하기로 하였다.
안내서에도 도시락을 준비해가서 나라 공원에서 점심을 먹는 것이 좋다고 되어 있어서 걸어가면서 편의점에 들러 빵을 좀 사 갖고 갔다. 15분쯤 걸어가니 공원 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입구 조금 못 미쳐서는 시장도 보였다. 그러나 바로 공원으로 올라갔다. 오른쪽에 아마도 사루사와노이께인 듯한 연못이 보였지만 물은 좀 지저분하였다. 녹조가 잔뜩 끼어 있었다.
공원은 울타리나 담도 없고 그냥 포장 도로도 있고, 비포장 산책길도 있는 동서 4km, 남북 2km에 이르는 곳으로 1880년대에 정비하여 공원으로 하였다고 적혀 있었다. 이곳에는 울타리도 없이 그냥 사슴을 방목하고 있었는데 옛날 가스가따이샤의 신이 사슴을 타고 이곳으로 왔다는 전설 때문에 많이 기른다고 하지만 아직은 사슴이 나타나지 않았다.
목표를 도다이지(東大寺)로 잡았기 때문에 우리는 왼쪽으로 접어들었다. 거기 신사와 절이 있었는데 이제까지 절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별로 흥미는 없었다. 흥복사(興福寺)라는 절 앞에 산쥬노또가 보여서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데 나라 공원의 명물인 고쥬노또가 바로 앞에 보였다. 여기서 사진을 찍으려는데 사슴 떼가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서너 마리씩 모여서 사람이 있는 곳으로 오는데 일인들은 밀전병(煎餠:せんべい)을 사슴에게 주면서 사진도 찍고 쓰다듬기도 하였다. 매점에서도 거의 밀전병을 많이 팔았는데 사는 사람들이 좀 있었다.
아내는 사슴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과 징그럽고 무서워서 쫓아버려야겠다는 마음이 함께 하니 내가 사진을 찍어주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필름이 다 되어서 가지고 온 다른 필름으로 갈아 끼웠다. 이게 좀 잘못된 모양으로 다음부터 어쩐지 찍는데 이상징후가 발견되었다. 필름의 액정화면에 나타나는 글자가 다른 것이다. 전에 호주에서도 카메라가 고장이 나서 새로 카메라를 산 일이 있었는데 젠장 무언가 잘못되었으면 오늘 호류지에 가려는데 어쩐다. 하고 짜증이 나기 시작하였다.
이제 피곤하고 좀 쉬어 가야하며, 아침도 먹어야겠기에 가장 너른 잔디밭과 벤치를 골라 앉았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꺼내니 사슴과 비둘기 떼가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가까스로 점심을 먹었다. 사과를 깎아 먹으니 또 비둘기 떼가 몰려왔다. 그래서 내가 사과 껍질을 던져주니 비둘기는 먹지 않았다. 그런데 사슴 떼가 몰려왔다. 밀전병보다는 사과 껍질이 훨씬 맛이 좋은지 사슴 떼는 사과껍질 맛을 보고 몰려들었다. 우리 부부는 이들을 피하느라 얼른 사과껍질을 모두 던져주고 일어섰다. 그것을 보고 지나가던 서양인들이 웃었다. 커다란 뿔이 달리 수사슴은 크기가 작은 송아지 만하였으므로 여러 마리가 달려드니 좀 무서운 마음도 들었다. 사실 이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었다.
하여튼 아침을 먹은 우리 부부는 그대로 걸어가서 나라국립박물관쪽으로 갔다. 거기에도 무슨 행사를 하는 듯하였으나 우리는 그냥 지나쳤다. 오늘은 호류지에 가는 날이므로 모든 초점은 거기에 맞추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도다이지가 나타났다. 이곳에는 기념품을 파는 상점도 많고 식당도 몇 있었다. 입구는 반듯한 돌을 깐 넓은 길로 사슴 떼가 많이 노닐고 있었으며 앞에는 커다란 남대문이 버티고 있었다. 일본 천왕이 다녀갔다는 기념탑이 있었다. 보통 우리나라의 절 입구에는 일주문이 있는데 이 남대문은 기둥도 한 개가 아니고 대단히 큰 건물이었다. 이층 누각으로 우리나라 서울의 남대문 아래쪽의 돌로 쌓은 성이 커다란 나무 기둥 여러 개로 떠받쳐 있다고 생각하면 될 듯한 형상의 건물이었다. 그 아래로 많은 관람객과 사슴과 장사꾼이 어우러져 있는 곳을 통과하니 앞에 커다란 도다이지 본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밖에서도 본당은 볼 수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서 커다란 부처(大佛)를 꼭 보아야할 이유가 없어서 400엔의 입장료를 아껴서 그만 돌아서고 말았다. (심했나?) 돌아 나오다보니 인력거꾼이 관광객을 태우고 달리고 있었다.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냥 돌아서서 오는데 도중에도 신사가 몇 있었으나 피곤한 다리를 끌고 돌아오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은 역시 마찬가지로 갔던 길을 돌아왔다. 공원 입구에는 고급 요정도 있었는데 우리 같은 배낭 여행객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시장으로 들어가 보니 일반 한국 시장이나 같이 여러 가지 어물이나 채소도 팔고 있었다. 마침 사진 현상소가 있기에 들어가서 카메라 수리를 부탁하니 아주머니가 자기는 사진기 기술이 없다면서 건너편 집으로 가보라고 하여 다시 길을 건너보니 또 다른 사진관이 보였다. 들어가니 아주머니가 나와서 자기 딸을 부르니 여고생 정도의 아가씨가 나와서 카메라를 들고 암실로 들어갔다. 한참 있다가 나와서는 내가 보는 앞에서 필름을 끼우면서 톱니바퀴에 좀더 밀어 넣고 끼우는 것이 안전하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필름이 잘못 끼워진 모양이었다. 얼마를 드려야 하느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극구 사양을 해서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돌아섰다.
이제 이 나라에서 몇 정거장 떨어지지 않은 어제 보았던 호류지역으로 가서 호류지를 볼 일 만 남았다. 나라를 빠르게 돌아다녔기 때문에 오늘 호류지까지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담징이 그린 호류지의 금당 벽화를 본다는 마음에 피곤한 것도 잊고 호류지로 가는 전철을 탔다.

