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의창의 그림이야기

외롭지 않다
외롭지 않다

   흔히들 인덕이 없다고들 합니다. 나는 남에게 베풀 만큼 베풀었는데 상대가 잘 대해주지 않을 때에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저는 별로 잘 한 것도 없는데 다른 이들에게서 많은 베풀어줌을 받아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결코 외롭지 않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그 고마웠던 일들을 적어봅니다.

     제1화 엽서 한 장에 담긴 정

   저는 1983년도 3월에 대구효신초등학교로 전근을 왔습니다.  단순하게 전근을 간 것이 아니라 제 교직 생활에 큰 전환점이 된 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근무하던 안일초등학교는 당시는 경북 경산군에 있어서 이제 15년 선에 끊기어 저는 오지로 발령을 받아 멀리 영주, 어쩌면 봉화로 이동을 해야만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전해에 경상북도 대구시가 대구 직할시가 되면서 안심 읍이 직할시로 편입이 되는 바람에 그대로 대구시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저는 집에서 도보로 5,6분 거리에 있는 학교로 전근을 간 것입니다.
   이제 정년퇴직 때까지 오지로 좌천되어 갈 염려 없이 대구 시내에서 근무를 하게 되어 천만 다행이었고, 또 제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 발령을 받아간 것입니다. 첫 출근을 하던 날 학교에서는 신입교사 10여명에게 점심을 대접한다고 교무실로 내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촌닭 같이 서먹서먹하였던 저는 조심스레 교무실로 가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배달하여온 점심을 신입교사들 앞에 차리고 있는 동안 교감 선생님이 엽서를 한 묶음 가지고 오셔서 선생님들에게 몇 장씩 나누어드리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주지도 않고 지나치며 나누어주는 그 엽서가 무엇인가 궁금해서 옆의 교사 것을 곁 눈짓으로 보니 그건 영전 축하의 엽서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구 시내 학교에서는 교사가 전근을 가면 동료, 친구 들이 영전을 축하한다고 축전 비슷하게 관제엽서에 간단한 문구를 적어서 축하를 하는 관례가 있었나봅니다.
   ‘ 아! 이런 것도 있었구나. 그런데 내게는 아마도 없을 거야. 그렇기에 교감 선생님이 나를 그냥 지나가버리시잖아.’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교감 선생님은 계속해서 몇 장씩의 엽서를 신입 선생님들에게 나누어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나누어 드렸지만 아직 그 엽서는 반나마 남아 있었습니다. 그걸 들고 교감 선생님은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 저건 무얼까?’
   내가 궁금해 하는 그 순간 교감 선생님은 그 엽서 뭉텅이를 그대로 재 자리 앞에 놓으시면서
   ‘김 선생님은 축하 엽서가 많네요.!’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그 엽서들 속에는 우리 동기 분들과 그 동안 저와 친하게 지냈던 많은 분들의 축하한다는 따뜻한 문구들이 저를 반겨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신입선생님들이 저를 부러운 듯이 바라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제게 성원의 엽서를 보내어준 많은 분들이 다시 한 번 고맙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 후로 해마다 저도 친구들이 전근을 하면 엽서를 예쁘게 꾸며서 보내어주곤 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관습도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마는 그 때에
   ‘아! 내가 외롭지 않구나.’
하고 위로 받은 그 순간의 행복감은 아직도 제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제2화 기간 제 교사를 하면서

