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의창의 그림이야기

15일간의 일본 종주기 (5)
(28)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다
  
신오오꾸보 역은 역시 조금 작은 전철역이었다. 역에서 나오니 대로가 앞을 가로막았다. 어느 쪽으로 가야할 지를 몰라서 우선 만나는 사람에게 쇼꾸앙도리를 물었다. 이 분이 바로 오른쪽의 좁은 골목길로 한참을 가면 큰 거리를 만날 수가 있는데 그 거리가 바로 쇼꾸앙도리라고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역 앞의 큰 도로와 쇼꾸앙도리는 나란히 달리는 큰 도로이고 그 사이에 많은 좁은 골목길이 이 두 길을 연결하고 있었다.
한 7,8분쯤 걸어가니 일러준 큰 대로가 나왔는데 골목길은 차가 한 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길이었다. 간혹 승용차가 지나갈 때면 사람은 한 옆으로 비켜서야만 하였다. 좀 옛날 식 주택이 보이기도 하였지만 새로 지은 조그마한 호텔도 제법 있어서 이곳에서 숙박을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큰 거리로 나가기 전에 벌써 한글로 쓴 간판이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떡집도 보이고, 한국 음식점도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오른쪽에는 철로를 따라 걸어갔는데 만나게 된 큰 도로는 오른쪽으로 철로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거리가 쇼꾸앙도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오른쪽으로 가야할지 왼쪽으로 가야할 지를 조금 망설이다가 조금 더 번화한 듯한 왼쪽으로 접어들었다. 도로 건너편에도 한국어 간판이 좀 눈에 띄기는 하였지만 왼쪽 인도 옆에는 두 집 건너 한집은 한국어로 된 음식을 팔거나 이발, 미용, 세탁을 한다는 등의 간판이 보였다. 드디어 동키호테라는 슈퍼를 발견하고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동휘한의원을 둘러보니 눈에 뜨이지 않았다.
마침 길에 포장마차를 차려놓고 호떡이나 기타 먹을거리를 팔고 있는 잘 생긴 청년이 있어서 한국말로 ‘길 좀 물읍시다’라고 하였다. ‘호떡’이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청년이 흠칫 놀라는 표정이드니 내가 묻는 동휘한의원을 가리키는데 보니 바로 뒤쪽건물의 이층 유리창에 커다랗게 병원 이름을 써두었다. 고맙다고 인사한 뒤에 병원으로 올라갔다.
한 마디로 한국식 한의원과는 거리가 좀 먼 곳이었다. 한의사도 차림부터가 그냥 보통 셔츠 차림이었고, 실내도 좁고 저쪽에 침대가 하나 있는 정도였다. 그래도 한약재 냄새도 좀 풍기고 선풍기가 돌아가는 그러한 방에 우리 부부만 앉았고 아무런 다른 이는 없었다. 물론 간호사가 있을 턱이 없었다.
이 의사분이 자기 말로는 중국에서 한의학을 공부하고 더 공부하기 위해서 여기 개업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아내를 보고는 이러한 증상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면서 일본은 섬나라라 습기가 많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들 중에도 이러한 증상으로 오는 분이 많고, 곧 나을 터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고 하였다. 피로와 에어컨 찬바람을 많이 쏘인 탓에 온 것이고, 여행을 오지 않았어도 한국에서도 걸렸을지도 모르는 것이니 너무 후회하지 말고 치료해보자고 하였다. 3일이 고비로 좀 더 심해질 수 있으니 3일을 잘 조리하여야할 것이라고도 하고 바로 귀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말도 하였다. 지금도 이 두 가지 선택을 놓고 어느 것이 좋았겠는가 하고 어떤 때에는 후회도 하고 어떤 때에는 잘 하였다고 자신에게 다짐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 때 이 의사도 어느 것이 좋을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우선 침을 놓고, 자기가 이 경우를 위해서 특별히 조제해 두었다는 약을 주었다. 이것은 꼭 청심환 같이 둥글게 조제해둔 것인데 바깥을 플라스틱으로 봉해둔 탁구공보다 조금 작은 것이었다. 이걸 손아귀에 넣고 힘을 주니 플라스틱이 깨어지고 안에서 둥근 약이 나왔는데 입에 넣고 으깨어 먹어라 고 하였다. 그걸 20개쯤 주면서 하루 두세 번 먹어라 고 하는데 5,000엔이라고 하였다.

자, 지금 비행기표를 구하여 당장 귀국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배표가 있으니 후쿠오카로 가서 배를 타고 귀국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한 3일쯤 이 도쿄에서 조리를 시켜서 서서히 계획대로 귀국하는 것이 좋은지.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은 비행기표를 구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걱정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국내에서도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해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온 것이다. 하네다 공항으로 어렵게 가서 표를 구한다고 하여도 김포공항에 가서 다시 대구까지 갈 것도 힘들 것 같았다. 만일에 표를 구하지 못한다면 흔히 뉴스에서 보듯이 공항 대합실에 모포를 둘러쓰고 한 쪽에 환자를 놓아두고 밤을 새워야 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더구나 3일이 고비라고 하지 않는가?
지금 후쿠오카로 가는 것은 너무나 오랜 동안 열차를 타야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지금 저렇게 피로에 지쳐 힘없이 누워 침을 맞고 있는 아내를 데리고 그 차가운 에어컨이 있는 열차를 10시간 가까이 타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후쿠오카에서 하루 밤을 자고 이튿날 배를 타고, 다시 열차를 타고 집으로 간다는 것도 힘들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3일간 쉬도록 할 것인가?  그렇다 어쨌든 우선 아내가 너무도 피곤해하니 한 3일이라도 좀 쉬고 나면 좀 낫지 않겠느냐. 이곳에는 그래도 한의사도 있고, 주위에 한국 사람들이 있어서 위급하면 대처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네다 공항이나 후쿠오카에서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나 혼자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한의원에게 내 심정을 이야기하고 올 때에 보니 호텔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 좀 괜찮은 호텔이 있느냐고 하니까 한국인이 주인인 라이온즈 호텔이 좋을 것이라고 소개해주었다.
한의원에서 침을 맞으니 아내는 좀 안심은 하는 듯하였으나 상태는 여전하였다. 내가 여기서 한 3일 쉬었다가 내려가자니 그렇게 하자며 동의하였다. 그렇다면 그 라이온즈 호텔에 예약을 해야겠다고 바로 한의원 옆이라 찾아갔다. 호텔의 입구와 안쪽에는 한국 음식점을 차려놓고 프론트는 더 안쪽에 있었는데 중년의 신사가 프론트에서 ‘이랏샤이마세’하고 일본말로 인사를 하기에 내가 한국말로 ‘여기 주인이 한국인인줄 알고 왔는데요.’라고 말하니 이 사람이 씩 웃으면서 자기는 일본인이지만 한국에서 공부를 해서 한국말도 잘 한다면서 약간은 발음이 이상한 한국말로 응대해주었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한 이틀간 예약을 하자고 하니 이 사람이 자기가 아는 의학 지식을 5분도 넘게 이야기를 하였다. 그걸 다 들어주고 나서 예약을 하니 8,000엔 짜리 방을 세금을 면해서 이틀간 예약하게 되었다. 4시부터 체크인이지만 내일 병원에 갔다가 좀 일찍 방에 들 수 없느냐고 하니까 12시 넘어서오면 들어올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하였다.