(17)호류지에서 담징의 금당 벽화를 보다
  
토요일 오후가 되어감에 따라 나라 역에서 내리는 관광객의 수가 불어나기 시작하였다. 하여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니 좀 수월한 듯하였다.  나라에서 호류지 역까지는 어제 지나쳤으므로 쉽게 갈 수 있었다. 호류지 역은 시골 역이라 한산하였다. 안내 책자에는 셔틀버스를 타면 5분만에 호류지에 도착한다고 되어 있었고, 걸어갈 수도 있다고 되어 있었으나 역 대합실에서 나가자마자 버스를 찾았다. 날은 뜨겁고 역 앞 도로변에 서 있는데 버스가 도착하였다. 그러자 어디에 들어있던 사람들인지 우루루 많이도 몰려와서 거의 만원이 된 버스는 호류지로 향해 출발하였다. 좁은 골목길 같은 곳을 지나갔는데 안내 책자에는 농가가 있는 논길을 달린다고 하였으나 호류지까지 거의 들판은 나오지 않았다. 170엔을 주고 내렸다.
지금까지 보아온 일본의 사찰과는 다르게 대단한 규모임을 입구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수목이 늘어선 입구의 도로 양편에는 식당과 상점이 즐비하고, 버스나 승용차들이 제법 많이 붐비고 있는 그러한 곳에 우리가 탄 셔틀버스도 한 바퀴 돌아서 내려주고는 돌아갔다. 절 경내로 들어서니 바로 호류지의 고쥬노또와 절 지붕들이 보였다.
입구에서 입장권을 팔면서 안내 팜플렛을 주는데 일본어와 한글로 된 것을 쌓아두고 나누어주고 있었다. 나는 한글판과 일본어판을 각각 받았다. 1,000엔씩. 금당이 있는 서원(西院)가람과 박물관인 대보장원(大宝藏院), 동원(東院)가람까지 들어가는 데 쓰이는 입장권이었다. 거기에는 이 호류지가 일본 최초로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우선 절 마당에 있는 큰 건물로 들어갔다. (이곳이 바로 금당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모르고, 급한 성미에 안내도도 보지 않고) 창살 너머로 많은 불상과 여러 가지 기구들을 놓아둔 것을 보고 나와서 회랑을 한바퀴 돌아 안쪽의 본당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본당 안 한쪽에 상점이 있어서 기념품을 팔고 있지 않은가?  일본인들의 장삿속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절의 본당 안에서까지 상점을 차린다는 것은 상상 밖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 기념품 중에 높이 걸어둔 액자에는 분명 옛날 초등학교 국사 시간 때부터 보아온 그 담징의 벽화(그림 중에 관음보살 상체 부분)가 12호쯤 크기로 복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가격은 제법 몇 만 엔으로 적혀 있었는데, 그 보다도 분명 이 절에 있기는 있는 모양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저 그림이 어디에 있느냐는 내 질문에 스님 복장으로 가게를 보고 있던 일인이 바로 앞마당의 금당에 있다고 하였다. 그럼 다시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절 마당의 금당으로 향하였다. 사각형의 삼층으로 기와를 한 이 집의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번에는 입구에서 한 바퀴 돌면서 눈 여겨 살피기 시작하였다. 그 어두컴컴한 창고 같은 내부에 숱한 불상과 여러 종류의 섬기는 물건들 저쪽 뒷벽(북쪽)에 드디어 희미하게 벽화가 눈에 들어왔다. 한 눈에 저것이 분명하구나 하고 알아볼 수 있었다. 오른쪽 편에 사방 3m정도의 크기로 벽화가 교과서에서 보아왔던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왼쪽 편(북쪽 벽면 중 서쪽 편)에도 역시 거의 같은 그림이 있었다. 이 그림이 이름하여 사불정토도(社佛淨土圖)라고 하여 고구려의 스님 담징이 그린 그림인 것이다. 그런데 사진이라도 찍고 싶었으나 나는 남쪽 벽 쪽에 서서 바라보고, 내 앞에는 감옥처럼 나무 창살이 좁은 간격으로 촘촘히 박혀 있을 뿐만 아니라 저쪽은 너무도 어두컴컴하여 도저히 사진으로 찍을 수가 없어서 그냥 눈에 자세히 넣어 가지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아픈 다리를 끌고 동쪽으로 난 길을 걸어가서 대보장원에 이르렀다. 이 곳은 박물관으로 만들어두어서 주로 호류지를 세운 쇼토쿠(聖德)태자와 관련된 유물이 많이 있었다. 이 태자의 어릴 때부터 자랄 때까지 여러 나이의 조상이라든지 일본 고대의 여러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사불정토도의 한쪽 그림이 흑백이지만 같은 크기로 복사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그래서 증명사진으로 한 장 찍고 설명을 읽어보니, 많이 훼손되어 현대 기술로 복원을 하여 금당에 전시되어 있다고만 씌어 있었다.
여행 안내서에는 1949년 금당을 해체 수리하던 도중 화재로 많이 훼손되어 지금은 금당에 모사품만 전시를 하고 그 진품은 이 대보장원에 일부를 보관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어느 것이 진실인지 모르겠다. 하여튼 혹시나 어디에 진품이 있는가 찾아보아도 결국 찾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벽화를 보기 위하여 한국인이 많이 찾아오기 때문에 한국어로 된 팜플렛도 인쇄해놓고 비싼 입장료를 받으면서 이 그림이 그저 복원을 잘 하였다는 사실만 기록하였을 뿐 한국 사람이 그렸다든지 하는 말은 전연 없었다.
커다란 전시실과는 따로 다른 방에 일본 국보 1호인 백제관음상(百濟觀音像)이 있었다. 경주 박물관에서 보는 금동미륵반가사유상 같이 조그마한 불상이 아니라 사람 키보다 훨씬 큰 입상이었다. 거기 백제 관음상이라고 씌어 있었으나 설명에는 백제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즉, 그들은 그들의 문화 유산과 한반도와의 연관성을 조금도 내 비치고 싶지 않은 듯하였다.
