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의창의 그림이야기

(22) 삿포로(札幌)의 거리 와 공원
  
호텔에 여장을 푼 우리 부부는 점심도 먹고, 거리 구경도 할 겸 호텔을 나섰다. 생각 같아서는 아이누족 마을을 방문하고 싶었지만 새로 JR 열차를 타고 신삿포로 역까지 가서 거기에서도 좀 떨어진 곳에 아이누족의 생활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이 있다는 프론트 아가씨들의 안내 말을 듣고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 그들도 잘 몰라서 전화로 물어보고 해서 내게 안내를 해주는데 자신이 없는 눈치였다. 바둑판처럼 되어 있는 시가지도를 가지고 있으므로 홋카이도 대학이나 그 부속 식물원 정도는 간단히 찾을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가지를 걸으면서 오른쪽을 살피는데 분명 있어야할 대학이나 식물원이 나타나지를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가씨가 있어서 물어보았다.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일본의 거리에는 자전거 도로란 아예 없고, 인도로 모두들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길을 묻기는 쉬웠다. 이 아가씨가 내 말을 듣더니 지도를 보고는 두 가지 잘못을 지적하였다. 즉, 내가 있는 곳이 역 앞이 아니라 역 뒤라는 것, 더구나 나는 홋카이도 대학을 삿포로 대학으로 잘못 묻고 있었던 것이다. 역에서 나오자 큰 거리가 있어서 그게 역 앞의 삿포로 시가지인줄 알았더니 내가 역 뒤로 나온 것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일본의 역은 출구가 여러 곳이어서 어느 쪽으로 나왔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방향 감각을 잃게 되는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아가씨가 가르쳐 준대로 한 블록을 가는데 앞에 그 아가씨가 또 나타났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한 블록을 돌아서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자기가 가르쳐 주고 가다가 생각하니 못 찾을 것 같아서 아예 홋카이도 대학 정문이 보이는 데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잘 못 찾았고, 홋카이도 대학은 바로 우리 호텔에서 한 블록 거리였다. 이렇게 끝가지 길을 잘 가르쳐 주는 이들 일본인들의 친절에는 감탄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대학에는 볼일이 없었으므로 그냥 수위실에서 식물원 가는 길만 물어서 그대로 철길 지하도를 지나 이제야말로 역 앞쪽 시가지로 나왔다. 한 블록을 못 걸어서 바로 식물원이 보였으므로 더 이상 물을 필요는 없었다.
정문은 담을 따라 두 블록만에 나타났는데 이 식물원 앞에서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월요일에는 문을 닫는다는 안내판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우리 이외에도 관광객이 제법 오고는 했지만 모두 실망하는 눈치로 돌아서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입구에서 증명 사진만 찍고, 제주도의 여미지 식물원이 이보다 몇 배나 더 좋았다면서 서로 위로하고 이곳을 떠나 바로 옆의 홋카이도 도청으로 향하였다.

홋카이도 구 도청은 식물원에서 두 블록 떨어져 있었는데, 바로 옆에 있는 새로 지은 현대식 건물보다 구 도청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 도청은 삿포로의 상징적인 건물로 개화기의 붉은 벽돌로 지은 집이다. 따라서 ‘붉은 벽돌(赤れんが)’라는 애칭이 있는 건물이다. 내가 보기에는 서울역보다 좀 작았지만 아담한 것이 참으로 예쁜 건물이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건물을 붉은 벽돌로 짓고, 지붕에는 박공이 여럿 있어서 단조로움을 벗어나면서도 아담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며 대칭으로 지어서 어느 정도 위엄을 보이고 있었다.
마침 그 앞에 식당이 있어, 밖에서 메뉴(표본을 늘어놓고 가격표를 붙인 것)를 보니 크게 비싼 것 같지 않아서 들어갔다. 650엔, 750엔 짜리 밥과 우동이 함께 나오는 정식을 먹었는데 양이 매우 많아서 오랜만에 든든하게 먹을 수 있었다. 제법 번듯한 식당에서 가격이 싼 것은 점심 시간에만 이렇게 특별히 싸게 하는 저희들 말로 ‘런치 메뉴’였는데, 아직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하여튼 잘 먹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여기서 세 블록을 더 가면 공원(오도리꼬엔:大通り公園)이 있으므로 그냥 걸어서 가기로 하였다. 이 오도리공원은 동서로 길게 여러 블록을 공원으로 만든 것으로 폭은 6,7십 미터이지만 길이는 무려 1.5km나 되는 긴 공원이었다. 그냥 블록을 공원으로 만들었으므로 걸어가면서 계속 차도를 건너야 되는 좀 특이한 공원이었다. 여기에 조형물도 만들고 꽃도 심었는데 특이한 것은 각 꽃집에서 맡아서 화단을 조성하면서 자기들 꽃집을 선전을 하도록 해 두었으므로 경쟁적으로 화단을 예쁘게 잘 만들어서 꽃이 잘 피고 있었다. 조형물은 특이하게 물이 솟고 흘러내리도록 만든 분수가 많았고, 동상이나 다른 조형물도 좀 있었다. 분수 가에도 사람들이 앉아서 쉬지만 나무 밑 벤치에는 노숙자가 많이 허름한 복장으로 누워서 자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한 벤치에는 청년이 앉아 있고 그 위에 처녀가 이상한 자세로 올라타서는 포옹을 하고 있었는데 아가씨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 안 하는 듯하였으나 청년은 좀 무안해하는 눈치였다. 이제 우리나라 거리에서도 좀 심한 장면을 목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곳 일본은 좀 더 한 것 같았다.
계속 걸어서 끝에 있는 텔레비전 탑까지 가보기로 하고 걸어가면서 사진도 찍고 하였다. 중간에 예쁘게 꾸민 리어카에 옥수수랑 간식을 파는 아줌마들이 있었는데 이것이 삿포로시 관광협회에서 규격을 통일하여 지저분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행 안내서에 적혀 있는 대로 옥수수라는 말을 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한국어로 써 두었으니 우리나라 사람이 많이 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멀리에 있는 2002년 월드컵을 일본과 한국에서 연다는 아치도 이 삿포로에서 처음으로 보았었다.
텔레비전 탑 앞에는 좀 너른 터에 의자를 많이 놓고 둘레에 맥주나 스낵을 파는 상점이 여럿 있었다. 삿포로는 맥주가 유명하다고 하였으나 너무 비싸서 참고 탑으로 올라갔다. 3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는데 이곳에서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데에는 입장료를 700엔씩 받고 있었다. 일본인들의 상술에 기가 막혔지만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 우리 부부는 그냥 3층을 둘러보고 내려왔다. (구두쇠 작전이 좀 지독했나.)
탑에서 돌아 나오니 다리도 아프고 하여 공원 입구 벤치에 앉아서 좀 쉬었다. 그런데 거기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아니 이곳에도 지하 상가 같은 것이 있단 말인가. 우리 부부는 호기심에 내려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기다란 오도리공원의 아래는 텅 빈 지하 상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금 전에 지상으로 걸어간 길을 반대로 지하로 상가를 구경하면서 우리 부부는 이 길을 걸어 다시 되돌아 왔다.
무엇을 탈만한 거리는 아니고, 다리는 아프고 터덜터덜 걸어서 호텔로 돌아왔다. 속으로는 내일 저녁 5시 50분에 센다이에 도착하면 늦게 어떻게 호텔을 구할 것인가 하는 걱정도 좀 있었다. 그렇게 힘없이 걸어 호텔로 돌아오니 프론트의 두 아가씨가 반가이 맞이해 주었다. 우선 방으로 들어가서 땀을 샤워로 좀 씻고 쉬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23) 삿포로(札幌)의 밤거리
  