이제 머물 방도 예약이 되었으므로 다시 신오오꾸보 역으로 가서 전철을 탔다. 전철을 타고 내가 우구이스다니 역까지 지나는 전철역마다 지도를 보면서 역 이름을 확인을 하고 있으니 앞에 서 있던 남자 분이 ‘한국에서 왔어요?’하고 말을 붙여왔다. 이 분은 2년 전에 IMF로 직장에서 나와서 마침 도쿄로 올 기회가 있어서 건너왔다고 하였다. 손에 한국인을 위한 일본어 교재를 여러 권 들고 있어서 아마도 학원을 하는 듯하였지만 자세히는 묻지 못하였고 그냥 형편을 물으니 돈은 못 벌어도 애들 유학을 시킨다는 생각으로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고 신세타령을 하였다. 내가 우리 형편을 이야기하니 나중에 내릴 때에는 진정으로 아내를 걱정도 해주고 무사한 여행이 되기를 빌어주었다.
돌아와 보니 이리야의 예약된 호텔에는 주인 노부부가 없고 교대를 하였는지 아들인 듯한 젊은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맡긴 짐을 물으니 이미 우리 방에 두었다고 하였다. 올라가 보니 방은 좀 허름하였으나 제법 괜찮았다. 단지 더운물을 복도 한쪽에 끓이고 있어서 주전자로 가져가 먹어야 되는 불편은 있었다.
아내에게 해롭다고 하여서 에어컨을 끄고 지내기로 하였다. 창문을 열었더니 그렇게 덥지는 않은 듯하였다. 아내를 쉬게 하고 나도 좀 쉬었다. 이제까지 호텔에 돌아오면 피곤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정리하고 내일 여행을 위한 준비도 하면서 기대에 부풀어 지냈었다. 그러나 오늘 하루는 피곤하기만 한 하루였고, 걱정과 앞날에 대한 불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낯선 이국 땅 호텔에 무더위에 에어컨도 못 켜고 누워 있으니 지난 며칠이 몹시도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앞날도 걱정이 되었다.
저녁에 식사 준비로 내려가면서 대사관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화장실에 갈 때와 갔다왔을 때에 사람의 마음가짐이 다르다는 그러한 마음을 보이기 싫었고, 다른 여행객이 곤란을 겪을 때에 친절한 공무원의 도움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낮의 그 아가씨를 찾으니 바로 자기라면서 걱정을 해주었다. 한의원을 덕택에 잘 찾았고, 치료도 잘 받아서 고맙다고 치사를 하니 진정으로 잘 치료하고 무사히 귀국하기 바란다고 위로를 해주었다.
가까운 슈퍼에 가서 밥과 빵, 수박 한 조각(180엔)을 사서 준비해둔 김으로 김밥을 만들어 먹었다. 일본에서는 슈퍼에서 밥을 포장해서 팔고 있으니 이점은 참으로 편리하였다. 그러나 수박 조그마한 것 한 조각에 180엔이나 하는 것은 참으로 비싸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 여름에 한국에 있으면 매일 먹을 수박을 거의 열흘 동안 맛을 못 보았기 때문에 나도 먹고 싶었고 아내에게도 먹이고 싶어서 샀다. 닭다리 익힌 것 1개(320엔)를 사서 나는 소주를 마시고 잤고, 아내는 약을 먹고 잤다. 이제까지는 즐겁던 여행이었는데 오늘은 이렇게 시무룩한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자다가 걱정이 되어서 깨어보니 별로 차도는 없었으나 아내가 그래도 잘 자고 있어서 일단은 안심을 하고 계속 잠이 들었다.(더워서 에어컨을 켜야만 잠이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못 켜게 되니 또 안 켜도 좀 더웠으나 견딜만하였다. 사람의 적응력이 이런 대에서도 나타나는 것 같았다.)

