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의창의 그림이야기

DEATH (독후감)
   친구 박 교수가 권하여 미국 예일대학 교수인 셸리 케이건이 짓고 박세연이 옮긴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었다.

   한 마디로 인간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을 실은 책으로 철학자의 관점에서 본 죽음과 삶에 대한 견해를 실었다고 볼 수 있다. 죽고 난 후에도 영혼이 존재하는지, 나란 존재는 육체인지, 정신(인격체)인지, 영혼인지에 대한 거의 전반부에 걸친 논의 끝에 인간은 단지 육체적인 존재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 후에도 영생에 대하여, 죽음의 호 불호에 대하여, 자살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그리하여 저자는 인간은 단지 기계적인 육체에 불과하고 영생도 좋은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할 경우에는 자살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에필로그에서 저자가 쓴 것과 같이 비판적인 안목에서 읽어보고, 죽음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보는 기회로 삼을 만 하다고 여겼다. 역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한 번 해보는 것도 좋은 기회였다고 여긴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영혼의 존재여부와, 영생, 자살에 대하여 저자와 다른 내 견해를 밝히기로 한다.

   우선 영혼의 존재에 대하여 저자와 다른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저자는 인간이 죽고 나서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이 책의 거의 전반부를 두고 논의를 거듭하고 있다. 나는 진리란 간단한 것이지 그렇게 길게 논의를 한다고 진리가 아닌 것이 진리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저자는 지루하게도 영혼이 존재하느냐 하는 데 대한 논의를 거듭하고 있다. 영혼이 존재한다는 주장들을 가져와서 모두 그 타당하지 않음을 논증한 후에 결국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영혼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 옳으면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할 필요는 없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무엇이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과학적 관찰의 대상이지 철학적 논의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의 영혼이 존재한다면 어떤 과학적 관찰에서 영혼이 관찰되고, 이것이 참으로 영혼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철학적 고찰의 대상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nde(near death experience:임사체험 혹은 근사체험)은 좋은 과학적 관찰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임사체험이라고 간단히 다루어지고 있다. 임사체험자들은 문화권을 벗어나 모두가 자신의 육체를 떠나 공중에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으며 희열을 느끼고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끝에서 눈부신 빛을 보고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고 앞으로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하지만 갑자기 다시 육체로 이끌려 와 병상에 누워서 눈을 뜬다 라고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임사 체험이 정말로 죽은 게 아니기 때문에 죽음과는 차원이 다르고 정당한 보고가 아니라고 간단히 무시해버린다. 생물학적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육체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때 엔도르핀이 과도하게 분비되고 이 때문에 희열의 느낌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시신경이 특별한 방식으로 반응함으로써 터널과 눈부신 빛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고도 썼다.
  
    그러나, 이는 저자가 물리주의(physicalism)의 입장에서 과도하게 영혼의 존재를 배척하려는 의도 하에서 많은 관찰 자료들을 배제한 후에 논의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실지 레이몬드 무디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근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그 영혼이 옆방으로 다니면서 가족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었는데... 나중에 살아났을 때에 그 가족들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하였었다고 하니 역시 그 영혼이 들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죽음에 임하여 엔돌핀이 많이 분비되었다고 해도 다른 곳에서 이야기하는 말소리를 들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찰, 측정, 사례 수집과 같은 일들은 과학의 몫이고, 이러한 관찰의 결과가 복제 가능할(duplicable) 때에는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바, 한 두 번의 같은 관찰이 있은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수천건의 동일한 보고가 있는바, 저자는 너무 한쪽에 치우쳐서 성급하게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더구나 꼭 중요한 사례는 제쳐두고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과학이 해야 할 일을 철학적 고찰로 알아내려고 하는 것은 학문적 착오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다수결에 의한 민주적 절차를 중요시 한다 고해서 2+3의 답을 다수결로 결정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요즈음 한국 정치판에서 당연한 일도 다수가 촛불 시위로 떠들면 이상한 방향으로 정책이 결정되는 것과도 같은 이치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영혼의 존재를 철학적 논의로 결정 지우려는 저자의 학문적 태도 자체가 옳지 않다고 본다.