미국인들은 영국을 영원한 그들의 모국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그래서 영국을 방문하는 것을 큰 염원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고 하였다. 내가 호주에서 하숙을 할 때에 하숙집 아들에게 엘리자베스 여왕의 생일이 국경일로 공휴일인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까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영국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라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일인들은 우리 한반도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이 알려질까 봐 지레 겁을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도 일인들은 한국을 방문하는 것을 속으로는 염원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우리를 질시 혹은 멸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대보장원에 있는 그야말로 그들이 보물이라고 하는 것들이 거의 한국에서 건너간 것,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이 만든 것, 그것을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진대 왜 그들은 그토록 이를 숨기려고 하는지. 이러한 생각을 하느라고 동원(東院) 가람은 그냥 돌아보고 나왔었다. 그 사이에 신사도 있었지만.
일본에는 신도(神道), 불교, 기독교가 있고 전체 신자 수는 신도가 약9천 백만 명, 불교가 약 8천6백만 명, 기독교가 약 93만 명이라고 한다. (1988년 현재). 물론 이중으로 된 사람도 많은 모양이지만 하여튼 기독교 신자가 한국과 비교하여 극히 적은 셈이다.  그런데 어느 절이나 가면 옆에 신사가 있는 것 같았다. 반대로 신사에는 곁에 절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나라의 절에 가면 칠성각, 산신각 등의 토속 신앙을 모시는 곳이 있으나 따로 칠성각이나 산신각은 거의 없는 것과 대조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다리를 끌고 동원 가람까지 구경을 마친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그늘 밑에서 잠시 쉬었다. 온 김에 들어오다가 보니 입구에서 왼쪽(서쪽)에도 절이 있었는데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또 걸어서 그 절로 향하였다. 새로 절을 짓고 있는 곳도 있었고, 높은 곳에는 신사도 있었다. 신사 건물 입구에는 길다란 줄이 있어서 종을 치도록 되어 있었고, 종 뒤쪽에는 짚으로 커다랗게 용틀임을 하는 듯이 말아 놓은 것도 있었다. 어느 일본인 신도가 종을 세 번 치고 들어가서 예배를 하기에 이제까지와는 달리 아내도 치고 싶어하기에 쳐보라고 하였는데 역시 숙달(?)되지 않아서인지 종소리가 처음에는 크게 나지를 않았다. 나중에 아내가 아프게 되었을 때에 아내는 이 때에 신사의 종을 장난삼아 친  때문에 일본의 귀신이 노하여 병을 얻은 것은 아닌가 하고 농담을 하였지만 하고 싶은 것을 하여 보는 것도 좋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제 아쉬운 대로 호류지 방문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버스는 없고 다리는 아프고 시장하기도 하였다. 마침 버스 정류소 앞에 식당이 있어서 들어가서 시원한 곳에서 점심을 먹고 버스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관광지라서 그런지 890엔이나 하는 우동을 사먹고 수저를 놓으니 마침 버스가 도착하여 무사히 호류지 역으로 오게 되었다. 이제 교토로 돌아가야 하겠는데 역 직원은 오사카로 가는 것이 더 빠르다고 하였다. 역시 내 생각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사카, 호류지, 나라, 교토, 오사카로 순환선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시간도 있고 오사카로 가서 그 회전 초밥 집을 찾아가 볼거나 하고 생각하며 오사카행 전철을 탔다. 모든 JR 노선은 JR패스로 통과되니 여비 걱정이 없어서 좋기는 하였다.

(18)오사카의 회전 초밥 집
  
이번에 내려도 역시 오사카 역은 몹시도 복잡하였다. 도대체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으나 그래도 벌써 서너 번 내려보아서 잘 찾아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아직 저녁때는 시간이 이르고 하여서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왼쪽으로는 가보았으니 가운데로나 아니면 오른쪽으로 가볼 생각을 하다가 바로 지하도로 내려가서 가운데로 가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내려간 곳은 바로 오사카 역 앞의 지하상가였다. 이 지하 상가는 일본에 있는 동안 내가 내려가 본 지하 상가 중에 아마도 가장 큰 상가였다. 가도 가도 끝없이 지하에 펼쳐진 상가에는 정말 없는 것 없이 팔고 있는 듯했다.
떡을 파는 곳에서 아주 예쁜 떡을 상자에 담아서 선물용으로 팔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아주 독특하고 아름다웠었다. 특히 그 옆에는 우리나라의 인절미 같은 것도 팔고 있었는데 ‘진짜 한국 떡이요!’하고 외치면서 팔고 있었다. 다른 떡집보다 이 점포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서 사고 있었다. 일인들도 한국 떡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한국 교포들인지 모를 일이었다.
어물을 팔고 있는 곳에서는 우리나라 슈퍼와 같이 회도 팔고 있었는데 가격은 비쌌다. 그 옆에 덩어리 고기를 팔고 있었는데 그걸 썰어서 초밥 집에서 초밥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하고 우리 둘은 생각하였다. 문어나 오징어 등 우리나라에서 파는 생선 종류와 거의 같았으나 좀 색다른 생선도 보이기는 하였다.
초밥 등을 넣어서 도시락을 파는 곳과, 밥을 파는 곳이 많이 보였는데 일본만 해도 집에서 밥을 하는 것보다 사서 먹는 사람이 많은지 잘 모를 일이었다. 외식 산업은 우리 보다 더 발달된 듯하였다.
차를 파는 곳이 많았는데 일인들이 차를 좋아하기 때문인 듯하였다. 이들의 자판기에 가보면 생수와 차를 많이 팔고 있었다. 녹차를 병에 담아 파는 것이 종류도 많았었다. 그냥 우리처럼 인스턴트로 봉지 차를 파는 곳도 많았으나 가루로 된 차를 쌓아두고 조그마한 되로 파는 곳도 몇 군데 있었는데 좀 더 고급스러운 차인 모양이었다.
빵 집에서 커다란 둥근 빵을 조금 헐하게 깜짝 세일을 하니 갑자기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려가면서 단단하고 둥근 빵을 몇 개씩 사가고 있었다. 이들의 식생활이 제법 서구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이렇게 시장을 둘러보는 것은 아주 피곤한 일인데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둘러본 모양이었다. 지하 상가에서 나오니 날은 저물어 가고 다리는 아파 오기 시작하였다. 이제 저녁을 먹어야겠는데 아내와의 약속도 있어서 그저께의 그 상가에서 회전초밥을 사먹기로 하고 中通商店街를 찾기로 하였다. 그런데 일부러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저께 걸어간 길을 그대로 역 앞에서부터 계속 걸어갔는데도 불구하고 그 상가를 찾을 수가 없었다. 포기하고 아무 데에서나 아무 거나 먹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하였지만 아내의 눈치를 보니 기어이 그 회전 초밥을 먹어보겠다는 눈치다. 어떻게 어떻게 헤매고 다니다보니 그저께 잤던 호텔 근처로 나오게 되었다. 그 손으로 만드는 우동집이 있어서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우동집 건너편에 바로 그 상가의 간판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이라 상가의 거리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붐비지는 않았다.