호텔에 돌아온 우리 부부는 우선 샤워를 한 후에 좀 쉬기로 하였다. 오늘 하루 피곤하였으므로 좀 쉬고 나서 저녁 식사를 하러 갈 생각으로 침대에서 오늘 구한 팜플렛이나 지도 따위를 뒤적이며 메모도 하고 다음 여정도 의논하고 하였다. 그런데 이 때에 테이블 위에 놓인 이 호텔의 팜플렛을 우연히 뒤적이다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였다.
표지에 ‘TOYOKO INN HOTEL CHAIN'이라고 씌어 있어서 그럼 이 호텔이 체인인가 하고 펼쳐보니 일본 전국에 36개의 체인망이 소개되어 있었다. 내일 가게 되는 센다이에는 모두 3개의 호텔이 있는데 역에서 동문으로 나가면 일호관, 이호관이 있고, 서쪽 문으로 나가도 있었는데 모두 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이며 가격도 더불룸이 8,000엔 정도였다. 그렇다면 한 가지 걱정은 덜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바로 프론트로 내려갔다.
프론트의 아가씨에게 내일 센다이로 가는데 예약을 할 수 있겠느냐고 부탁을 하니 친절하게도 이 아가씨가 센다이로 전화를 걸어서 예약을 해주었다. 1호관에는 빈방이 없고 2호관에는 트윈룸이 남아 있다고 하면서 2호관이 새로 지어서 더 깨끗하고 좋다고 예약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트윈룸을 9000엔이라고 하여 예약을 해달라고 하였다. 이름만 대면 예약이 되고 선금을 낼 필요는 없지만 위약을 하면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 호텔에 숙박할 때에 여권 번호를 적었으므로 위약금을 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우선 예약을 하고 나니 한 시름 놓게 되었다. 모레 가게되는 도쿄에도 예약을 했으면 하는 마음도 생겼으나 이건 센다이에 가서 예약을 하면 될 듯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이렇게 쉽게 예약이 되어서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하여튼 이곳 삿포로에서도 이 도요코인이 가격과 시설면에서 괜찮았는데 앞으로도 이 호텔을 이용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참으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이제 호텔이 정해지니 마음이 놓이고 저녁 산책 겸 식사도 하리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거리로 나가기로 하였다. 프론트에서 번화가를 물으니 아케이드가 거리를 가르쳐주는데 이 삿포로가 바둑판 같은 도시라 길을 물을 필요도 없이 그냥 거리를 걸어가면 쉽게 찾을 수 있는 그러한 길이었다.
삿포로의 밤거리는 잘 계획된 반듯한 도시라서 그런지 길도 찾기 쉬웠고, 야경도 아름다운 그러한 곳이었다. 이쪽 거리도 끝없이 곧게 이어져 있고, 저쪽 거리도 곧게 이어져 있는 그러한 거리를 사람들이 바쁘게 걸어다니고 네온도 밝은 그러한 곳이었다. 물론 길가에 주차되어 있는 차가 전연 없으니 매연이나 정체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길가에 주차되어 있는 예쁜 차가 있어서 보니 네모 반듯한 승합차 같은 것을 바깥에 예쁘게 그림을 그리고 꾸며서 무언가 팔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바로 나가사키에서 사먹은 그 다꼬야끼를 파는 차였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휴지를 주는 아주머니나 아가씨가 간혹 있었는데 이 휴지에는 선전하는 글귀가 가득 씌어 있었다. 아내는 한국에서 내가 필요 없다고 하여도 걱정이 되어서 휴지를 두 가지나 준비해 갔는데 이제 또 이렇게 주는 것을 자꾸 받아서 모으더니 이제는 지쳤는지(?) 거절하면서 걸어갔다.
드디어 프론트의 아가씨가 가르쳐주는 아케이드가 있다는 번화가에 도착하였다. 이 거리도 오사카의 그 상가와 비슷하였는데 다만 지붕이 없이 더 거리가 넓고, 역시 바닥은 보도 블록으로 잘 포장이 되어 있었다. 사람은 오사카보다 적었으나 그래도 양쪽 상가에는 라면 같은 음식을 파는 곳과 예의 그 빠찡꼬를 하는 곳이 많이 있었다.
한 곳에는 허름하게 차려입은 청년이 기타를 치면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 힐끗 보면서 지나가지 관중은 딱 한 소녀가 있을 뿐이었다. 그 소녀는 이 청년의 팬인 듯 나중에 올 때에 보아도 앞에 딱 마주보고 앉아서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이 청년은 그 아가씨가 들어주므로 해서 힘을 내어 계속 부르는 듯하였다. 아, 뉴스에서 일본의 거리 악사 이야기가 나오더니 바로 저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좀 걸어가니 제법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둘러서서 구경을 하고 있는 곳이 있어서 가보니 서양인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 사람 요즈음 분무식으로 만든 유성 페인트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여러 색깔의 페인트를 뿜기도 하고, 여러 가지 물건이나 종이를 얹어 놓고 그 위에 뿜어서 나중에 문지르기도 하면서 꼭 인쇄된 그림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 삼 만 엔씩 가격을 붙여 놓고 있었는데 수익금은 유니세프(UN아동기금)에 기부한다고 하였다.
나는 라면처럼 국물이 있는 것을 먹고 싶었는데 아내는 그 냄새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회전 초밥 집이 나타나자 들어가서 먹자고 하였다. 이러한 산책길에는 항상 조그마한 배낭(주머니)을 메고 다녔으므로 그 속에 팩 소주도 있고 하여서 나도 좋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집은 오사카의 그 회전 초밥 집 보다 가격이 조금 더 비싼 편이었다. 즉, 접시의 종류가 달라서 그 접시마다 가격이 다른데 400엔, 300엔, 200엔, 150엔, 100엔 등이었다. 그런데 100엔 짜리는 별로 먹을 수 있는 것이 못되었다. 그저 오징어를 얹은 것 등이었고, 적어도 150엔 이상은 되어야 그럴듯하였다. 400엔 짜리는 좀 나은 듯하였으나 하나 내려 먹어보니 맛이 퍽 더 좋은 것도 아니어서 그냥 대개 150엔 짜리를 많이 먹었다. 옆의 손님들도 보니 거의가 150엔 짜리를 먹었다. 여기 한국인이 제법 많이 오는지 갑자기 초고추장을 얹은 초밥이 등장하였다. 이건 맛이 어떤가 내려서 먹어보니 우리나라 초고추장과 거의 다를 바 없어서 모처럼 입이 개운한 그러한 초밥을 먹어보았다. 물론 팩 소주를 마시면서 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길거리의 공중 전화로 한국에 전화를 걸었다. 오면서 온다는 말도 안한 처가 집에 걸었더니 장인 어른이 받으셔서 반갑게 어디냐고 하신다. 삿포로입니다. 아, 좋은 곳에 갔구나. 젊으니 좋기는 좋다. 그래, 더 늦기 전에 구경 잘하고 무사히 돌아오너라. 대략 이런 대화를 나눈 것 같다. 하여튼 반가와 하시니 고맙고, 당신의 딸 잘 데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이 후에 한국으로 전화를 거는 것이 그렇게 힘들 줄은 몰랐었다. 이 때에는.
이제 내일부터는 다시 일본열도를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어쩌면 내일 해저 터널을 관광하게 된다는 생각으로 호텔로 돌아오자 깊은 잠에 빠졌다.

(24) 해저 열차에서 만난 소년
  
8월 22일 화요일.
  7:00 - 10:12   삿포로->하코다테
10:59 - 14:34   하코다테 -> 아오모리
14:41 - 16:52   아오모리 -> 모리오카
17:02 - 17:54   모리오카 -> 센다이

내가 가지고 있는 열차 표는 다음날 도쿄로 가는 것을 빼면 오늘 탈 표가 모두 네 장이다.(지금 이 글을 적고 있으면서도 이날 너무 무리하였다는 생각을 하며 크게 후회하고 있다. 이렇게 무리하지 않는 건데. 그 때에는 이게 아주 좋은 계획이었다고 전날 삿포로 역에서 직원과 의논하여 결정하고 표를 예매했었다.) 서둘러 6시에 삿포로 역에 들어섰다. 역구내에서 무언가 아침 식사를 하고 7시에 출발하는 하코다테 행 열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하코다테까지의 여행은 어제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 때문에 별 다른 점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홋카이도의 흙이 다른 곳보다는 좀 검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곳 사람들이 혼슈의 사람들보다는 좀 키가 크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가는 길에 무로란을 멀리 바라보고 가는 것도 같았고, 옥수수 밭이 많고 경작하지 않은 곳도 많았었다. 신칸센을 홋카이도로 유치하려는 현수막이 몇 군데 보였고, 화산으로부터의 재해를 보상해달라는 현수막이 있는 것도 보았다. 호텔의 TV에서는 어느 섬에 화산이 폭발하였다느니, 지진이 발생했다느니 하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역시 화산과 지진, 온천이 많은 일본임을 실감하게 하였다.