8월 24일 목요일. 아침 산책 겸 식사 준비로, 아내를 호텔에서 쉬게 한 후에 6시에 시내로 나가 보기로 하였다. 호텔 바깥은 아직 출근하는 사람들이 적어서 한산하였다. 한국 같으면 2차선 이면도로는 양쪽에 수많은 차들이 주차를 하여서 통행에 어려움이 있지만 이곳은 2차선 도로면 제법 넓은 도로로 신호등도 잘 정비가 되어 있고 횡단 보도도 잘 그려져 있으며 차들도 제법 잘 다니고 있었다. 도로변에 주차한 차는 그야말로 한 대도 없었다.
어제 우구이스다니 역으로 가던 넓은 도로를 반대편으로 걸어가 보기로 하였다. 어딘가에 아침 식사를 할만한 곳이 있거나 밥을 파는 곳이 있었으면 하면서 걸어갔다. 신문 배달을 하는 사람도 눈에 뜨이고 이제 상점의 문을 열기도 하고 있었으며 도로에는 제법 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그러한 아침거리를 10여분 걸어가니 큰 네거리가 나오는데 왼쪽에 그저께 센다이에서 예약을 하려다 못한 아사쿠사의 도요코인 호텔이 보였다. 이 호텔을 눈여겨보고는 네거리를 두 번 건너서 오른 쪽으로 걸어갔다.
이 곳이 바로 아사쿠사인 모양이었다. 도로를 파헤치고 공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신아사쿠사 지하상가를 만든다고 안내를 해두었다. 일본은 거의 모든 역 아래에 지하상가가 크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아사쿠사 역 아래에도 이렇게 지하상가를 만드는 모양이었다. 공사판을 보아도 큰 상가가 들어설 예정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 5분을 걸어가는 도중에도 길가에는 마사지를 한다거나 이른바 성(性)을 상품화한 간판들이 제법 눈에 뜨이었다. 이 때까지 한 두 군데쯤의 편의점을 지나쳤기 때문에 돌아가면서 편의점에 들러 먹을 것을 준비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마침 24시간 도시락 상점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내 앞에 한 손님이 점심 도시락인지를 사는 것을 보니 전기 밥솥에서 방금 지어낸 뜨거운 밥을 도시락에 담아주고 있었다. 물어보니 맨밥 큰 도시락이 210엔이었다. 그 옆에 김치를 팔고 있었는데 초밥 두 개만한 크기의 플라스틱에 담은 김치가 150엔이었다. 방금 만든 뜨거운 밥과 김치를 사들고 의기양양하게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돌아왔다.
오는 길에 마침 어떤 소학교 앞을 지나게 되어서 힐끗 보니 그 앞에 한 노인이 교문 앞 꽃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렇지 학교를 하나쯤 방문해보고 싶었는데 아내가 아파서 경황없이 지내다가 학교 하나 방문 못하고 귀국해버리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그 노인에게 다가갔다.
교문과 문설주를 통나무로 운치 있게 만들어둔 학교였는데 운동장은 듣던 대로 타탄트렉으로 온통 흙이라고는 없이 말끔하게 만들어둔 학교였다. 이 노인이 학교에 근무하는 분이면 한번 들어가 볼 요량으로 물어보니 자기는 학교 직원이 아니고 자기 아들이 이 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항상 이 학교를 보살피고 꽃에 물도 주면서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하였다. 내가 자원봉사자이냐고 물으니 그런 셈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학교를 졸업한 아들이 지금 50세라고 하였다. 아니 그럼 이 노인이 그 옛날의 자기 아들이 졸업한 이 학교를 지금껏 보살피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 학교의 오래된 전통이 부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기부금으로 몇 만원 돈이나 불쑥 내고는 조그마한 불평도 참지 못하고 전화, 인터넷, 방문 항의에 여념이 없는 우리나라 학부형과 크게 대조되어서 부러웠고, 도쿄 같은 큰 도회지에서도 한 곳에 이렇게 수 십 년을 붙박이로 사는 노인이 신기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도 한 학교에서 보았지만 이 교문 앞 화단에 피어 있는 꽃은 볼 품 없는 나팔꽃이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새로운 외래종의 멋진 꽃으로 화단을 장식할 터이지만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그들이 아끼던 꽃(나팔꽃:あさがお:朝顔)을 별로 예쁘지는 않지만 지금껏 저렇게 가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근무하는 곳에 셀비어, 베고니어, 패추니어 등만 심을 것이 아니라 채송화, 과꽃, 백일홍도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누워있는 아내가 걱정이 되어서 인사를 하고 바로 호텔로 돌아오는데 또 호텔 근처에 이리야소학교의 안내 간판도 보였으나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아까운 기회였던가 보다.

가져온 밥과 김치, 김, 어제 준비한 빵 등으로 아침 식사를 하였다. 전에도 일본 깍두기를 먹어보았는데 이건 삶은 무로 만든 것처럼 씹을 것이 없이 허물허물한 깍두기가 이상하여 한 조각을 겨우 삼키고는 그 다음에는 입에 대지도 않았었는데 가져온 김치도 좀 신 것이 힘이 없어서 조금은 맛이 없었다. 그래도 김치를 모처럼 맛보는 터라 먹을 만 하기는 하였다.
아침 식사 후에 짐을 챙겨서 신오오꾸보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라이온즈 호텔에 짐을 맡기고 어제 약속한대로 한의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치료라고 해야 침을 맞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오늘은 치료비로 3000엔을 받고 탕제를 지어야한다기에 따로 10,000엔을 지불하였다.
그런데 이 한의원의 젊은 의사가 한국 사람으로 중국에서 교육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아무래도 한국의 한의사보다는 좀 구식인 듯하였다. 한국에서는 음식을 가려 먹어야한다거나 하는 일이 없는데 가루음식(밀가루를 뜻함)과 돼지고기 등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고, 또 에어컨 찬바람을 쏘이지 말아라 고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쇠고기와 쌀밥에 대한 어떤 경외의 마음이 있어서 이를 최고로 치고 돼지고기나 밀가루 음식은 아주 사람 몸에 나쁜 것처럼 여겨왔는데 내 생각에는 과학적 근거가 희박하다고 여겨진다. 근래에 와서는 한의사들도 이런 편견이 많이 사라졌는데 이 사람은 아직도 이렇게 권하였다.
호텔로 돌아오니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방 청소가 끝났다면서 방으로 가도 된다고 하였다. 방은 깨끗하고 넓었으나 이 호텔에서는 아예 더운물을 주지를 않았다. 프론트에 가서 물을 달라고 하니 찬 생수를 두 병 주면서 필요하면 주겠다고 하였다. 이 한국말을 잘 하는 일본인은 친절한 듯이 말하지만 어쩌면 좀 차갑게 구는 듯하여서 호텔을 잘 못 든 듯한 생각도 들었다. 역시 일본인이 경영하는 호텔이 더 친절한 듯하였다. 그래도 우선 아내와 호텔에서 푹 쉬기로 하였다. 아내는 이제 여기서 쉴 테니 혼자서 도쿄 관광을 하라고 하였지만 환자를 호텔에 뉘어놓고 돌아다닐 사람이 있겠는가?
치료비, 약값, 호텔료, 식사비 등을 생각하면 제일 돈이 많이 드는 쪽을 선택하였지만, 사람이 이러한 곤란한 지경에 처하면 돈이 많이 드는 쪽을 선택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돈을 아껴서 그 쪽을 선택하였을 거라는 원망을 피하기 위해서, 돈이 가장 많이 드는 쪽을 선택하였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여튼 이렇게 호텔에 죽치고 누워서 고작 텔레비젼이나 틀어놓고 시간을 보내는 여행을 하게 된 셈이다.
  