회전 초밥 집은 얼마 걸어가지 않아서 곧 찾을 수 있었다. 입구에서 보니 한 접시에 120엔이라고 씌어 있었다. 우선 안으로 들어갔다. 타원형으로 되어 있는 테이블에 사람들이 앉아 있고, 그 앞에 초밥 2개씩을 담은 접시들이 천천히 타원형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안 타원의 양쪽 끝에 요리사가 한 명씩 서서는 연신 초밥을 만들고 있었다. 안내를 받아서 의자에 앉아 천천히 살펴보니 우리 오른쪽에 앉은 남자 분은 혼자서 이미 10여 접시를 먹은 듯 접시를 쌓아두고 있었고, 왼쪽에 앉은 남자 분은 이제 시작인 듯 한 두 개의 접시가 보인다. 저 쪽에는 아가씨 3명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초밥을 먹고 있다. 그 외에도 10여명의 손님이 앉아서 자기 앞에 오는 접시 중에 마음에 드는 초밥이 있으면 내려다 먹고 있었다.
우선 물을 마셔야겠기에 주인에게 이야기 하니 초밥 위에 있는 컵을 두 개 내려주면서 앞에 있는 수도꼭지 같은 곳에서 찻물을 부어 주었다. 아, 그랬구나. 모든 게 셀프 서비스구나.
초밥 만드는 것을 보니 미리 종류별로 생선을 초밥을 하기 좋도록 썰어서 담아둔 통을 놓아두고, 밥을 담은 큰그릇에서 손으로 밥을 떠서는 주물러서 생선을 얹어 초밥을 만들어서는 접시에 담았다. 너 댓 접시가 마련되면 돌고 있는 곳에 드문 드문 놓아주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우선 돌고 있는 것을 보아두었다가 새로 놓아두는 것이 돌아오자 한 접시 내려서 먹어보니 그저 여느 초밥이나 마찬가지였다. 앞에는 간장을 부을 수 있는 접시와 간장 병이 있었고, 생강 같은 것(일본인들은 빨강색, 파란색 등 원색이 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듯하였음)이 있어서 먹을 수도 있었다.
나는 컵을 하나 더 내어서 가져간 팩 소주를 부었다. 물대신 이 소주를 조금씩 마시면서 초밥을 먹으니 그 맛도 괜찮았다. 내 왼쪽의 손님은 맥주를 한 잔 청하였는데 500엔. 아이구 그거 마실게 못된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무언가 요리사에게 자기가 먹고 싶은 종류의 초밥을 주문을 하니 만들어주었는데 우리는 아는 것이 없어서 그냥 얹어주는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내려다 먹는 수밖에 없었다. 오징어, 문어, 김, 외에도 여러 가지 종류의 생선으로 초밥을 만들어서 내어놓았다. 그것들이 모두 2개에 120엔이니 그렇게 비싸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생선뿐만 아니라 장어 구운 것도 만들어내어 놓았고, 그 외에도 이상한 것이 있었으나 내가 먹기에는 좀 곤란한 것들이었다.
어쨋거나 우리 부부는 13접시와 소주 한 팩을 모두 먹었다. 그런데 내 옆의 일인들은 혼자서 그 정도를 먹으니 일본인이 소식이라는 말은 맞지 않는 듯하였다. 그것도 우리와 달리 그들은 혼자서 퇴근길에 슬그머니 이런 곳에 와서 이렇게 먹고 가는 것을 보니 좀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대도시의 봉급 생활자들은 고달픈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어둡고 화려한 이 상가를 구경하고 어제의 그 상점에 가서 사과를 2개 사서(언제부터인가 나는 식후에 과일을 먹지 않으면 곤란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특히 사과가 필요하였음) 오사카 역으로 향하였다.
이러한 지리는 아내가 더 잘 아는 듯 어제 아침에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 걸으니 오사카 역 뒤쪽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은 사철 역과 지하철 역과 우리가 가려는 JR 역이 있어서 사람들이 굉장히 붐비고 있었다. 또 아내의 손을 잡고 JR 오사카역으로 와서 무사히 교토 행 쾌속 열차를 탈 수 있었다.
늦게 사또무 여관으로 돌아오니 프론트에서도 반가이 맞아주고 마치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드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 여관에는 고등학생인 듯한 일본 학생들이 단체로 숙박을 하는 모양이었다. 어제의 일도 있고 하여서 오늘은 미리 에어컨의 온도를 26도로(여관이나 호텔마다 에어컨의 종류가 달라서 조절하는 것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었다.)조절한 후에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19) 아오모리(靑森)로 가는 길
  
8월 20일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샤워 후에 어제 여관 근처 편의점에서 사온 빵 등으로 아침을 때웠다. 서둘러 교토 역으로 가서 7시 17분 발 도쿄행 고속 열차 히카리를 탔다. 도쿄에는 10시에 도착하였는데 약 1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도쿄 시가지를 구경하기 위해서 대합실로 나왔다. 처음 오는 도쿄지만 오사카의 번잡한 역구내에서 견디어낸(?) 우리 부부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 도쿄 대합실을 유유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도쿄 역 앞은 넓고, 높은 건물들이 제법 보이기는 하였으나 그렇게 번잡한 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오히려 한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역 앞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바로 천왕이 사는 고꾜皇居)가 있는 히가시교엔(東御園)이 있기 때문이리라.)
삿포로까지 갔다가 내려오면서는 이 도쿄에서 3,4일 머물며 천천히 돌아볼 계획이었으므로 가까이에 호텔이 있는지 돌아보기로 하였다. 아내를 역 앞에서 구경이나 하라고 배낭을 지키고 있게 하고는 혼자 시가지를 걸어나갔다. 마침 호텔이 눈에 띄어 들어가서 가격을 물어보았다. 트윈룸 3만 몇 천 원, 더블룸 2만 몇 천 원. 어이쿠. 큰일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도쿄에 오면 어디서 어떻게 잘지 걱정이 덜컥 되었다.