10시 12분에 정확하게 하코다테에 도착하여 해저 열차를 기다리니 좀 이상한 색칠을 많이 하고 인형모양의 인물 캐릭터를 크게 옆에 그린 열차가 들어왔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부모가 함께 타는 사람들이 제법 눈에 뜨이어서 역시 관광열차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객차에 타보니 우리나라 보통 급행 열차 정도의 시설이어서 크게 실망했다. 청소를 방금 끝낸 바닥에는 물기가 남아 있었고, 냄새가 칙칙하게 나는 것이 객차 자체가 노후한 것이었다.
우리 부부의 앞좌석에는 젊은 부부가 아들 한 명을 데리고 탔는데 객차 안에 손님이 적고 너른 관계로 우리 앞좌석에는 아들과 아내가 앉고 남편은 통로 반대쪽에 혼자 앉았다. 남편은 키가 아주 작았으나 체구는 제법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몸짓으로 자기 덩치 만한 배낭을 들어서 짐 얹는 선반에 올리고는 혼자 비스듬히 두 사람 분의 의자에 앉았다. 그 아내는 일본 여인으로서는 중 이상의 키에 교양 있게 생겼는데 일본 아이로서는 제법 말쑥하게 생긴 자그마한 아들과 함께 앉았다. 행복한 가족 나들이인 모양이었다.
아무튼 열차는 정확하게 10시 59분에 출발하였다. 객차의 전광판이 있는 곳에는 액자 같은 것이 있어서 해저 터널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는데 왼쪽 아오모리  역 쪽에서 지하로 내려간 터널이 땅 밑을 지나고, 바다 밑을 지나 다시 땅 밑을 지나서 하코다테 역에 이르는 완만한 V자 모양의 세이칸터널이 그려져 있었다. 그 아래에는 전광판이 있어서 안내를 하고. 열차가 출발하기 전부터 안내 방송은 어린이 목소리로 해저 열차를 탄 관광객을 환영한다는 말과 함께 여러 가지 안내를 하였지만 초보 일어 실력으로 스피커에서 나오는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기는 힘이 좀 들었다.
한참을 달리던 열차가 9개쯤의 작은 터널을 지나고서야 이윽고 해저 터널로 들어섰다. 거제서야 방송으로 해저 터널에 대한 자세한 안내가 시작되었다.  방송으로 나오는 말을 잘 알아듣지는 못하였으나 안내 책자에 의하면 1988년 3월 13일 개통된 이 해저 터널은 공사 기간이 42년이 걸렸고, 공사비만 700억 엔이 들어갔으며 길이가 총 53.85km로 해저부분은 23.3km이고 가장 깊은 부분은 바다 밑 240m나 되는 부분도 있다고 하였다.
그 때에 전광판을 보니 그 전광판에 그려진 해저터널이 진한 색으로 표시가 되고 있었다. 즉, 열차가 1km 나아갈 때마다 표시가 되어서 진한 점으로 이 열차가 해저 터널의 어디쯤 통과하고 있는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 터널의 하코다테 쪽에는 요시오카(吉岡:よしおか) 역, 아오모리 쪽에는 답삐(龍飛:たっぴ) 역의 두 해저 역이 있었는데 우리가 탄 열차는 점차 요시오카 역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열차가 요시오카 역으로 다가가니 안내 방송이 나오는데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자세히는 들을 수 없었으나 대략 1시간 정도 내려서 관람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열차가 1시간 동안 서면 어떻게 관람을 한다는 말인가?
할 수없이 비스듬히 누워 있다가 방송을 듣고 자세를 가다듬고 짐을 챙기려고 하는 그 앞좌석의 키 작은 남자에게 물었다. 좀 빠르게 방송이 되어서 무슨 말인지 모르니 천천히 좀 설명을 해달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우리가 탄 열차는 떠나가고, 내린 사람은 1시간동안 관람을 하고 나면 다음 열차가 와서 실어간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그렇다면 아오모리에 도착하는 시간이 1시간 늦어지게 되고 모리오카로 가는 열차를 탈 수 없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사정을 이야기하니 이 사람이 내 열차 표를 보고는 삿포로에서 표를 예매할 때에 벌써 1시간의 여유를 두고 예매하였으므로 괜찮으며 자기도 역시 나와 같은 열차를 아오모리에서 타게 되어 있다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삿포로에서 어제 내가 예매할 때에 역 직원에게 의논을 할 때, 이 역 직원이 좀 불친절한 듯하였으나, 잘 계획을 세워서 이 해저터널을 관람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그 역 직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또 이 사람이 자세히 안내를 해주니 고맙기도 하였다.
이렇게 말을 시작한 두 집 식구들은 제법 친해져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특히 그 어린아이가 무척 우리 부부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좋아하는 눈치였다. 친절히 안내를 해주고 고맙게 대해 주어서 아내와 의논을 한 후에 또 그 초등학교 학습장을 선물로 주기로 하였다. 별로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그 아내에게 여러 모로 고맙게 대해 주어서 선물을 하려고 하지만 여행중이라 마땅한 것이 없지만 받아주면 좋겠다고 말하며 학습장을 주었다. 그 어린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그만 내가 실수를 해버렸다. 너무도 어린이가 귀여워서 내가 3학년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어머니가 아주 안색이 걱정스럽게 변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키가 작아서 하면서, 6학년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아버지가 키가 작아서 그런가보다고 생각을 하였지만 너무도 미안하기만 하였다.