(29) 오오꾸보소학교의 다카하시 선생
  
아내에게 점심을 먹을 만한 곳도 찾아볼 겸 거리에 한 번 나가보겠다고 말하고 호텔에 아내를 둔 채 밖으로 나왔다. 호텔 건물에 있는 입구의 식당은 조금 비싼 듯한 한국 음식을 팔고 있었고, 바깥 거리에는 한국 음식점들이 여러 곳 눈에 띄었다. 바로 곁에 동휘한의원이 있는 건물이 있고, 그 다음에 주차장 출구가 있어서 항상 차들이 들어가고 나가려고 대기하고 있는 곳에 두 사람쯤의 관리인이 인도의 사람과 출입하는 차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옆이 동키호테라는 커다란 슈퍼로 그 앞에 어제의 그 잘 생긴 청년이 포장마차를 하고 있고 그 다음으로도 한국인이 경영하는 이발소, 음식점, 세탁소들이 한국어 간판을 달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한 십분 정도 걸어가니 골목으로 신쥬쿠구립오오쿠보소학교(新宿區立大久保小學校)라는 간판이 나타났다. 시간이 조금 있고 하여서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골목길을 걸어 1분 거리에 조그마한 교문이 있었으나 닫혀 있었다. 방학이라 닫은 모양이라고 여기면서 몇 발자국 더 걸으니 더 조그마한 교문이 나왔다. 현관에 들어서니 일하는 아주머니인 듯한 여자가 나왔다. 인사를 하고 한국에서 온 교사인데 학교를 한 번 둘러보기 위해서 왔다고 하니 교무실로 안내를 하였다. 현관에는 신장이 있었으나 신장마다 이름표가 있는 듯하여 그냥 신을 벗어두고 맨발(양말은 신었지만)로 복도에 올라섰다. 복도나 벽은 깨끗하게 나무로 지어져 있었는데 마치 가구처럼 나무 색으로 윤이 나게 잘 관리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교실이나 복도의 골마루와는 비교가 되지 않고 가정의 거실 마루와 같은 정도였다. 아니 더 두꺼운 나무로 만들어져서 견고하고 깨끗하였다. 그러고 보니 내 차림새가 좀 이상하기는 하였다. 반바지에 머리에는 등산용 모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쨋든 다른 나라에서도 이렇게 교사라고 말하고 들어가면 둘러보도록 허락하였기 때문에 교무실로 성큼 들어섰다.
교무실에 있던 젊은 남자 교사에게 또 인사를 하고 자기 소개를 하면서 둘러보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니 이 남자 교사가 어떤 키가 조그마하고 예쁘게 생긴 젊은 여교사를 불렀다. 그러고 보니 이 여교사가 오늘 당직 교사이고 이 남자 교사는 그냥 놀러온 교사인 듯하였다. 내가 또 이 여교사에게 자기 소개를 하고 학교를 둘러보고 싶다고 하며 학교 소개 팜플렛이라도 없느냐고 하니까 둘이서 의논을 하더니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는 안내문을 먼저 두 장을 구해서 주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전부 한글로 되어 있어서 나도 깜짝 놀랐다. 제목이 하나는 ‘봄방학 생활에 대하여’이고 하나는 ‘여름방학 모두의 약속’이었다. 내가 놀라는 기색을 보고, 설명하기를 이 학교에는 한국인 학생과 중국인 학생이 좀 있어서 이들을 위해 학부모에게 보내는 안내도 이렇게 한국어로도 한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 내용 중에 특기할 만한 것은 아동의 안전, 특히 유괴나 치한으로부터의 피해를 막기 위한 내용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안전하게 지내기 위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말을 걸어올 때는 특히 주의하도록 합시다. “사진을 찍어줄까”하면서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가지 말고 큰소리를 질러서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알립시다.“ 등의 내용이 있었다. 거기 제시된 한글은 거의 현대 맞춤법에 맞는 한글이었다.
교무실을 둘러보니 20평 정도의 우리 나라 교실과 크기가 같았는데 교사용 책상이 20개정도 있었고 그 위에는 정말 산더미처럼 온갖 서류들이나 책들이 쌓여 있었다. 우리나라도 군사 정부에서 일반 행정직은 물론 교사들도 보안 점검이니 어쩌니 하면서 서류 같은 것을 철저히 간수하도록 하여서 교무실이나 교사 책상 주위가 제법 말끔한데 전에 호주에 갔을 때에나 미국, 캐나다 학교들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역시 이와 같이 교사들 책상 위에 책이며, 서류들이 많이 쌓여 있었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책상 위에 말끔하던 것을 보아오던 터라, 더구나 방학 동안인데 주인 없는 책상 위에 온통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보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 여교사가 한 참을 찾아서 ‘학교일람:學校一覽’이라는 것을 한 장 주었다. 우리 같으면 학교를 소개하는 책이 한 권 있고, 학교 편람이라는 것이 있는데 아마도 이것뿐인 모양이었다. 여기에 학교의 연혁, 역대 교장명, 시설, 교원구성, 주요학교행사, 교육목표, 지도중점, 재적 아동수, 교무분장 및 학교 운영 조직 등이 소개되어 있었다.
이 여교사가 자기 이름이 다카하시라면서 교원구성에 있는 자기 이름에 동그라미표를 해주었다. 거기에 다카하시리에(高橋理惠:たかはしりえ)라는 이름이 있고 일본어를 가르친다고 되어 있었다. 내가 의아해하니 한국과 중국에서 온 어린이들이 일본어를 잘 몰라서 일본어 반이 두 반 있다고 하였다. 그 중 한 반이 다카하시 선생의 학 반이었는데 일주일에 두 번씩 각 학 반에서 이 반으로 특별히 시간을 내어 와서 일본어를 배운다고 하였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했으므로 자기도 중국으로 여름 방학을 기하여 여행을 하고 바로 3일전에 귀국하였다고 하였다.
일본어는 그렇다고 치고 영어를 가르치느냐고 하니까 소학교에서는 영어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내가 우리나라는 3학년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바로 내가 영어 교과를 가르치는 교사라고 하니까 부러워하였다.
이 여교사가 중국을 다녀왔다고 하여서 중국에서 온 어린이를 가르치는 것은 아니었다. 자기 반에 있는 한국에서 온 어린이의 공부하는 모습을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아주 둔한 어린이라는 표현을, 잘 기억하지를 못해서 일러주면 곧 잊어버린다고 아주 완곡하게 표현하였었다. 내가 명함을 주면서 한국에 와서 전화를 하면 지금의 이 친절에 보답하겠다고 하니 웃으면서 명함을 받았다.
그 날은 이 학교 일람을 그냥 받아서 돌아왔지만 지금 찬찬히 살펴보니 우리와 다른 점이 너무도 많았다.
먼저 연혁을 보면 메이지 12년 12월 12일에 아동 90명, 교원 3명으로 개교식을 거행하였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니 역사가 길어서 올해 개교 12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던 모양이다. 총 졸업생 누계가 13,730명이나 되었다.