다시 돌아와서 아내와 함께 역 앞에 있는 지하 상가로 내려갔다. 이제 역 앞 지하에 내려가면 지하 상가가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제법 번창한 지하 상가가 있었다. 점심용으로 닭튀김과 꼬지 요리 2개를 샀다.

11시 출발하는 모리오카행 신칸센 열차는 금연 칸에 좌석이 없어서 흡연 칸으로 예약을 하였으므로 어떻게 할지 걱정이 되었으나 금연 칸이면서 자유석인 객차에 타고 좌석을 돌아보니 마침 자리가 많이 있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12시 30분 경에 모리오카에 도착하여 10분 안에 아오모리행 급행 열차로 갈아탔다. 북쪽으로 갈수록 시골집들의 지붕 색깔이 다양해지고 들판의 벼가 누런 색깔을 더 많이 띄었다. 즉, 북쪽으로 갈수록 수확 시기가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오모리 역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48분이었다. 안내에 가서 지도를 구하고 옆에 안내되어 있는 호텔로 전화를 해보니 10,600엔 이라고 하여, 아예 다른 호텔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다. 역에서 나와보니 역 앞으로 큰 길이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 시가지가 반듯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이 큰길은 약 사,오백 미터 이어지고 있었는데 양쪽이 모두 인도를 지붕으로 덮어두었다. 즉 차도 쪽에는 쇠기둥으로 받쳐두었는데 비가 와도 걷는 사람들이 비를 맞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아주 정비가 잘 된 시가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길을 따라 왼쪽으로 걸으면서 큰 길이 나오면 좀 들어가서 호텔의 가격을 물으면서 걸어나갔다. 16,000엔에서 9,800엔까지 가격이 각양 각색이었다. 왼쪽으로 꺾어서 좀 들어가 보니 센츄럴호텔이라는 곳이 있는데 9,030엔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방에 배낭을 둔 후에 물산장려관을 보러 나갔다. 여행 안내 책자에는 아오모리에서 볼 곳은 이 곳뿐이라고 씌어 있었기 때문이다. 호텔에서는 5분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물산장려관은 그 건물부터가 아오모리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곳으로 바닷가에 세워진 삼각형의 건물이 매우 이색적이었다. 정식 이름은 아오모리현관광물산관(靑森けん觀光物産館)으로 그들의 안내 팜플렛에는 아스빠무(アスパム)라고 되어 있었는데 이게 영어로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영어를 좋아서 쓰는 것은 우리 보다 심하여 처량할 정도로 무엇이든 영어로 되어 있으면 좋은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외래어를 함부로 마구 남용하고 있어서 나 같은 일본어 초보 실력자에게는 참으로 당황하게 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닌데 이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입구에 요란한 밴드 소리도 나기에 무엇을 하는가 보니 이곳 아오모리 방송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다. 오늘 아마도 무슨 행사가 있는지 유니폼을 입은 어린이들이 줄을 지어 기념 촬영하듯이 30명쯤 서있고 그 앞에 촬영장비를 가져다 두고 노래도 부르고 대담도 하면서 촬영을 하고 있었다. 조금 구경하다가 물산 장려관으로 들어갔다.
전시는 2층에 하고 있었는데 물산플라자(物産プラザ)라고 하여 아오모리에서 생산되는 여러 가지 물건을 전시하고 판매도 하고 있었다. 옆에는 손수 체험하는 코너(手作り體驗コ-ナ-)가 있어서 직접 만들어보도록 하여 두었으나 아무도 해보는 사람은 없었다.  옆에는 에너지관(エネルギ-館)도 있었다. 간단히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오니 옆에 빈터가 있는데 오늘 무언가 행사가 있는 듯 옆에 장사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한쪽에는 일본특유의 무사들이 몰려있는 그림이 있고 아래에는 ‘2002년 북방도시 회의는 아오모리(2002年 北方 都市 會議ハあおもり)’라고 씌어 있었다.
한바퀴 돌아 다시 역 쪽으로 오니 조그마한 시장이 있었는데 5시가 가까워오니 문을 닫고 있었다. 사과를 200엔을 주고 6개를 샀다. 질은 떨어지지만 아오모리에는 사과가 많이 난다더니 딴 곳보다는 좀 가격이 싼 듯하였다. 저녁 식사를 위하여 이곳 저곳 기웃거려보니 역 바로 옆 우측에 식당이 있는데 들어가 보니 완전히 셀프서비스 식당이었다. 식권을 사서 작은 쟁반에 식사를 담아주면 먹고 나서 자기가 주방에 가져다주는 방식으로 식사를 하였는데 600엔을 주고 이명수가 한 마리 구워져 나오는 제법 먹음직한 저녁 식사를 잘 할 수가 있었다. 모처럼.

그런데 아무래도 이 아오모리 시가의 사람들이 좀 이상한 듯 하였다. 일본 기모노를 입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눈에 뜨이는 것이었다. 그들이 모두 물산장려관으로 가는 듯한 낌새를 느낄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무슨 행사가 있는 듯하여 호텔로 급히 돌아와서 프론트에 물어보니 마쯔리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일본 여행 중에 마쯔리를 구경하는 것은 행운이라는데 아니 오던 날이 장날이란 말인가. 그래 무슨 마쯔리냐고 물으니 오도리마쯔리(踊り祭)라고 하였다. 그럼 춤을 춘단 말인가.
그런데 방에 냄새도 나고 에어컨도 고장이 난 듯하여 방을 바꾸어 달라고 하였더니 두말 없이 다른 곳으로 바꾸어 주었다. 이제 방도 바꾸고 저녁 식사도 했겠다 마쯔리 구경을 하기로 하고 호텔을 나섰다.