   다음으로 영생에 대하여 저자는 지금 나 이대로 오래 살면 지루할 것이고, 기억 상실로 새로운 삶을 살면 그건 나의 영생이 아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삶이란 자신이 원하는 만큼 충분히 오래 사는 것이다 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수 억 만년을 지금처럼 산다면 얼마나 지루할 것이냐 라고 하는데... 우리 어릴 때를 되돌려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이 얼마나 새롭고 다른지를 알 수가 있는데... 수억 년을 살아도 해마다 새로운 일들, 새로운 삶들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볼 때에 이 말이 꼭 맞다 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같은 영혼이 다른 인격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윤회를 지금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 어쩌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모두 진리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공간에 대하여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절대적인 생각은 금기시 되어야 한다고 본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원리를 발표하기 전까지만 하여도 우리 인간은 시간 개념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상대성 원리에 의하여 시간의 흐름도 곳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사물의 빠르기에 반비례 하여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밝혔는데.. 결국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는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다는 것을 밝혔다. 즉, 먼 우주로 광속 로케트를 타고 날아가면 짧은 시간에 그곳에 도착할 수 있지만 돌아왔을 때에는 탑승자는 한 달 만에 돌아왔으나 지구에서는 벌써 수십 년이 흐른 후일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공간 개념만 하여도 스티븐 호킹 박사의 ‘시간의 역사’(까치글방,2006)에 의하면 우주 공간은 휘어 있다고 한다. 즉, 우리가 지금 우주를 향하여 똑 바로 나아간다면 결국은 휘어진 우주여행을 한 후에 출발 지점인 지구로 되돌아온다 고 한다. 여기서 이 말을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이 실제와는 굉장히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억만 년 영생을 하면 얼마나 지루하겠느냐고 하는 저자의 생각은 우주라는 넓고, 긴 시공간을 감안하면 지금 우리가 갖는 한갓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살에 대하여 저자는  자살 당사자가 합리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파악해 죽는 게 더 낫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이에 대해 차분하고 신중하게 생각해 충분한 정보와 조언을 바탕으로 자발적 결정을 내려 타당한 근거를 갖는다면... 자살은 다시 한 번(모든 경우에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특정한 경우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이 될 수 있다고 하였는데 나는 이에 반대한다. 저자도 밝혔듯이 자살도 엄연한(오히려 더욱 끔찍한 ) 살인인데, 살인을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이라고 할 경우 우리 사회는 아노미(anomie)상태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류 사회는 근친상간이나 살인과 같은 범죄는 사회의 붕괴를 가져올 도덕적으로 절대 금기시할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만일 근친상간을 철학적 논의의 결과 모든 경우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단지 우생학적으로 나쁘기 때문에 인류는 근친상간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피임도구를 사용하면 근친상간도 나쁜 것은 아니라는 철학적 논의를 거친다면 우리 사회는 아노미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살인도 그렇고 더욱 더 자살은 그러하다고 본다. 우리 사회에서 살인이나 자살을 이렇게 철학적 논의에 의하여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TV에서는 어떤 자살자를 추모하는 방송이 많이도 나오고 있는데 말이다.

   결국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고, 영생이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은 종교적 논의의 대상이고, 자살이 나쁘냐 좋으냐 하는 것은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라고 본다. 이러한 것들을 철학적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저자는 일반적 상식에서 벗어난 논리를 전개했다고 생각되어 졌다.

   이상으로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재미있게 긴 책을 읽어 내려갔는데.. 마음속으로는 녹음한 내용을 토대로 책을 저술하여서 그런지, 철학 책이라서 그런지 글이 좀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왜냐하면 전반부에서 지루하게 억지 주장들을 내 세워서 영혼이 없다느니, 인격체가 없다느니 하는 데에 저자가 너무 많은 논의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편으로는 죽음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접할 수 있게 해 주어서 이 책을 읽는 동안 살아온 내 생을, 또 한 앞으로 죽음에 임하게 될 때까지의 내 생을 되돌아 볼 기회를 주었었다.

  
    
제목: DEATH (독후감)


사진가: kec

등록일: 2013-01-11 05:22
조회수: 601 / 추천수: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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