학교 시설로는 584제곱미터의 체육관이 있었고, 25미터X8미터의 수영장이 하나 있었다.  교사는 모두 16명이었는데 우리처럼 순환근무제로 교사들을 자꾸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7,8년 정도 오래 근무하는 교사도 있었다. 주사라고 하여 학교의 용무를 보는 사람이 3명, 급식 담당이 3명 그 외 2명이 더 있었다. 교사 16명중에는 교장, 교두(우리 식으로 아마 교감인 모양)가 있고, 담임이 6명(이 학교는 소규모라 한 학년에 한 반씩이었다.), 교과를 가르치는 사람이 일본어, 음악, 도화공작 등 5명, 양호1명, 사무1명 촉탁원 1명이었다.
재적 아동 수는 1학년 24명, 2학년 26명, 3학년 17명, 4학년 24명, 5학년 36명, 6학년 32명으로 모두 159명이었는데, 다카하시 선생의 말로는 40명이 넘으면 분반을 한다고 하니 그냥 한 학년이 한 반인 셈이었다. 아동 159명에 교사 14명이면 거의 교사 1인에 아동 10명인 셈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와 비교하면 1,575명 아동에 37학급으로 편성되어 있는데 교사 수는 43명이다. 너무나 부러웠다. 아래에 비교를 해보자.
아동 수 1,575명 대 159명, 학급 수 37학급 대 6학급. 즉 1학급당 아동수로는 우리가 42.6명이고 저들이 26.5명이다. 교장과 교감이 우리와 저들이 1명씩, 양호교사가 우리와 저들이 각 1명씩이다. 그러나 우리 양호 교사는 목요일이면 다른 작은 학교로 파견을 가야하니 실제로 우리는 5/6명이 근무하는 셈이다. 교과전담교사가 우리가 3명인데 저들이 5명이다. 따라서 교사 수로 아동 수를 나누면 교사 1인당 아동 수는 우리가 36.6명인데 저들은 11.4명이다.
부러움을 꾹 참고 다카하시 선생의 안내로 교실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첫 교실에서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엇 때문일까? 우리들 교실처럼 20평 짜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똑같은 교실이 아니라 다양한 교실이 많았지만 일반 학 반 교실도 우리보다는 훨씬 작았는데 바닥이나 벽면이 모두 나무로 깨끗이 잘 간수되어 있었다. 거기에 일인용 나무로 된 책상이 열 개 남짓 있으니 입이 벌어질 수밖에. 그 책상과 걸상이 모두 가구점에서 방금 가져온 듯이 반듯하고 나무로 만든 반질반질한 신품이었다. 이인 용 낡아빠진 책걸상이 빼곡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는 교실만 보아오던 나로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작은 교실이 아담하면서도 널찍하게 보이는 것은 아동용 책상이 가운데에 동그마니 놓여 있어서일 것이다.
더구나.  복도나 교실에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 어떠한 지저분한 환경구성물이 없었다는 것은 나를 정말로 놀라게 하였다. 호주나 미국, 캐나다에 갔을 때에는 그래도 뒷벽에 아동들의 작품이 몇 개 붙여져 있었는데 이곳에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붙여져 있지 않았다. 복도고 교실이고 아무 것도 없는 학교. 상상이 안 될 것이다. 그러면 이 학교에는 장학사도 오지 않고, 외부에 보여줄 필요가 전연 없이 교육만 하면 된단 말인가. 우리처럼 교육은 뒷전이고 누가 온다면 난리를 떠는 현실과 비교하니 참으로 부러움이 앞섰다.
교실 옆에는 조그마한 교실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준비실이라고 되어 있었다. 특히 가사활동을 하는 등의 준비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다고 하였다. 6반이면 교실이 6개가 있어야하는데 그렇지 않고 많은 교실들이 있었는데 가사실, 그 옆의 준비실, 공작실, 그 옆의 준비실 등으로 많은 교실이 있었고, 또 식당이 있었는데 이 방은 좀 넓었다. 학년별로 특별히 식사 지도를 하기 위해서 번갈아 사용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방이 많으니 우리처럼 교사가 운동장의 한쪽에 한 줄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장을 둘러서 ㄷ 자형으로 지어져 있었다.
보건실이 있는 것을 아주 자랑으로 여기면서 한국에도 있느냐고 하기에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도 물론 있으나, 일주일에 양호 교사가 한 번은 다른 학교로 파견을 가야하는 실정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가 싫어서 그 말은 그만 두었다. 내가 컴퓨터가 있느냐고 하니까 2인 1개씩 배당되는 컴퓨터실이 있다고 하였다. LAN으로 연결이 되어 있느냐고 하니까 그렇다고 하였다. 나는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는 컴퓨터실이 2개나 있고 모든 교실이 LAN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자랑을 하였다. 돌아오면서 자기가 맡고 있는 일본어 교실도 보여주었는데 교실 전면에 급훈이 달랑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내가 글씨를 잘 썼다고 말하니 자기가 쓴 것이 아니라고 사양하였다.
복도의 꼭 한 곳에 아동들의 작품이 10점 정도 모아서 전시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한국 학생이 한국어로 제목을 쓴 작품이 하나 있었다. 그걸 다카하시 선생이 특히 지적을 하면서 한국어 교실에 오는 학생이라면서 소개하였다. 이것 이외에 복도에 무언가 붙어 있는 것을 본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안내를 해 주어서 고맙다고 하니 오히려 잘 안내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였다. 물론 내가 엉터리 일어로 문법에 틀리는 말을 하거나 끝말을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면 자기가 말을 만들어서 내가 말할 수 있게 유도를 하면서 면담이 이어졌지만 내게 일본어를 어떻게 배웠느냐 하기에 내가 시원찮다고 하니 아니 잘한다고 칭찬도 하였다. 예쁜 일본 여교사에게서 칭찬도 듣다니.
인사를 하고 나와서 현관으로 오니 신장이 많이 있어서 보니 이게 좀 이상하였다. 모든 직원들이 서열별로 교장 이하 차례로 신장에 명찰이 붙어 있었는데 교장보다 앞자리에 PTA(사친회) 임원들의 이름이 있었다. 즉 PTA회장 아무개, 부회장 아무개, 서기 아무개, 서기 아무개 등등, 그것도 무려 10명이나 되었다. 아, 그랬구나. 이 일본의 소학교는 우리 보다 더 학부형들의 손에 학교가 움직이고 있구나.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지금 우리나라 교사들이 학부형들의 항의 전화나, 학교에 대한 간섭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고 나처럼 불평들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일본을 선진국이라고 따라가다가는 앞으로 이와 같이 교장보다도 더 높이 군림하고 있는 학부형들의 손아귀에 교육을 맡기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부러움과 씁쓸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서려는데 운동장을 보고 싶어서 현관에서 운동장 쪽을 보니 역시 깨끗하게 타탄트럭으로 만들어진 운동장이 보였다. 일본의 초등학교는 운동장을 모두 타탄트럭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었다. 그 옆의 화단에는 예의 그 나팔꽃이 볼품없이 피고 있었다.