드디어 세계 최초의 해저 기차역인 요시오카역에 열차가 당도하였다. 다른 열차를 타게 될 것이므로 우리들은 가진 짐을 모두 가지고 열차에서 내렸다. 희미한 조명이 비치는 컴컴한 터널에 내리니 조금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 지나갈 때에 가로로 뚫려 있는 비행기 격납고 같은 것을 보았는데 역시 그 쪽으로 안내를 하였다. 우리와 같이 내린 사람은 고작해야 어른 아이 합해서 20명 정도로 아마도 우리 객차에 탔던 사람이 모두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었다. 다른 많은 객차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타고 온 열차를 돌아보니 컴컴하고 비스듬히 구부려진 터널에 길게 괴물 같은 모습을 하고 저 멀리 굴이 이어지는 곳으로 뻗어 있다. 역 직원들이 내린 관광객을 안전하게 안쪽으로 안내를 하고 나서 열차를 출발시키고 있었다. 요란한 열차의 굉음을 뒤로하고, 우리들은 안내하는 한 사람의 정복 직원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거기에 선반 같은 것이 있어서 우리들의 짐을 올려놓도록 하였다. 간편한 차림으로 역구내를 관람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지하 역에서 내려 터널과 수직으로 10여 미터를 나아가니 바로 거의 터널과 평행으로 긴 터널이 나타났다. 바닥도 콘크리트고 사방이 콘크리트로 되어 있는 굴속을 안내를 받으면서 나아가는데 이 곳은 터널과 달라서 그렇게 어둡지는 않도록 조명이 되어 있었다. 가는 도중 천장에 환기와 조명을 위한 기구들을 수리하고 있는 직원이 몇 명인가 있었는데 안내하는 분은 이상이 있어서가 아니라 항상 터널 내부를 점검하고 고장이 나기 전에 수리하고 손을 본다고 설명을 하였다.
이 때부터 일본인 세 식구는 우리 부부를 안내도 하고 배낭을 올리는 것을 돕기도 하고 하였는데, 특히 그 소년은 무척 나나 아내에게 웃으면서 따르고 함께 다니는 것을 즐거워하는 듯하였다. 조금 나아가니 ‘해저요시오카(かいていよしおか)’라고 써둔 곳에서 사진을 찍어라 고 하였다. 관광객들은 거의 모두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우리 부부는 그 소년을 데리고 가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소년도 무척 좋아하였다.  소년의 부모는 번갈아 우리 부부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여서 나도 그들 가족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조금 더 나아가니 이 역(역이라야 터널뿐이었지만) 안에서 기념 사진을 찍은 것을 전시한 곳이 있어서 많은 사진을 구경하였다. 특히 신혼 부부들이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린 듯한 사진이 여러 장 눈에 띄었다.
이렇게 터널과 평행으로 (실은 갈수록 터널과는 좀 거리가 멀어지는 듯하였다.)나아가, 50 여 미터쯤 가서 일단의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이제 관광을 마치고 다시 열차를 타러 가는 듯하였다. 우리 일행처럼 어린이가 많았고 특히 여자 어린이 모양으로 분장을 한 여자가 탈을 쓰고 손을 흔들어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아마도 골프장에서 사용하는 차(내가 견문이 좁아서 이름을 몰라 이 글을 써다가 골프장에 문의해보니 골프차 라고 하였지만) 같은 것을 한 사람이 천천히 운전을 하고 그 위에 이 여인이 타서는 그 일행을 안내를 하고 계속 손을 흔들었다.
이곳이 삼거리가 되어 있어서 우리는 오른쪽 터널 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안내를 받으면서 걸어 나아갔다. 도중에 무엇이 있으면 이 안내하는 역 직원이 설명을 하였는데 나는 좀 알아들으려고 앞에 서 있었더니 나를 보면서 설명을 하면서 동의를 구하기도 하고, 재치 있는 말을 할 때면 모두들 웃고 하였는데 나는 잘 못 알아들어서 그저 빙긋 웃기만 해주었다. 사실 영어고 일어고 농담이나 우스개 말이 가장 알아듣기 힘든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이곳 통로를 꽤 오래 지나갔는데 아마도 한 100 미터쯤은 될듯하였다. 길옆에는 하수도가 있었는데 이 해저 터널에는 물이 많이 스며 나와서 이렇게 하수도를 통하여 터널의 양끝으로 흐르게 한 후에 배수 펌프로 지상으로 내어보낸다면서 그 물이 해수 몇%, 담수 몇 %이고 하루에 몇 톤씩 퍼낸다고 설명을 하였다. 조금 더 나아가니 왼 쪽 벽에 이 터널을 파는데 대한 기록이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고, 이 터널을 자세히 소개해 놓고 있었다. 거기에서 또 자세한 설명이 있었다.
거기 그려져 있는 도면을 보니 이 터널을 자세히 알 수가 있었다. 우선 열차가 지나가는 터널이 본갱(本坑:ほんこう)으로 높이가 7.85m, 폭이 9.7m인데 3층 빌딩 높이이고 신칸센이 통과할 것을 대비하여 만들었다. 다음으로는 이 본갱과 평행으로 작업갱(作業坑:さぎょうこう)와 선진도갱(先進導坑:せんじんどうこう)이 있었다. 그리고 이 본갱과 평행인 갱도와의 사이에 연결하는 연락유도로(連絡誘導路)가 세어보니 40개나 되었다. 또 양쪽 두 역에서 바깥쪽(즉 하늘로) 사갱(斜坑:しゃこう), 입갱(立坑:たつこう), 케이블사갱(ケ-ブル斜坑)이 있었다. 그리고 공기 정화와 배수를 위하여 배연갱도(排煙坑導)와 배수기지(排水基地)가 역시 양쪽 역에 있었다.
나는 이제까지 터널이 그냥 뚫려져 있는 줄 알았는데 도해를 보니 주 터널 이외에 이 주 터널과 평행으로 작업 터널이 있고, 수직으로도 많은 터널이 뚫려서 주 터널이 잘 건사되도록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열차를 타고 달릴 때에 만나는 짧은 터널과는 달리 이렇게 길고 깊은 터널이면 이래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좀 더 나아가니 도라에몬광장(ドラえもん廣場)이라고 하는 곳에 다다랐다. 이곳이 아마도 이 해저터널 관광의 마지막 종점인 듯 이 곳에서 20 분쯤 쉬다가 다시 모여서 돌아간다고 하였다. 이곳이 이제까지의 터널과는 달리 넓은 광장으로 되어 있었는데 일반 강당만큼의 넓이를 가지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는 데에는 벽에 형광 물질을 칠하여 (어떤 노래방에 가면 그러하듯이) 이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 벽에는 여러 가지 해양 물고기를 기르는 수족관이 있어서 둘러보게 하였는데 별로 많은 물고기나 볼만한 것이 없어서 일행 중 눈 여겨  보는 사람은 없었다.
입구에서 보니 저쪽에 공연장처럼 넓게 해두고 의자를 놓아둔 곳이 보였다. 일행이 들어서자 직원이 나와서 종이로 된 모자를 전부 씌워주었다. 남자 어른은 씌워주지 않아서 나중에 나는 그들 직원이 앉아 있는 곳에 가서 하나 얻어서 썼다. 그 옆에 팜플렛이 있어서 그것도 구하였다. 그리고는 ‘도라에몬’이라는 캐릭터가 나타나서 천천히 어린이들과 어울리니 어린이들이 좋아라 고 쫓아다녔다. 이 캐릭터의 이름 앞에 ‘도라(とら:虎)’가 있는 뜻은 알법하였다. 얼굴 모양이 손오공처럼 생겼는데 호랑이 수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귀엽게 생긴 사람 만한 이 캐릭터가 천천히 움직이면서 돌아다니는 것도 어린이들에게는 즐거움이었다. 이 캐릭터의 얼굴은 종이모자에도 있었고, 열차의 객차 바깥쪽 옆에도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모자에는 ‘도라에몬 이벤트 3주년’이라고 씌어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3년 차 이렇게 관광객을 끌고 있는 듯하였다.
아내는 어린이들이 노는 것이 귀여운 듯 함께 소꿉놀이 집처럼 꾸며 놓은 집(도라에몬하우스:ドラえもんハウス)의 이층에도 올라가 보고 즐겁게 구경을 하였다. 어린이들은 옆에 몇 대 놓여 있는 전자오락기도 하면서 즐거워하였다. 나는 그것보다는 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이들이 전시해놓은 터널 파는 기계 등을 둘러보았다. 한쪽 구석에는 기계실로 좀 큰 소리를 내면서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는데 아마도 환풍기 따위인 모양이었다. 다른 한 쪽에는 이 터널을 팔 때의 기계들을 전시해 놓은 곳이 있었는데 보는 이가 없어서 그런지 컴컴한 곳에 영화에서 보던 둥글고 땅을 파들어 가는 기계가 전시되어 있었다. 혼자 어두운 굴속을 자꾸 들어가서 구경하는 것도 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사진만 찍고 돌아 나왔다.
이곳에서의 관람은 정말로 아내가 기분이 좋은 듯하였다. 특히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야기할 거리가 너무나 많아서 좋은 듯하였다. (아내는 동생이 자그마치 6명이나 된다.) 안내원이 모이라고 하기 전에 더 많이 보고 싶어서 소꿉놀이 집 같은 그 집을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하였다.
드디어 안내하는 직원이 우리들을 모았다. 돌아가는 길은 역시 오던 그 길을 그대로 돌아왔다. 저 쪽에서 올 때에 보았던 그 커다란 탈을 쓴 아가씨가 골프차 뒤에 타고 손을 흔들면서 지나갔다. 그런데 일하던 역 직원들이 몇 몇 지나가면서 그 아가씨와 또 우리 안내 직원에게 길을 묻는 것이 아닌가.  그랬구나. 이 역의 직원들도 이 미로 같은 터널의 지리를 잘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겠지.
올 때의 삼거리에 우리가 당도했을 때에 저쪽에서 새로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관광을 하러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매 시간 이렇게 사람들이 관광을 하러 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 일행이 수가 가장 적었고, 다른 일행은 모두 한 30명쯤은 되는 듯하였다.
우리 일행은 짐을 맡긴 선반에서 자기 짐을 찾아 처음 열차에서 내렸던 곳으로 갔다. 거기 새로운 열차가 들어오면 새로 관광객이 내리고 우리가 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우리와 스쳤던 일행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아마도 한 시간에 두 번씩 관광객이 내리는 듯하였다.