(20) 아오모리(靑森)의 마쯔리(祭)
  
물산 장려관으로 다가갈수록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있었다. 좀 전에 본 방송국의 촬영도 계속되고 있었다. 물산 장려관 저쪽의 공터(아래에는 보도 블록이 깔려 있었다.)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스피커에서는 힘찬 노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가운데에 원형의 무대가 있고, 그 둘레를 많은 사람들이 원을 그리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아마도 5,6백 명은 됨 직하였는데 반수 이상이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무대 위에도 20명쯤의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었는데 역시 멋진 전통 일본 의상을 입은 여자 두 사람이 힘찬 소리로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바깥쪽에는 계단으로 된 곳도 있었고, 약간 언덕으로 된 곳도 있었는데 역시 5,6백 명의 사람들이 앉아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오후 늦게 내가 본 그 무사 그림은 뒤에 조명을 하여서 이상하게 밝게 비치어 보이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외국인인 듯한 사람이 한, 두 명 보이고, 일인들도 있었다. 또, 준비중인 듯한 일인 여자 몇 명이 같은 복장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장사꾼들이 꼬치요리나 맥주 등을 팔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한 바퀴 둘러 본 후에 계단 쪽으로 가서 호텔과 역 안내에서 받은 지도를 깔고 앉아서 구경을 하기로 하였다. 다른 일인들도 신문지나 비닐 포대 같은 것을 계단에 깔고 앉아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9시경까지 구경을 하였는데 이들이 하는 그 축제란 것을 자세히 관람하였다.
우선 가운데에 큰 원형 무대를 만들어두고, 그 무대 뒤쪽으로 단을 만들어 단 위에 악사들을 위한 의자를 6,7개 두었다. 이 의자 위에 이 축제의 정식 이름으로 “제8회 북의 우란분절 춤 페스티벌(第8回北のボン踊りフェスタ)”이라고 크게 써서 세워두었다. 밤이지만 조명을 하여서 잘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여기서 일본글로 ‘본’이라고 쓴 것을 사전에 찾아보니 우란분재(절)의 준말이라고 하여 다시 찾아보니 음력 7월 15일 전후 7일 동안 조상의 영혼을 제사지내는 불교 행사라고 씌어 있었다. 하여튼 이 날이 8월 20일이었으니 음력으로 7월 21일로 바로 후 7일이 되는 우란분절의 마지막날이었다.
무대 위에는 남자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진행을 하고 있었으며, 전통 의상을 입은 여자 사회자가 이를 보조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두 여자 가수가 힘차게 노래를 부르고 이 원형 무대 위에는 같은 차림의 전통 의상을 입은 여자들이 돌아가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무대의 아래쪽에도 수백 명의 일본인들이 반은 보통 의상으로 반은 전통 의상을 입고 춤을 추면서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게다(げた)라는 것을 신은 사람이 있는가 유심히 살펴도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흔히 우리나라 코미디에 간혹 양복바지에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출연하는 것과 같이 이들도 양복바지와 구두 차림에 겉에는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이 좀 있었으며, 정식으로 입은 사람은 앞 뒤축이 없는 슬리퍼 비슷한 전통 일본 신을 신고 있었다. 특히 여자들이 정식 복장을 갖춘 사람이 많았다.
이 춤 축제는 벌써 며칠째 계속해온 것처럼 느껴졌는데 오늘이 그 마지막날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사회자도 능숙하였고 춤을 추는 사람도 능숙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한차례 노래를 부르는 데에 맞추어서 춤을 추고 나서 이제는 판이 무르익어 가자 아오모리 시장의 인사가 있었다. 이분도 전통 의상을 입고 나타나서 시민들이 이렇게 많이 참석해주어서 고맙고, 이제 마지막날인 오늘 모두 즐겁게 춤을 추면서 아오모리 시민의 단결을 도모하자면서 이제 8회 째를 맞이하니 더욱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는 인사말이 있었다. 시장의 인사말이 있고 나서 그대로 또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게 되었는데 시장도 원형 무대에서 점잖게 그러나 아주 잘 맞게 춤을 추었다. 이 춤이라는 것이 아주 단순한 손과 발의 동작을 계속 되풀이하면서 그냥 돌면 되는 것으로 아무나 따라하기가 쉬울 듯하였다.
노래가 한 곡 끝나고 나니 시장은 내려와서 바로 우리가 앉아 있는 계단의 뒤쪽에 마련된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거기에는 길게 테이블이 여러 개 놓이고 소위 유지들이 몇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렇게 고급도 아니고 소박하게 그저 시민들과 악수도 나누고 환담을 나누면서 거의 끝날 때까지 그렇게 앉아 있었다.
노래는 끝날 때까지 4가지를 불렀는데, 인기 가수가 부른 듯한 ‘눈마을의 xx(雪村のxx:나 같은 초보 실력으로는 큰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는 말을 정확히 들을 수 없어서 xx이라고 씀)'라는 노래를 녹음으로 들려주고, 일본 전통 노래 같은 구슬픈 가락의 노래를 녹음으로 들려주고, 여가수 2명이 신나는 노래를 불러주고, 전통 악기를 가진 악사가 의자에 올라가서 앉고 전통가수 4명이 부르는 전통 노래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 노래마다 춤을 추는 손이나 발의 움직임이 조금씩 달랐으나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는 것이므로 크게 어렵지는 않은 듯하였다.
이제 한차례 4가지의 노래가 끝나자 이제는 이 축제에 후원을 한 아마도 조직위 같은 분들이 올라와서 인사를 하였다. 아오모리 방송국 사장, 무슨 회사 사장 등이 소개되었었다. 그리고 나서 또 이 4가지 노래를 반복하면서 이분들도 무대 위에서 춤을 추었다. 물론 아까 시장이 춤을 출 때에도 다른 전문적으로 춤을 잘 추는 사람이 무대 위에서 함께 추었듯이 이번에도 그러하였다.
이제 4가지 노래가 또 끝나자 이제는 외국에서 온 귀빈을 소개하는 차례가 되었다. 앞으로 북방 도시회의가 이 아오모리에서 열리게 되는데 이번에 춤 페스티벌에 참여해주신 외국 손님을 소개한다고 하였는데 무대에 올라온 사람은 러시아에서 온 여자 한사람과, 또 남자 한사람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는 일본인들을 보면 참으로 그들의 지휘자에 따르는 습성을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한국에서 온 우리 부부도 있는데 하고 나갈까보다 하는 생각도 조금은 났었다.
이제 이분들의 소개가 끝나자 또 4가지 노래를 녹음으로, 악사의 연주와 노래로, 가수의 노래로 이렇게 들려주고 또 신나게 돌아가며 춤을 추었다. 춤을 추는 무대 위의 사람들을 보면 아마도 무슨 노인회, 무슨 부인회, 무슨 청년회에서 조직적으로 이날을 위해서 연습을 많이 한 듯 참으로 그들은 절도 있게 잘 추는 듯하였다. 어린이도 많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한번은 어린이들만 무대위로 모아서 춤을 추게도 하고 참가하는 어린이에게는 모두 기념품을 주어서 내려보내고 있었다.