(30) 신쥬꾸(新宿)

호텔로 돌아와서 아내를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좀 전에 보아둔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바깥에 내어놓은 메뉴에 보니 비빔밥과 된장찌개 등이 850엔으로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지하1층에 있는 식당은 넓고 깨끗하였다. 들어서자 아가씨가 ‘이랏샤이마세, 어서 오세요.’ 하고 일본어와 한국어로 두 번 인사를 하였다. 둘 다 유창하여 이 아가씨가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한국인인줄 알자 바로 유창한 한국어로 안내를 하여 방에 앉게 하였다. 가스 불로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게 해둔 테이블에 앉아서 새로 주는 메뉴 판을 보니 여러 가지 음식이 많이 있었으나 계획(?)대로 비빔밥과 된장찌개를 시켰다.
밑반찬도 여러 가지 많이 나왔고 밥도 많이 주었으며 먹을만하였다. 또 고추장이랑 김치며 된장찌개가 한국에서 먹는 것보다 더 한국음식 같았다. 아가씨에게 어떻게 이렇게 한국음식이 제 맛 그대로 나오느냐고 물으니 건너편에 한국 식료품을 파는 슈퍼가 생긴 이후로 이제는 바로 한국음식과 똑 같은 음식을 내어놓게 되었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한국에서도 위성방송으로 선전을 하는 바로 그 ‘장마당’이라는 슈퍼가  쇼꾸앙도리 건너편에 있었다.
점심을 잘 먹은 우리는 아가씨에게 찬물도 부탁을 하여 두 병이나 넣고, 저녁에 또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아내와 보온병을 사기로 의논이 되어서 동키호테 슈퍼에 가보기로 하였다. 약을 지어 달라고 하였으므로 더운  물이 있으면 약을 데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동키호테 슈퍼 앞에 오니 그 잘 생긴 청년이 우리 부부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였다. 이 청년이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는 와세다대학에 다니는 학생으로 자기  형이 종로 떡집을 경영하고 있으면서 일본으로 건너오라고 하여 이렇게 건너와서 자기가 벌어서 학교에 다닌다고 하였다. 그런데 ‘하나로 전화카드’도 판매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자기 형이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귀국하여보니 한국에서도 위성방송으로 이를 선전하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이 청년이 정말인지 좀 부풀리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포장마차 세가 아주 비싸다고 말하고 자기가 하루에 매상이 얼마고 한달 수입이 얼마라고 크게 자랑을 하였다. 우리 부부가 가전제품을 살려고 한다니까 동키호테에 가서 사지 말고, 이곳도 싸기는 하지만, 도쿄에서 가장 싼 곳은 사쿠라야(さくらや:櫻屋)인데 그곳에 가보라고 자세히 일러주었다.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여서 청년이 일러준 대로 쇼꾸앙도리를 가로질러서 골목길을 10분 정도 걸어갔다. 거기에 바로 신쥬쿠의 극장가가 있었다. 주위의 건물은 거의 극장이었는데 가운데에 제법 넓은 터가(광장이라고 하기에는 좀 좁고)있어서 사람들이 쉬도록 하여 두었는데 거기에 노숙자인 듯한 사람들이 죽치고 눕거나 앉아 있었다. 내가 보기에 히피라고 하기에는 무엇하지만 그래도 차림이 좋지는 않았었다. 근처 극장 입구에는 들어가거나 시간을 기다리는 젊은이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 극장가를 나서니 넓은 도로가 있어서 이 때부터 사쿠라야를 물으면서 나아갔다. 그런데 이 번화가에 바로 전에도 보았던 것과 같이 어떤 노인이 마사지를 선전하는 야한 선전물을 들고 있었다. 저 쪽에는 고층 건물들이 수없이 늘어서 있는 도로가 뻗어있었다. 그야말로 신쥬꾸가 번화가란 말을 실감나게 하듯이 수많은 인파가 몰려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사꾸라야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듯 이쪽으로 가보라는 사람이 있어서 이쪽으로 가면 또 저쪽으로 가보라고 하여서 저쪽으로 가고 하여 헷갈리기만 하였다. 드디어 신쥬꾸 역 앞을 지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 여러 층에 전자제품을 팔고 있었으나 모두가 컴퓨터나 디지털 카메라, DVD, 혹은 CD롬타이틀 등을 팔고 있었고, 흔히 우리가 말하는 가전제품을 파는 곳은 없었다. 매장도 아주 좁은 매장이 계속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이어지고 있어서 이른바 아케이드 같았다.
내려와서 그 옆 건물을 보니 사람도 검은 옷을 입고 상점도 검게 치장을 해두었기에 무엇인가 싶어서 무심코 우리 부부가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간판인즉 구찌라고 되어 있고, 일본인답지 않게 건장한 체구의 사내 여럿이 입구에서부터 매장까지 모두 검은 옷에 검은 셔츠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곧게 서서는 우리 부부를 보고 깎듯이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매장의 진열장에는 귀금속 따위가  몇 개씩 진열되어 있고. 아차 잘못 들어온 모양이었다. 이렇게 조그마한 배낭을 매고 반바지차림으로 등산모를 쓰고 들어올 곳은 아닌 모양이었다. 재빨리(?) 우리 부부는 그 고급 매장을 빠져 나와 되돌아가기로 하였다.
저 멀리 고층 건물들 틈에 틀림없이 여행 안내 책자에 있는 그 도쿄도 청사가 있으리라. 거기 전망대에는 무료로 올라가서 도쿄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어쩐다. 아내는 벌써 기진하여 돌아가기를 원하고. 내 심정을 아는지 아내가 신쥬꾸 역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쉴 터이니 혼자 가보고 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돌아올 때에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올 때에 보아두었던 여러 가지 지형지물을 익히면서 돌아왔다. 그런데 오다가 덥고 피곤하였던 차에 마침 동네 공원 같은 조그마한 곳이 있었다. 거기 벤치에 좀 앉아서 쉬었으면 하는데 그늘에 있는 모든 벤치는 이미 노숙자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쉴 틈이 없었다.
그냥 돌아가야지 하고 그곳을 나오니 바로 쇼꾸앙도리가 나왔다. 아내가 피곤을 느끼므로 그냥 호텔에 돌아가서 쉬기로 하였다. 그런데 아내를 쉬도록 한다는 것이 그만 나도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깨어보니 한의사와 약속한 5시가 거의 되었다.
그런데 한의원에 가니 약을 너무도 많이 주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약을 한재 지으면 양도 그렇게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예쁜 가방에 넣어서 가지고 가기 쉽게 해주는데 이건 완전히 70년대에 해주는 것과 같았다. 많은 양을 그냥 커다란 비닐 봉지에 담아 주는데 호텔까지 가지고 와보니 도저히 한국으로 그냥 가져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며칠 동안 먹어도 별로 양이 줄어들 것 같지 않았다.
아내와 의논을 하여 약을 넣을 가방을 하나 사기로 하였다. 그래서 저녁 식사도 할 겸 동키호테 슈퍼에 가서 가방을 사고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오기로 하고 호텔을 나섰다.
    