드디어 열차가 굉음을 내면서 세이칸 터널로 진입해 들어왔다. 지하 역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들어오는 열차 소리는 정말 요란하였다. 역 직원들은 혹시나 승객이 다칠세라 좁은 터널에서 관람을 마치고 온 승객을 잘 대기시키고 열차에서 새로운 관람객이 내리도록 하였다. 역시 우리 일행과 비슷하게 어린이들이 많이 섞인 관람객이 30명쯤 내렸다. 그들이 우리 옆을 지나 지하 통로로 가고 나서 우리에게 열차에 오르도록 하였다.  이번 열차도 역시 해저열차로, 밖에는 예의 도라에몬이라는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차표에 있는 데로 그 객차, 그 좌석 번호에 앉으니 되었다. 그런데 객차는 전번보다는 훨씬 더 깨끗하고 좋았다.
좌석에 앉아 조금 가다가 소년이 사탕 몇 개를 우리에게 건네어 주면서 싱긋 웃었다. 아니 그 어린아이에게서 음식을 받아도 되는 걸까. 우리 부부는 한참을 망설였다. 우리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당황한 어머니가 싫으면 돌려 받겠다고 하였다. 이거 참 더 난감해졌다. 이 사탕을 돌려주면 더욱 곤란할 것 같아서 내가 여러 가지 말을 하였는데 이게 엉터리 일본어여서 더욱 의사소통이 잘 되지를 않았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고맙게 받지를 않고 은근히 사양하는 풍습이 있는데 이 일본 여인이 그걸 알 까닭이 없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사탕을 받았다. 자, 이걸 받고 보니 또 마음에 걸리었다. 너무도 많은 안내를 받고 고맙게 해주었는데 사탕까지 받고 보니 고작 학습장 한 권으로 때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가다가 우리 부부가 생각해낸 것이 팩 소주였다. 아직 제법 몇 개 남아 있는 팩 소주를 하나 선물로 주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였었다. 그런데 이것이 이제 세 번째의 실수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팩 소주를 전하기 전에 그 부인에게 이제는 제법 능숙한 일본어로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말을 붙였다. 대략 마음을 전하는 말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과, 우리 부부에게 너무도 고맙게 해주었기 때문에 무언가 좀 예를 표시하고 싶은데, 적당한 것이 없어서 마침 가지고 있는 이 소주를 드리겠다는 말을 하였었다. 이 때에 내 마음속에는 몇 년 전에 본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정말이지 그냥 단순한 의사 소통은 그럭저럭 해결해나가고 있는데 마음을 전하는 말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느껴본 날이었다. 소주 팩을 받은 부인이 드러누워 있는 남편에게 소주라면서 무어라 이야기를 하면서 전하니 그 남편이 무척 반갑고 고마운 말을 하면서 소중히 받아서 배낭에 넣었다.
14시 34분에 아오모리에 도착하여 모리오카행 열차는 14시 41분에 출발하므로 우리는 서둘러서 열차를 갈아타야 하였다. 우리는 5호 객차를 타는 차표를 가지고 있었고, 소년과 그 부모는 3호 차를 타는 차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이의 아빠는 우리 부부를 객차가 있는 승강장까지 안내를 하고 헤어졌다. 아쉬운 듯 소년이 손을 흔들면서 그렇게 그들 가족은 3호 차에 승차하였다.
5호 객차에 오른 우리는 좌석을 찾아 앉아서는 소년과 그 가족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니, 그런데 열차가 출발하여 얼마 가지 않아서 그 소년이 우리 객차로 온 것이었다. 소년이 우리 앞 빈 좌석에 앉자 아내는 무언가 해주고 싶어서 먹을 것을 주기도 하고 어쩔 줄 몰라했다. 소년도 너무도 정겹게 그렇게 우리와 한참을 가면서 이야기도 나누고 하였다. 그런데 소년과 함께 찍은 사진 생각이 나서 나는 이걸 부쳐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소년에게 주소를 물었다. 그랬더니 소년은 아버지에게 물어보아야겠다면서 일어서서 갔다. 우리 부부는 소년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소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내가 저지른 실수를 생각해보았다. 6학년 학생을 3학년인가 하고 물은 것이 첫 번째 실수였다. 사탕을 주는 것을 마지못해서 받는 시늉을 한 것이 두 번 째 실수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소주 팩이 나중에 생각하니 실수였던 듯하였다. 나중에 도쿄에서 보니 한국의 소주 한 병이 2,000엔 혹은 2,500엔에 팔리고 있었다. 이런 것을 주었으니 그 부모가 당황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네 번째로  소년에게 주소를 물으면서 사진을 부쳐 주려고 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물었으므로 혹시 그 부모가 어떤 다른 생각을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고도 생각해보았다.
하여튼 소년은 오지 않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하면 그 때에 내가 3호 차로 가보았어야 하는 게 나았겠다 는 생각이 든다. 그랬으면 혹시 있었을지도 모르는 오해가 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그 때에는 소년이 오도록 기다리다가 그렇게 열차가 모리오카에 도착하고 말았다. 그들 가족은 모리오카에서는 만날 수 없었다. 도중에 내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도 그 소년의 가족들과 함께 관광을 한 해저 터널에서의 추억은 그리워오면서도 그렇게 헤어진 것이 마음 한 구석에 아쉬움으로 남는다.

(25) 센다이에서 도쿄로 - 불행의 시작

아오모리에서 모리오카까지 가는 데에는 2시간도 더 걸렸지만(2시간 11분) 모리오카에서 센다이까지는 신칸센을 탔으므로 52분만에 갈 수 있었다. 그래도 좀 늦은 오후 5시 54분에야 센다이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센다이 역에 내려 계단을 통하여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안내가 있었다. 안내에 가서 도요코호텔을 물으니 지도를 내어놓고 하는 말이 여기가 3층이므로 3개 층을 내려가서 어쩌고 하면서 지도에 표시를 해주면서 찾기 쉽게 안내를 해주었다. 아니, 그렇다면 우리가 타고 온 신칸센은 역에 들어올 때에 4층 높이로 들어왔단 말인가.
하여튼 어두워지는 센다이 역을 벗어나서 조금 걸어가자 어제 예약할 때의 안내처럼 5분 이내에 도요코 호텔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곳은 1호 관이었고, 바로 뒤쪽에 2호 관이 있었다. 예약한 그대로 내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어서 트윈 룸의 키를 받고,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 식사를 500엔에 예약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서 여장을 풀었다.
예약하고 오니 참으로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일 도쿄도 예약을 하기로 하고 프론트로 내려갔다. 프론트에서 내일 도쿄에 갈 예정인데 예약을 부탁한다고 말하니 아무래도 예약이 되지 않을 거라고 하였다. 도쿄에는 모두 8개의 도요코인 체인이 있는데 이런 성수기에는 한달 전에 예약을 해야 된다고 하였다. 아니 이럴 수가. 그래도 전화라도 해달라고 하니 아사쿠사등 몇 군데의 체인 호텔에 전화를 해보고는 역시 없다고 하였다. 그들 말로는 도쿄는 출장 오는 비지네스맨들이 많아서 호텔의 빈방이 거의 없다고 하였다. 그럼 우리 부부는 어디에서 잔단 말인가.
내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프론트의 아가씨들이 저쪽에 가보라고 하였는데 그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프론트의 한 쪽에 조그마한 사무실이 있고 거기에 주식회사 호텔 네트워크(株式會社ホテルネットワ-ク:  Hotel Reservation Network)라고 입구에 씌어 있고 두 아가씨가 전화를 받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서 도쿄에 있는 호텔을 예약하고 싶다고 하니, 이 도요코인 같은 저렴하고 시설이 괜찮은 비지네스호텔은 빈방이 없고, 한 달 전에 예약을 해야 된다면서 다른 호텔을 전화로 알아보고는 13,000엔, 혹은 16,000엔이라고 한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되는데. 나는 내 조건을 내 걸었다. JR역 가까이 있을 것, 10,000엔 이하일 것, 화장실이 붙어 있을 것. 아가씨가 그런 곳은 없다드니 몇 번 전화를 해보고는 JR역 가까이는 없지만 지하철역에서 가까운 곳이 하나 있다고 하였다.
그녀가 호텔의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서 내어놓는 도쿄의 지도를 보니 정말로 이건 완전히 거미줄이었다. 지하철 노선이 15개가 있다는 도쿄이지만 JR노선도 만만치 않게 많이 있어서 도저히 찾아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이 아가씨는 열심히 내게 설명을 하였다. JR도쿄 역에 내려서 야마노테선(山手線)을 타고 우에노(上野)역에서 내려 지하철 히비야선을 타고 가서 이리야 역에서 내리면 바로 역 앞에 이리야스테이션호텔이 있는데 가격도 싸고(7,000엔) 괜찮을 거라고 하였다. 내가 화장실과 샤워가 붙어 있느냐고 물으니, 그렇기는 하지만 좀 지은 지 오래 되어서 허름하다 고 하였다. 어쨌거나 우선 하루라도 지내보고 다시 좋은 호텔을 정하기로 하고 예약을 하였다.
이 아가씨가 그 복잡한 지도를 주면서 지도에 자세히 표시를 해주고 호텔의 전화 번호도 적어주었다. 아마도 이 회사는 이렇게 가입 호텔에 손님의 예약을 해주고 커미션을 받는 듯하였다.
다행히 도쿄에서의 호텔이 예약이 되었으므로 저녁 식사도 할 겸 시내 구경도 하기로 하고 다시 프론트에 번화한 거리를 물으니 중앙통(中央通)으로 가보라면서 센다이 지도에 자세히 안내를 해주었다. 지도를 보니 이 센다이 시도 도시 계획이 잘 된 듯 반듯하게 그려져 있어서 잘 찾아갈 것 같았다.
역시 이 도요코인 호텔도 역의 뒤쪽에 있는 듯 우리 부부는 지하도로 철로를 지나가야 하였는데 그 지하 통로의 양쪽 콘크리트 벽은 온통 콜걸을 선전하는 조그마한 전단지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이 번화가는 삿포로의 번화가와 거의 같았으나 천장이 원형으로 막혀 있었다. 돌아가는 초밥집이 세 곳이나 있어서 아내가 또 먹자고 하였다. 역시 팩 소주와 함께 초밥으로 저녁을 때우고 우리 부부는 호텔로 돌아와서 내일은 도쿄로 간다는 마음으로 푹 잠에 빠졌다. 내일부터 닥칠 불행을 미쳐 예견하지도 못한 채.