이제 4가지 노래와 춤이 끝나자 이번에는 춤을 잘 춘 사람의 시상이 있다면서 솜씨를 발휘해줄 것을 당부하고 또 똑같은 노래에 맞추어 또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읽으면서 지루했겠지만 보는 우리 부부도 그만 같은 노래에 지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지루해하지 않고 아주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는 저들이 어떻게 하나 그것만 흥미를 가지고 보고 있었다. 둘레에서 추는 시민들 중에는 (특히 여자들) 아주 특이한 복장이나 가면을 쓰고 나와서 익살스럽게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이 인기를 얻고 있었고, 아오모리 방송에서 나와서도 시장님의 연설도 촬영하였지만 이렇게 익살을 부리는 사람들의 모습도 촬영하고 있었다.
드디어 시상식 시간이 되었다. 시상은 어린이들 중에 잘 춘 사람에게 먼저 상을 주었다. 그 다음으로는 시민들 중에 춤을 잘 춘 사람, 익살스럽게 춤을 춘 사람에게 상을 주었다. 상을 주면서 이름을 묻고 이를 크게 공개하곤 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전문가들, 즉 무대 위에서 춤을 춘 사람들의 순서가 되었다. 이들은 커다란 번호를 달고 있었는데 그 번호를 보고 우리 부부도 누가 상을 받을 것이라 여겼는데 우리 생각과 거의 비슷하게 상을 차례로 받았다. 이 시상은 조직위원장인 듯한 사람이 하였다.
우리 부부는 이들 일인들이 떠나고 나면 과연 얼마나 지저분할까 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이제 시상이 끝나고 나니 이제부터인 듯 사회자가 신나게 또 춤을 추어보자고 하였다. 아니 그 네 가지 노래를 또 그대로 반복을 하는 이 아오모리 시민들의 끈기에 참으로 놀랐다. 그래도 그들은 줄어들지도 않고 수백 명이 그대로 춤을 추면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구경꾼들은 조금씩 줄고 있었지만. 덕택에 그들이 자기 자리를 치우는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이러한 경우 별로 쓰레기가 남지 않지만 이들 일본인들은 정말로 자기가 떠난 자리가 깨끗하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쓰레기를 치우다보니 근처의 쓰레기통은 우리나라처럼 온통 넘쳐나고 있었다. 이건 우리나라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참다 못하고 그만 일어나고 말았다. 시간도 9시를 넘고 있었다. 일어서 오면서 그 들 일인들이 춤추며 돌고 있는 바깥쪽을 우리도 돌면서 한번 흉내를 내어볼려고 하였는데 예상외로 그 간단한 손과 발의 동작이 여간해서 잘 되지를 않았다. 손을 두고 발만 따라하려고 하여도 잘 되지를 않았다. 아니 이건 태생적으로 그들 일인들의 몸 동작은 우리가 하기에는 어려운 것인가?
우리나라에서도 축제가 이제 제법 생기고 있는데 우리도 이렇게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축제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멋진 전시와 전문가들이 만들어 놓은 것, 또 전문가들의 축제를 시민들은 방관자가 되어 구경만 하는 그러한 축제는 이렇게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축제로 바꾸어보는 것이 어떨까하고 생각해보았다. 더구나 거의 돈이 들지도 않으면서 모든 시민이 즐겨 참여하는 이러한 축제가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즈음 지방 자치 단체에서 무리하게 청사를 짓는다, 축제를 한다, 투자를 한다 하다가 재정 적자로 파탄에 이르는 보도가 많이 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이 일인들이 일사불란하게 불평 없이 그들의 지휘자 혹은 사회자에 따르면서 즐기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일인답다는 생각을 하였다.
내일은 이번 여행의 가장 북쪽인 삿포로로 떠난다.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의 해저 터널을 통과하는 것에 호기심이 자꾸만 생긴다. 호텔에 돌아와서 집으로 전화를 걸고 일찍 잠이 들었다.

(21) 해저터널을 지나 삿포로(札幌)로
  
8월 21일 월요일. 어제 오랫동안 열차를 타보니 좀 추운 듯하여 오늘은 긴 바지를 입고 6시에 호텔을 출발하였다. 어제 먹은 저녁 식사가 가격도 싸고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역 오른 쪽에 있는 그 식당으로 갔지만 입구에 ‘준비중’이라는 팻말을 붙여놓고 아직 영업을 하지 않았다.
마침 그 옆에 소바를 파는 곳이 있어서 조그마한 간이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서너 사람의 손님이 소바를 먹고 있었는데 옆에는 자동 티켓 판매기가 있었다. 그곳에서 300엔, 350엔 짜리 표를 사서 주인 아줌마에게 건네니 곧 두 가지 소바를 내어주었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이름만 달랐지 거의 같은 소바였다. 우리 부부가 소바를 먹고 있는데 옆 좌석의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냉수 두 컵을 날라다 주면서 주인 아주머니가 가져다주라고 한다고 말하였다. 아까부터 좀 험상궂은 사내가 옆 좌석에 있어서 께름칙했는데 전연 뜻밖이었다. 얼른 ‘아리가또오 고자이마스’라고 말하였다. 이들 일본인들은 보기와 다르게 모두 친절이 몸에 베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우리가 외국인인 듯하였던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열차를 타고 가면서는 마냥 해저터널을 언제 지나게 되는지 궁금하였다.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빙점’이라는 소설에는 아직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에 터널이 없어서 배로 건너다가 풍랑에 배가 난파당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제는 해저 터널이 뚫려서 열차가 그 터널을 통과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굴을 통과하면서 열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 우리 부부는 이게 해저 터널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이내 밝은 빛이 들어오면 아니구나 하고 실망하곤 하였다.