(31) 신쥬꾸의 동키호테 슈퍼
  
슈퍼 앞으로 오니 좀 전의 그 잘 생긴 와세다 대학생은 없고 포장마차에는 다른 청년이 호떡을 굽고 있었다. 저녁에는 교대를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슈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슈퍼라는 것이 어마어마하게 커서 우리 나라의 무슨 마트라고 하는 할인점 만한 것이었다. 거의 한 블록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안에는 카터를 밀고 갈만한 통로는 없고 두 사람이 부딪치면서 지나갈 정도로 좁은 길을 두고 물건을 양쪽으로 온통 선반에 빈틈없이 쌓아두고 있었다.
입구에는 음·식료품이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생필품, 가전제품, 의류, 화장품 등 거의 모든 제품을 취급하고 있었다. 화장품 코너에만은 진열장이 있었지 그 외에는 그냥 물건을 선반에 쌓아두고 있었다. 좀 가격이 싼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가격이 좀 싼 편이라고 아내는 말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보온병을 하나 사고 또 선물용으로 조그마한 것을 살려고 둘러보았다. 우선 일본에 가면 누구나 사는 젓가락을 몇 개 샀다. 그리고는 아내가 일본에서 귀국한 사람에게서 가루 풀을 선물로 받으니 좋았다면서 몇 개 샀다. 그리고 한약을 넣어서 끌고 갈 수 있게 가장 싸고 편리하다 싶은 바퀴가 달린 가방을 하나 샀다.
점포 내에는 점원들이 요소 요소에 있어서 손님들의 문의에 답변도 하고 물건을 진열도 하고 있었으며, 제법 많은 손님들이 물건을 고르고, 사기도 하였다. 그런데 입구는 여러 곳이 있었지만 어디에서 계산을 하는 지를 몰랐다. 입구 쪽으로 나가려고 하니 점원이 그 쪽은 나가는 곳이 아니라고 하였다. 점원에게 물어서 가까스로 출구를 찾았는데 단 한 곳이 출구로 되어 있었으며 점포를 벗어나서 계산대가 서너 곳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고 나오면 그 앞에 바로 예의 그 빠찡꼬 기계가 몇 대 있어서 계산하고 남은 동전은 모두 써버리도록 유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계산을 하고도 나오지 않고 한 참을 거기에 서서 보았는데 주부들이 물건값을 치르고 남은 동전을 받아서는 거의 예외 없이 빠찡꼬 기계에 동전을 넣어서 다 써버리고 나오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주머니나, 아저씨나, 처녀나, 총각이나 거의 8,9할의 손님이 다 그러하였다. 일본은 도박의 나라인가? 그리고 그 슈퍼 주인의 얄팍한 상술을 알 만하였다.

슈퍼, 호텔, 한의원, 식당이 거의 같은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산 물건을 호텔에 가져다 두고 바로 점심을 먹었던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식당에 들어서니 홀에 있는 아가씨가 낮에 보던 아가씨가 아니고 바뀌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시간제로 근무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 식당은 24시간 영업을 하는데 밤 10시가 넘으면 술집으로 바뀌어 영업을 한다는 말을 낮에 들은 기억이 났다. 그래도 우리는 아직 식당 영업을 하는 시간이므로 방으로 올라가 낮에 앉았던 테이블에 앉았다.
그런데 이 아가씨가 가져다 준 메뉴를 보고 또 한번 놀랐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낮에 보던 그 메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낮에는 메뉴판에 국밥과 비빔밥이 850엔이었는데 이 메뉴는 메뉴판만 바뀐 것이 아니라 가격도 국밥과 비빔밥이 1250엔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보다 더 싼 메뉴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아가씨를 불러서 참으로 이상하다고 말하니 이 아가씨가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이곳 식당들은 점심 시간에 봉급 생활자들을 위해서 특별히 ‘런치메뉴’라는 것을 만들어 봉사 차원에서 좀 싼 가격에 식사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게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만이고 그 이외의 시간에는 이렇게 제값을 받는데 아마도 손님들은 그 점심 시간에 와서 드신 모양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부부는 식사비로 1,000엔 이상을 지불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었는데 어쩐다. 할 수 없이 아가씨에게 그러면 내일 점심 시간에 오기로 하고 지금 나가겠다고 하니,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아가씨의 태도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조금도 그냥 나가는 손님에게 언짢아하는 기색도 없이 친절히 인사를 하고 우리를 내어 보내었다.
그랬구나. 교토에서도 점심 시간에 아주 값싸고 양도 많고 맛좋은 점심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런치메뉴’ 덕택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상으로 올라와서 길가에 세워둔 이 식당의 메뉴를 보니 완전히 낮에 보던 메뉴판이 아니라 가격이 인상(환원)된 메뉴판이었다. 찾아보니 낮에 보던 메뉴판은 건물 한 쪽에 돌려 세워져 있었다.
그러면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까하고 다시 이쪽 저쪽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러고 보니 낮에 보아두었던 또 다른 한국 음식점이 보였다. 이곳은 좀 허름하게 생겼는데 그래도 메뉴에 보면 순두부찌게백반이라는 것이 1,000엔으로 적혀 있었다. 우리 부부는 이곳으로 저녁 식사를 위해 들어갔다.
주방에는 두 아주머니가 음식을 만들고, 홀에는 청년이 분주히 음식을 내어오는 냉방도 되지 않은 식당이었는데, 이층에도 방이 있는 듯 손님을 이층으로도 올려 보내는 듯하였다. 너무 더워서 문을 좀 열어두고 문 입구에 앉았다.
양도 많이 주고 모처럼 순두부 찌개였으므로 맛있게 저녁도 잘 먹었다. 특히 김치랑 양념이 아주 우리 한국에서 먹는 것과 같았다. 아주머니들 어떻게 이렇게 일본으로 오게 되었어요? 하고 물으니 비행기 타고 왔습니다. 라며 농담을 하였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어떠냐고 물으니, 일하는 사람은 그럭저럭 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힘든다고 하면서 여자들은 일자리가 많이 있는 편이나 남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어느 곳이나 일자리가 없어서 애를 먹는 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32) 도쿄 역으로
  