사실 지금까지 기행문이라고 이렇게 쓰면서 어쩌면 자기 도취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써내려 가면서 그 때의 그 여행의 감흥을 다시 한번 맛보는 즐거움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쓴 것이다. 그리고 또 사실 이렇게 글을 쓴다는 것이 나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가져다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그만 쓰기가 싫어졌다. 도쿄에서부터의 며칠 간은 정말로 내가 이제까지 여행을 즐기면서 돌아다닌 여러 경우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되새기고 싶지 않은 나날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회한에 괴로워하는 때가 자주 있는데 이를 다시 들추어 글로 쓴다는 것이 나에게는 많은 괴로움을 안겨다 줄 것이리라 지레 짐작이 간다. 여기서 그만 둘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하였다. 그래도 이미 시작한 일이라 이렇게 계속 이어서 쓰기로 한다.

8월 23일 수요일.  아침에 일어나자 아내에게 3만 엔을 주었다. 이제는 내려가는 길이므로 귀국해서 친지들에게 나누어줄 선물을 좀 사도록 하라면서. 특히 이제부터 도쿄에 가서 한 3일 묵을 예정이므로 쇼핑도 좀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보면 그 동안 아내가 무엇을 사고 싶어하는 눈치였으나 너무 비싸고, 또 짐이 될 듯하기도 하여서 못 사게 한 것이 마음에 좀 걸리었다. 하루 만 엔씩 쓰도록 하였는데 사실 일본에서 살 물건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듯하였다. 아마도 국내보다 모든 물가가 대략 3배는 비싼 듯하였기 때문이다. 돈이 적다고 아내는 투덜대었지만 이 돈을 만 엔도 못쓰고 나중에 내게 되돌려주었으니 물론 몸이 불편했던 탓도 있지만 무얼 살려고 하여도 너무 비싸서 살 엄두를 내지 못하였었던 모양이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 식사는 일식으로 500엔 짜리가 역시 작은 쟁반에 담겨져 나오는데 반찬과 밥을 모두 먹어치울 정도로 간단하게 나왔다. 이 때부터 아내는 몸이 좀 안 좋은 듯 말하였으나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제 너무 오랫동안 열차를 탔고, 찬 곳에 오래 있었기 때문이리라. 오늘부터 도쿄에 가면 3일간 이동하지 않고 한 호텔에서 푹 쉬면 좀 나으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빨리 도쿄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센다이 역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열차를 잘 못 타고 말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9시 7분발 도쿄 행 신칸센 열차는 고마치와 야마비코가 있었는데 이 두 열차를 연결하여서 운행하고 있었다. 내 좌석은 야마비코 13호 차 4번 CD석이었는데 이걸 고마치 4호 차로 착각하고 그냥 타버린 것이었다. 4번 CD석에 이미 손님이 있기에 내 표를 보이고 좌석 주인이 나타난 듯이 행세를 하였더니 그 일본인이 자기가 가진 좌석 표를 보여주는데 그게 맞는 것이 아닌가. 아니 내 표를 보니 13호 차로 되어 있다. 열차는 출발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냥 통로로 해서 4호 차에서 배낭을 메고 계속 13호 차까지 가야만 하는 줄 알고 계속 몇 개의 객차를 지나갔다. 그런데 8호 차까지 가니 그 뒤로는 꽉 막혀서 더 갈 수가 없는 것을 알았다.
한 마디로 황당함을 느꼈다. 우선 급하게 옆에 있는 일본인에게 이 열차가 도쿄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역시 도쿄로 간다고 하여서 우선은 마음을 놓았다. 초고속으로 달리는 열차에서 잘못 승차하여 다시 돌아가고 하는 일이 있으면 노력과 시간이 많이 들 것으로 걱정하였는데 우선은 이 열차도 도쿄로 간다니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어디 자유석에 앉을 생각으로 자유석 객차를 찾아 다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직원이 지나가기에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그 직원 두말하지 않고 내 표를 받아서는 13호 차 4번 CD석을 8호 차 2번 DE석으로 고쳐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 좌석에는 손님이 없었다. 고맙게도 이 직원의 배려로 우리 부부는 다시 안도의 숨을 내쉬고 새로운 자리에 앉아서 편안히 도쿄로 가게 되었다.
차창 밖으로 내어다보니 도쿄로 열차가 가까워질수록 집들이 조금씩 작아지고 사는 모습이 덜 풍족해 보였다. 아내는 자꾸 더 불편한 듯이 보였다. 나는 속으로는 좀 걱정이 되었으나 어떻게 좀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여행 안내 책자를 내어서 도쿄에서의 일정을 짜고 있었다. 우선은 우에노 쪽에서 하루를 보내고 그 다음으로는 신쥬꾸에서 하루를, 다음 마지막으로 도쿄 역 앞의 긴자에서 마지막 하루를 보내고는 히로시마로 가서 자고 이튿날 귀국하면 될듯하였다.

내가 책자를 보고 있는데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던 키 크고 잘 생긴 청년이 아주 작은 소리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면서 지나갔다. 나는 얼른 눈치를 챘다. 이 사람이 내가 한국인인 것을 확실히 몰라서 일인들 틈에서 한국말을 한 것이구나. 그래서 내가 조금 더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자 거제서야 보통 어조로 서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들은 14일부터 부산에서 와서 여행중이며 청년 2명 처녀 1명이 함께 여행하고 있었다. 야간 열차로 내려오고 있으며 도쿄에서 다시 오코하마로 가서 친구 형네 집에서 머물 것이라고 하였다. 그 친구 형네 집도 좁아서 그들 셋이 들어가게 될지 걱정이라 면서도 함께 요코하마로 가자고 하기도 하였다. 아내는 몸이 불편한 중에도 야간열차를 타면 즐거울 건데 우리도 나중에 야간열차를 한 번 타보자고 하였다. 이 청년들이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아라 면서 아내를 말렸다. 어쨋거나 도쿄 역에서 내려서 그들은 요코하마로 가는 열차를 타러 갔고 우리 부부는 야마노테 선을 타고 우에노 역으로 향하였다.