해저터널로 들어가기 전에 9개의 작은 터널을 통과하고 나서 우리가 탄 열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해저터널로 들어섰다. 50km도 더 되는 해저 터널이라 제법 시간이 많이 걸릴 듯하였다. 안내 방송에는 지금 해저 터널을 통과하고 있으며 이 터널은 세계에서 가장 길고 어쩌고 하면서 소개를 하고 있었다. 해수면 아래에 기차역이 두 개나 있으며 이는 세계에 유일하다고 하였다. 어느 곳이 지하 역인가 하면서 유심히 살피었다. 안내 책자에는 이 터널의 역에 열차가 서서 구경도 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는데 우리가 탄 열차는 그대로 통과하였다. 아마도 내가본 가로로 뚫려 있는 비행기 격납고 같은 시커먼 동굴이 지하 역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27분이나 걸리는 긴 시간을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정차하지 않고 통과하였다.  그런데 안내 방송에는 해저열차가 있다고 선전을 하고 있어서 올 때에는 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 터널의 정식 이름이 세이칸터널(靑函トンネル)로 아오모리(靑森)와 하코다테(函館)의 첫 글자를 딴 듯하였다.
긴 해저 터널을 나오고도 열차는 8개인가 9개쯤의 작은 터널을 더 통과하고 하코다테에서 정차하였다. 이 역구내에서 바로 건너편에 객차 바깥을 예쁘게 그림으로 장식한 열차를 보았는데 아마도 해저열차인 듯하였다. 이름하여 도라에몬해저열차(ドラえもん海底列車)이었는데 왜 그러한 이름이 되었는지 아직도 좀 궁금하다. 그 뜻도 잘 모르겠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삿포로로 가는 열차로 갈아탔다.
원래 홋카이도는 아이누 족이 살던 곳으로 우리나라로 보면 만주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함경도도 가보지 못하였으므로 만주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으나 강원도보다는 산이 적고 들판이 많은 듯하였다. 그러나 경작하지 않은 곳이 많이 눈에 띄었고, 옥수수를 심은 곳이 많았다. 지나다보니 저쪽 먼 산에 흰 연기 같은 것이 솟아오르고 있어서 아마도 화산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현수막이 걸려 있었는데 화산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해달라는 등의 내용인 듯하였다.
아무래도 인가가 적고 집들도 널찍하게 지은 양옥이 많이 눈에 띄었다. 예전에 읽은 책에서 삿포로를 개척하던 내용을 보았는데 여행 안내 책자에도 1871년 미국 건축기사의 설계로 홋카이도 제1의 도시 삿포로가 탄생하였다고 적혀있었다. 과연 설계된 도시는 어떠한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열차는 도중에 무로란 가까이 신무로란이라는 역을 지나가게 되었다. 여기서의 신무로란이란 이름은 신칸센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이름이다. 오히려 다른 역에도 역 주변에 신칸센을 홋카이도로 유치하기 위한 현수막이 붙어 있는 곳이 좀 있었다. 석탄을 실어 나르는 항구로, 옛날 내가 읽은 책에 나오는 도시이므로 이름만 낯익은 도시였는데 이렇게 멀리 바라보면서 열차가 달리니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나라로 보면 삼척시 정도로, 온통 석탄과 관련된 산업이 발달된 도시인 듯하였다.
열차는 계속 황량한 벌판과 번듯한 양옥이 많은 소도시들을 지나갔다. 옥수수 밭이 많이 보이고, 지붕의 색깔이 다양하였으며 목장도 종종 보였고,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목장에는 검은 소들이 눈에 띄는 것이 좀 이상하였다. 일본을 통 털어 비닐 하우스를 거의 보지 못하였는데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12시 58분에 정확하게 삿포로 역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도쿄로 내려갈 열차 표를 예매하였다. 그런데 이 역 직원이 내 차림을 보고 그랬는지 몰라도 야간 열차를 계획을 세워서 보여 주었다. 그래서 나는 싫다고 하고 내려 갈 때에는 세이칸 해저 터널도 보고 싶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이 역 직원이 새로 계획을 세워 주는데 도쿄에 밤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내려가기는 좀 곤란할 듯하여 중간에 하루 쉬기로 하였다. 결국 센다이에서 하루 쉬기로 하고 계획을 세우도록 하니 센다이에 오후 5시 50분에 도착하는 것으로 계획이 세워져서 좋다고 표를 끊도록 하였다. 내일 아침 삿포로를 출발하여, 하코다테, 해저터널, 아오모리, 모리오카. 그리고 모리오카에서 신칸센으로 센다이까지 가고, 거기서 일박을 하고 모레 도쿄에 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무려 30분도 넘게 계획을 함께 세워주고 표를 예매해준 이 역 직원은 별로 친절하지는 않았으나 하여튼 나 때문에 수고하였고, 내 뒤에 줄을 서서 기다린 일본인들이 제법 지루하였을 듯하였다.
안내에 가서 지도를 구하여보니 정말이지 바둑판같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네모 반듯반듯하게 시가지가 그려져 있었다. 안내 책자에는 이곳에서 꼭 보아야 할 곳으로 홋카이도 대학 부속 식물원을 추천하고 있었다. 어쨋거나 우선 호텔을 정하여야 할 것 같았다. 이 식물원이나 홋카이도 대학이나 모두 지도에는 역 근처에 있었으므로 역 근처에 호텔을 정하기로 하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앞에 보이는 호텔에 들어가서 물어보니 더블룸이 21,000엔, 트윈룸이 32,000엔이라고 한다. 아니, 이러한 시골(삿포로는 일본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임)에 와서도 이렇게 비싼가 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몇 블록 지나가면 좀 헐하리라 생각하고 더 걸어 나갔다. 몇 호텔에서 가격을 물어도 모두 10,000엔을 훨씬 넘었다. 그 때에 무슨 인(Inn)이라고 씌어 있는 호텔을 발견하였다. 캐나다에서 숙박한 홀리데이 인은 큰 호텔이었지만 호주에서는 인이 모텔보다 가격이 조금 밖에 더 비싸지 않았었다. 어쩌면 저게 일본의 대중 호텔인 비즈니스 호텔인지 모른다는 생각에 들어가 보았더니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지금은 성수기라서 비싸지만 9,250엔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호텔도요코인(ホテル東橫イン)에서 머물기로 하고 짐을 풀었다. 프론트의 두 아가씨가 무척 친절한 것도 마음에 들고 건물이 새 건물이라 방도 깨끗하고 좋았다.
    
제목: 15일간의 일본 종주기 (3)


사진가: kec

등록일: 2010-03-10 06:08
조회수: 548 / 추천수: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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