8월 25일 금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자 샤워 후에 아침 식사를 구하러 산책을 나갔다. 어제처럼 24시간 도시락 점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큰길을 따라 쇼꾸앙도리를 30분만 걷기로 하고 올라갔다. 한참을 나아가니 편의점이 나왔으나 그냥 걸어갔다. 점점 시 외각지로 나가는 듯한 느낌이었으며 조금은 언덕길로 도로가 이어지고 있었으나 시가지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또 하나의 편의점을 지나칠 때쯤에는 거의 한국어로 된 간판은 눈에 띄지 않았다. 즉, 내가 묵고 있는 호텔 근처가 가장 한국인이 많이 모여 사는 듯하였고, 점점 멀어질수록 한국어 간판이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돌아가기로 하고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어갔다. 빵1개와 주스 1개를 고르고 보니 옆에 여러 종류의 밥 사진이 있는 카드가 몇 장씩 꽂혀 있었다. 이게 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백반 150엔짜리 2개를 뽑아서 카운터에 가니 1회용 용기에 든 백반을 2개 내드니 데워드릴까요 하고 묻는다. 데워 달라고 하니 전자레인지에 즉석에서 데워서 포장을 해주었다.
또, 아침밥이 해결되었다는 생각에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데 호텔 가까이 오면서 보니 건너편에 위성TV에 자주 선전되는 장터 마당이라는 한국 슈퍼가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었다. 건너가보고 싶은 마음이 많았으나 자꾸만 위축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그냥 호텔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내가 한약을 먹기 때문에 한의사의 지시대로 밥을 먹어야되므로 사온 밥으로 마치 충무김밥처럼 맨 김밥을 만들어서 둘이 아침을 때웠다.
아내는 한약을 먹고 한잠 자고 나서 10시쯤에 도쿄에 가서 내일 후쿠오카로 내려갈 열차 표를 예매하기로 하였다. 하릴없는 나는 그저 TV를 틀어놓고 보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TV에서는 손정의 사장의 일대기가 방영되고 있었다. 그런데 손정의 사장의 이름이 그냥 한국식으로 손정의 라고 나오는 것이 신기하였다. 젊은이의 우상이라면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어서 속으로 흐뭇하였었다.
혼자서 도쿄에 다녀올 생각이었으나 아내도 가보고 싶다고 하여서 함께 10시경에 호텔을 출발하여 역시 야마노테선을 타고 도쿄로 향하였다.  일부러 갈 때에는 우에노 쪽으로 달려가고 올 때에는 신쥬쿠 쪽으로 오기로 하였다. 갈 때에는 대략 30분쯤의 시간이 걸렸다.
도쿄 역은 그리 복잡하지 않아서 바로 표 파는 곳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런데 그 앞 안내판에 JR패스를 이용하는 승객은 뷰프라자로 가라고 화살표와 함께 안내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뷰프라자를 찾아 다시 화살표 방향으로 역구내를 걸어갔다. 우리 부부가 무언가 찾으며 걸어가는 것을 보고 커다란 쓰레기통을 끌고 가던 역 직원인 듯한 아낙네가 다가와서 무엇을 찾느냐고 물었다. 내가 뷰프라자를 찾는다고 하니까 자기는 모르겠다면서 옆에 있는 다른 직원에게 자기가 물어서 기어이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 이 사람들은 청소부 아줌마도 이렇게 친절하고, 자기가 맡은 일에는 어떠한 사소한 일에도 끝가지 해결을 해주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찾아간 뷰프라자의 직원과 의논을 하여서 내일 아침 8시 30분발 후쿠오카 직행 신칸센 열차 히카리를 타기로 하였다. 후쿠오카 도착이 14시 30분이라서 나는 놀랐다. 그렇게 빨리 갈 수가 있단 말인가.  원래 히로시마에서 일박하면서 세계에서 최초로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과 평화공원을 둘러보고, 한국인 위령탑도 보고 갈 계획이었으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바로 후쿠오카로 가기로 하여버렸다.

표를 사고나자 시간이 좀 있어서 역 바로 앞의 고쿄(皇居)에 가고 싶어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자기가 몸이 불편하여 내가 모든 여행을 중지하고 있다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또 혼자 가라고 하면 가지 않을 것을 안 아내가 함께 가기로 하였다.
지도에서와 같이 바로 두 블록쯤 앞으로, 조용하고 너른 길을 건너가자 바로 고쿄가이엔(皇居外園)이 나타났다. 여기서부터는 일본 임금이 사는 바깥마당인 셈이다. 옆으로 해자 같은 연못(지도에는 무슨 호:濠라고 각각의 연못에 이름이 있었다.) 이 여럿 있었다. 너른 숲도 있고, 잔디밭도 있는 공원 같은 곳을 길을 따라 한참 나아가니 아름다운 분수가 있는 곳도 있었고, 식당도 있었다. 좀 쉬었다가 앞으로 더 나아가니 아마도 고쿄인듯 연못 건너편에 궁궐이라고 하기에는 좀 작은 일본식 집이 보였다. 그 해자 같은 연못을 따라가니 마치 삼청동 같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이 지키고 있는 다리가 나타났다.
이런 곳에서는 태연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정당한 행동이라고 여기고 있는 내가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경찰들 쪽으로 나아가니 그들 대여섯 명이 긴장을 하고 나를 눈여겨보더니 바로 저들 앞에까지 가자 모두 부동자세를 취하였다. 들어갈 수 있습니까? 내가 영어로 물으니 거침없이 노라고 답한다. 사진을 찍어도 됩니까? 예, 마음대로 찍으세요. 이 때에는 영어로 말하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을 일본에서 많이 숙달하였으므로 영어로 말하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내가 떠날 때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시 더 나아가니 좀 더 큰 입구가 나타났다. 거기에 차가 한 대 검문을 받으면서 들어가고, 또 어떤 여인이 저들끼리 인사를 하면서 들어가는 것을 보니 직원인 듯하였다. 나도 거침없이 다가갔다. 들어가도 됩니까? 안됩니다. 언제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영어로 그 일본 경찰이 하는 말을 잘 못 알아들었다. 오늘은 안되지만 일년에 두 차례(1월2일과 12월 23일)는 됩니다. 라는 말을 나는 이틀에 하루는 되지만 오늘은 안 되는 날입니다 라고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아내에게 그렇게 설명을 하였다. 그 일본 경찰이 하는 영어는 일본식 발음이어서 좀 알아듣기가 힘들었었다. 그래도 내가 다시 못 알아들었다고 하기가 싫어서 그냥 알았다고 만 하고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하니까 괜찮다고 하여서 또 둘레를 건물까지 포함해서 사진을 찍고 돌아섰다. 보니까 저쪽에 관광 버스가 서고 한 떼의 관광객이 내리고 있었다. 아마 그들도 들어가 보지는 못하였을 것 같다.
돌아올 때에는 야마노테선을 신쥬꾸 쪽으로 왔는데 역시 30분쯤 걸렸다. 그러고 보니 야마노테선을 한바퀴 도는 데에는 1시간 정도 걸리고, 신쥬꾸가 바로 도쿄역의 반대편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목: 15일간의 일본 종주기 (5)


사진가: kec

등록일: 2010-03-10 06:12
조회수: 706 / 추천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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