우에노(上野) 역에서 내려서는 지하철 히비야선(營團日比谷線)을 찾는데 좀 어려움을 겪고 물어서 드디어 매표소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 있는 자동 매표기는 가격대별로 여러 개가 있었는데 160엔 하는 기계에 이리야(入谷)가 있어서 160엔 짜리 표를 두 장 샀다.  일본에 와서 지하철은 처음 타보지만 국내와 다른 점이 거의 없어서 무사히 이리야 역까지 갈 수가 있었다. 실은 우에노 역에서 바로 첫 역이므로 바로 내렸다. 지하철에서는 일인들이 독서를 많이 한다고 하였지만 별로 그렇지 않았다. 다른 전철을 탔을 때에도 모두들 시달린 봉급생활자들의 고단한 모습만 보였고, 졸고 있는 사람, 멍하니 밖을 보는 사람들이 많았고, 책이라야 포르노를 보는 사람 한 둘, 만화를 보는 사람 한 둘, 그래도 소설이라도 읽는 사람은 눈을 씻고 보아야 한 둘 있을까 말까 하였다. 오히려 우리나라 서울의 지하철에 책 읽는 사람이 더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상으로 올라오니 도쿄의 변두리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별로 넓지 않은 4차선 도로의 네거리 한 귀퉁이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적당히 한 두 개의 쓰레기도 보였지만 길가에 주차한 자동차는 한 대도 없어서 차들은 제 속도로 잘 달리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호텔이 나오는지 방향을 잡을 수 없어서 우선 물어보기로 하였다. 마침 옆 가게에 짐이 도착하여서 좀 못생긴 아저씨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리야스테이션호텔이라는 이름을 대면서 물으니 바로 다음 신호등 있는 곳에서 우측 골목길로 들어가라고 친절히 길 쪽으로 걸어나와서 자세히 일러주었다. 그러고 보니 일본이란 나라는 점원이나 누구나 친절한 거는 똑 같은가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호를 기다려 길을 건너니 인도에 자전거가 많이 주차되어 있는데 거기 경고문이 여기 자전거를 주차하면 끌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불법 주차를 한 자동차는 한 대도 구경을 못하였는데 불법 주차한 자전거는 이렇게 많이 있으니 좀 이상하였다. 이곳에 잡화와 과일 상점이 몇 개 있어서 이렇게 주부들이 자전거를 댄 모양이었다. 좀 전의 점원이 가르쳐준 대로 가니 바로 호텔이 있었다.
허름하지만 높은 건물의 이 호텔에는 노부부가 친절하게 맞이하여 예약된 것을 확인하여 주었다. 세금 포함하여 7,350엔을 내고, 4시에 체크인이라고 하여서 짐을 맡기고 우선 우에노 공원을 찾아 나섰다.

(26) 우에노 공원
  
우선 보기에 호텔의 노부부는 이 호텔의 소유주 같았다. 그들은 아주 친절하게 우에노 공원까지의 지리를 설명하였는데 사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우에노 공원은 우에노 역과 우구이스다니 역 사이에 걸친 넓은 공원으로 이곳은 우구이스다니 역 가까이이므로 여기서 큰길로 나가서 10여분을 걸어가면 바로 당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내도 걷자고 하여서 그대로 얼마 되지도 않은 길이라고 둘이서 걸어서 도쿄 시내 구경도 할 겸 우구이스다니 역으로 향하였다. 도쿄의 순환선 중 가장 안쪽의 작은 순환선인 야마노테선 상에 있는 여러 역 중에서 우에노, 이께부꾸로, 신쥬꾸 등은 큰 역이지만 우구이스다니 같은 역은 아주 조그마한 역이었다. 그냥 간이역 같은데 사람들은 많이도 타고 내리고 하였다.
그런데 이 역 근처에 작고 깨끗한 호텔이 많이 있어서 우리는 지금 머물게 되는 호텔보다는 좀 깨끗하고 싼 호텔이 있는지 기웃거려보고 두 군데는 들어가서 가격도 물어보았는데 모두가 이른바 러브호텔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우리나라처럼 역 근처에는 이러한 곳이 많이 있는 듯하였다.
비스듬한 경사진 도로를 올라가니 바로 우에노 공원임을 알 수 있었다. 주위에 신사 같은 건물들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45도 각도로 바닷물로 뛰어드는 듯한 커다란 고래의 조형물이 있는 건물이 눈에 띄었다. 문패를 보니 도쿄과학박물관이라고 씌어 있는데 어린이들을 데린 부모들이 입장을 하는 모습이 몇 눈에 띄었다. 입장료가 무려 420엔이라 그냥 통과하여 더 나아가니 도쿄국립박물관이 눈에 띄었다. 이 때부터 아내는 몸이 좀 불편한 듯 사진 찍는 것도 싫어하고 어딘가에 가서 좀 쉬어야겠다고 하였다. 저쪽에 분수가 보여서 더 걸어가니 좀 앉아 쉴만한 곳도 있었지만 앉는 곳 중에 그늘이 되는 곳은 이미 지저분한 사람들(아마도 노숙자인 듯)이 차지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곳은 뙤약볕이 쪼이고 있어서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이 곳에서 조금 앉아 쉬었는데 공원이라고는 하지만 주위에 쓰레기 집하장 같은 것이 있고 일꾼들이 작업도 하고 있어서 좀 지저분하였다. 옆에 있는 화장실도 이제까지 보아오던 일본과는 좀 달랐다. 누군가가 도쿄는 지저분하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조금 더 나아가니 동물원이 있었는데 동물원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그 둘레를 돌아 숲길을 한참을 걸어가니 국립서양미술관이 나왔다. 그래도 나는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났는데 아내는 몸이 안 좋다면서 어딘가 가서 쉬기를 원하였다. 할 수 없이 더 나아가니 넓은 곳에 비둘기와 사람들이 엉키어 많이 놀고 있었다. 동상도 보이고 하였으나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날은 덥고 사람들은 많은데 아내는 몸이 불편하다고 하고, 실은 시장하기도 하고 몹시도 지쳐서 구경하는 것도 싫증이 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시노바쥬(不忍池)라는 연못까지 다다랐다. 이곳에는 한 쪽에 보트 장이 있어서 사람들이 보트를 타고 있었지만 돈주고 보트를 탈 마음은 내키지 않아 그냥 이 연못 한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안내 책자에 있는 대로 그냥 걸어서 연못 한가운데쯤 와서는 좀 쉴 생각이었으나 역시 여의치 않았다. 그늘이 있는 벤치에는 예의 그 노숙자(여행객?)들이 모두 차지하여 드러누워 있고, 그렇지 않은 벤치는 뙤약볕이 내리 쬐는 것이었다. 아내는 노숙자 곁에는 가기를 싫어하고 어쩔 수 없이 뙤약볕에 좀 앉아 있으니 자꾸만 가자고 한다. 이 때에는 아내는 벌써 몸이 좀 많이 불편했던 모양인데 나중에 물으니 모처럼 여행을 나와서 남편에게 어려운 처지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억지로 참았다고 한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냥 좀 피곤하구나 하고 생각하였을 뿐이었다.

이제 여기를 나가면 서울의 남대문 시장과 같다는 아메요코(アメ橫)시장에 다다른다. 여기서 ‘아메’란 ‘아메리카’ 즉, 미국을 뜻한다고 한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품을 취급하던 암시장이 발달하여 이러한 시장이 되었다고 한다. 지도를 보고 찾아가지만 꼭 한번 젊은 연인 같은 남녀에게 길을 물어서 드디어 아메요코 시장에 당도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나라 시장과 거의 같다고 말하면 될 것이다. 좌판을 벌인 모습이나, 호객 행위를 하는 것이나, 심지어 싸구려를 외치는 모습도 말만 다르지 우리나라 시장과 같았다. 더구나 어떤 곳에는 아예 우리나라 물건이 그대로 진열 된 곳도 있었다. ‘양반 김’같은 것은 한글로 된 상표 그대로 팔리고 있었다. 그래도 여자의 호기심으로 아내는 물건값을 알고 싶어서 들여다보기도 하고, 내가 가격을 알아주면 관심을 표시하기도 하였지만 이 때쯤이면 아내는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시장을 빠져 나오면서 우리는 점심을 먹을 만한 곳을 찾기 시작하였다. 시장 근처에는 일인들이 간이 식당에서 여러 가지를 사먹고 하여서 우리도 거기에 끼어서 사먹을까 도 생각하였지만 아내가 몸이 자꾸 좀 안 되었는 듯하여서  앉아서 편안히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 때에 아내가 내게 도저히 아파서 못 견디겠다 고 하였다. 참다 참다  이제서야 한계에 다다른 아내가 내게 실토를 한 것이다. 어디 한의원에 가서 침이라도 맞았으면 하고 말하는 아내의 상태를 본 나도 깜짝 놀랐다.
자, 어떻게 한다. 갑자기 이제까지의 모든 여행의 즐거움과, 낯 선 이국 땅에서의 호기심이 싹 사라지고 내게 닥친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생각만 내 머리에 꽉 찼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 일본 땅에서 병원에 간다면 내 일어 실력으로 아픈 상태를 잘 설명하면서 치료를 잘 받을 수 있게 할 것인가? 한의원을 이 도쿄 한 복판에서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과연 여기 도쿄에도 한의원이 있기는 있단 말인가? 내 머리를 스치는 숱한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한편으로 아내를 위로하면서 우선 점심부터 먹자고 권하였다.
그 때에 마침 한 식당의 간판에 메뉴가 있는데 야끼니꾸(燒肉), 비빔빠, 굽빠, 라고 씌어 있었다. 식당에 들어서니 3층으로 올라가라고 하였다. 거기 앉아서 메뉴를 새로 보고 비빔밥과 국밥을 시켰는데 600엔으로 가격도 괜찮았을 뿐 아니라 음식 맛도 모처럼 한국 음식 거의 그대로 여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특히 고추장이 거의 우리나라 고추장과 같은 것이 나왔고, 다른 양념도 거의 우리나라 음식과 같았었다. 몸이 불편함에도 모처럼 한국 음식 같은 것이 나왔으므로 아내도 제법 맛있게 먹는 것 같았다.
나는 아내에게 우선 음식을 먹도록 권하였고, 방석에 앉아서 편안히 좀 쉬도록 하였다. 밥을 먹으면서도 요즈음 흔히 하는 말대로 머리를 굴리면서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도쿄에도 한의원이 있기는 한가?  어떻게 한의원을 찾아간단 말인가. 내 손에는 그 거미줄 같은 도쿄의 철도망이 그려진 지도가 있기는 하지만 과연 찾을 수 있기는 한단 말인가.



(27) 주일 한국대사관으로 도움을 청하다.
  
사람이 위급하거나 중대한 상황에서 결정을 내릴 때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모든 일이 지나가고 나면 그 때에 왜 그러한 결정을 내렸는가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러한 결정을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내리기 쉽다. 그래서 주요한 결정을 내릴 때면 많이 망설여지는 것도 당연하다.
십 여 년 전 형님이 쓰러지셨다. CT촬영 결과는 내가 보기에도 절망적이었다. 뇌의 1/3이 출혈로 손상될 상황에 처하였다. 서양 의학으로는 빨리 뇌수술을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즉, 주사바늘을 꽂아서 출혈된 피를 뽑아내어야 뇌가 살아날 가망성이 높아진다고 하였다. 한의학에서는 안정을 시키고 약제를 복용하여 출혈된 피를 서서히 신체에서 흡수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어느 쪽을 택해야 환자를 살려낼 것인가? 우리 삼 형제 중에 형님은 쓰러져 의식이 없고, 형수님, 아내, 동생, 제수씨 모두들 내 얼굴만 걱정스러운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다. 어쩐다. 시간이 흘러가고 빨리 결정을 내려야하고 그것이 앞으로 중대한 결과를 가져올 결정이고. 이제까지 내가 내려야하였던 결정 중에 가장 중대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나대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결정을 하고 여러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나중에 그 결과가 어떻게 되고, 지나간 후에 이 결정이 어떠하였다고 후회하여도 할 수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가장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하고 우선 한의학에 맡깁시다. (나중에 그 결과가 좋지 못하였다면 이런 글도 감히 쓰지 못하였을지 모른다.) 그리고 나서 한의에서의 치료 결과가 다행히 좋아서 지금 형님은 많이 쾌차하셔서 제법 건강하게 생활하신다.  
지금 또다시 내 앞에 곤란한 일이 생기었고, 아내는 걱정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번에는 아무런 친지나 가족도 없고 의논할 상대도 없다. 낯선 이국 땅에서 과연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가고 아내를 데리고 무사히 귀국할 수 있단 말인가? 겉으로는 아내를 안심시키면서 음식 맛이 좋으니 많이 먹어라 고 권하면서도 속으로는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었다.
그렇다. 외국에서 곤란할 때에는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당연하고 옳은 일이다 하는 생각이 그 때에 내 머리 속에 떠올랐다. 이제까지 세금을 많이도 내었는데 당연히 재외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그들 대사관 공무원들에게는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까지 권위주의 시대에 주일 대표부시절부터 별의별 좋지 않은 주일 대사관의 소식들이 신문에 실리고 하였었는데 과연 그들이 친절하게 이 곤란한 여행객을 보살펴줄 것인가는 차치하고라도 우선 전화라도 걸어야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고 간 여행 안내 책자를 펼쳐보니 분명히 주일 한국대사관 전화번호가 나왔다. 이 때만큼 이 책자의 저자들이 고마울 때가 없었다. 그런데 속으로 생각하니 바로 대사관으로 전화를 하는 것보다는 재외 국민의 일을 담당하는 영사관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였으나 도쿄에는 영사관이 없어서 주일 한국대사관 영사부 라는 곳으로 전화를 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식사가 끝나자 아내를 데리고 우에노 역으로 향하였다.

아메요코 시장에서 나와 식당까지 걸어갔으므로 식당에서 바로 우에노 역이었다. 역에 들어서서 IC전화기를 찾으니 바로 앞에 있었다. 아내를 쉬게 하고 한국대사관 영사부로 전화를 걸었다. (주일본 한국대사관  03-3452-7611~9 : 한국대사관 영사부 03-3455-2601~4) 과연 민주 정부의 대사관 직원은 친절하게 재외국민을 잘 보호해줄 것인가?
여보세요? 저쪽에서 우리나라 말로 아가씨의 음성이 들리자 이 일본에서 한국말로 전화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내가 이쪽 사정을 자세히 설명을 하며 한의원을 찾는다니까 신쥬꾸 근처에 한의원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자세히 모르겠으니 한 5분쯤 후에 다시 전화를 해주면 자기가 알아봐 주겠다고 하였다. 전화를 끊고 아내에게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좀 기다리기로 하였다.
다시 전화를 하였을 때에는 그 아가씨가 벌써 그 한의원에 전화까지 해둔 후였다. 한의원의 위치를 알려주고 전화번호도 알려주면서 연락을 하였으니 그 쪽으로 알아보라고 하였다. 있기는 한의원이 있었구나. 고맙다고 하고 알려준 대로 동휘한의원(03-3208-8873)으로 전화를 하였다.
처음에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으나 곧 원장인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대사관에서 연락을 받았다면서 상태를 묻더니 오는 길을 알려주면서 오면 진찰을 해보겠다고 하였다.
야마노떼선 전철을 타고 신쥬꾸 한 역 앞인 신오오꾸보 역에서 내려 쇼꾸앙도오리를 따라 오면 동키호테라는 슈퍼가 있는데 그 옆 이층 건물에 간판이 보일 거라고 하였다. 가지고 있는 지도를 보니 신오오꾸보역이 있어서 우에노 역에서 야마노떼선 전철을 타고 신쥬꾸로 향하였다. 사람이 위급한 일을 당하면 무엇이든 해낸다고 한다. 그 복잡하게 거미줄 같이 얽힌 도쿄의 철도망 지도를 가지고 오늘 처음 내린 도쿄에서 신오오꾸보 역을 찾아가는 일쯤은 몸이 불편한 아내를 데리고 나선 나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우에노 역이 어떻게 생겼는지, 지나가는 아마노떼선 전철 바깥의 도쿄의 경치가 어떠하였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다. 별로 복잡하지 않은 전철 객차의 좌석에 앉아서 바깥 역의 이름을 보면서 지도에 나타나 있는 역과 비교하면서 신오오꾸보 역을 놓치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거기에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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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5일간의 일본 종주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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