   2000년 2월 말일부로 저는 교직을 명예 퇴직하였습니다. 김대중 이란 자가 대통령이 되고, 이해찬 이란 자가 교육부 장관이 되면서 이른바 IMF를 벗어난다면서 많은 중견 교사들을 교직에서 몰아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전교조와 참교육 학부모회라는 것을 앞장 세워서 교사들의 자긍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면서 교직을 떠나도록 종용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1년간 방송에서는 교사들의 비리를 매시간 뉴스로 내어보내며 성토를 하였고, 무능한 늙은 교사 한 명을 퇴직시키면 유능한 젊은 교사 3명을 채용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었습니다. 어떤 교사의 비리가 밝혀지면 다른 교사의 비리가 밝혀질 때까지 몇 날이고 계속하여 그걸 매 시간 뉴스로 크게 침소봉대하여 방송하였습니다. 1년 쯤 지나니 학부형들의 교사를 보는 눈초리가 달라지고 우리 반 아이들의 저를 보는 눈이 이상한 듯 하였습니다. 사범학교 입학과 동시에 심어졌던 교직에 대한 긍지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젊은 55세의 나이에 견디지 못하고 다른 다섯명의 교사와 함께 사표를 던지고 말았습니다. 연금을 받으면서 어떻게 노력하면 조금은 더 벌 수 있겠지. 막연한 불안감을 갖고 퇴직을 하였습니다.
   정확하게 2000년 2월 26일이었습니다. 어제 퇴임식과 송별연을 가졌던 피곤함도 있고,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여 아침 식사 후에 평생 처음으로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느긋한 마음으로 다시 낮잠을 청하였습니다. 그 때에 어디선가 날아온 전화를 받던 아내가 교장 선생님의 전화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받았더니,
   ‘김 선생님, 지금 직원회를 하려는데 아직 출근 안 하고 뭐합니까?’
   느닷없는 교장 선생님의 성화에 부랴부랴 출근을 하여 교장실로 가니, 교장 선생님이 교무실로 저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거기에는 전 직원이 모여서 회의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벌써 새 학년도 조직이 마친 유인물을 저에게도 주는데, 거기에는 제가 기간 제 교사로 영어 전담교사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저는 제 집 바로 앞의 황금초등학교를 시작으로 62세 정년이 될 때까지 이 학교 저 학교로 친구들이 소개해주는 곳으로 기간 제 교사를 하면서 봉급을 계속 타며 지나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제가 조금 쉬고 있으면 어디 다른 곳에 자리가 있는지 알아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자진하여 명예퇴직을 한 주제에 어디 부탁하는 것이 좀 어색하여 전화 한 통화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용케도 제가 놀고 있는 것을 알고는 초빙(?)을 해 주어서 계속 다른 이들의 정년 때까지 기간 제 교사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62세가 지나서도 경북 영천이나 구미 등에서 65세가 될 때까지 간간이 기간 제 교사를 하러 오라는 연락을 받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제게 고집이 세다느니, 콧대가 높다느니 하지만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어서 저는 명예퇴직 이후에도 크게 어려움 없이 잘 지내오게 되었습니다. 결코 외롭지 만은 않았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좋은 것은 이렇게 과외로 벌어온 돈은 아내가 절대로 탐을 내지 않아서 고스란히 제 비자금(아내도 알고 있음)으로 모아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 아내는 절대로 그림을 다른 이에게 억지로 팔려고 하여 민폐를 끼치지 말고 즐겁게 그리라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모아둔 여유 자금으로 제가 그린 그림을 절대로 다른 이에게 사라고 하지 않는 대신 또 절대로 남에게 공짜로 주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여유자적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제3화 아들 장가보내기

   제가 명예퇴직을 하려고 하니 아내의 성화는 대단했습니다. 특히 퇴직을 하고 나면 우리 아들들 결혼식에 하객으로 누가 찾아주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제 고집대로 오랫동안 사귀어온 친구들이 있어서 결코 외롭지만은 않을 거라고 장담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다른 이의 결혼식에 가보아서 설렁한 식장을 둘러볼 때면 남의 일 같지 않고 불안하기도 하였습니다.

   드디어 2003년도에 저도 며느리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둘째 아들부터 장가를 보내게 되었는데, 당시 동대구호텔에 예약을 하러 가서 참으로 주저주저하였습니다. 식권을 100장 이상 사용하여야 예식비가 무료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약한 수 보다 10%를 가감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큰마음 먹고 150매를 예약하였습니다. 나중에 15매는 돌려줄 수가 있다는 가정 하에서였습니다.

   당일, 아내의 걱정이 현실이 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하면서 입구에서 하객들을 맞이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띄엄띄엄 찾아오던 친구들이 나중에는 너무 많이 몰려와서 인사를 하느라 정신없이 몇 십 분이 지나갔습니다. 나중에 좀 뜸하여지자 그 때에야 과연 하객들이 100명 이상이나 왔을까 하고 걱정을 하면서 식권을 나누어드리고 있는 큰아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아버지 벌써 두 번이나 추가로 식권을 가져와서 벌써 300매 이상 나가고 있습니다.’
   아! 그랬습니다. 제가 걱정하던 것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알게 된 사람들 보다 몇 십 년 전에 사귀었던 사람들은 거의 축하하러 와 주었던 것을 알았습니다. 특히 우리 동기 분들은 가까이 있는 분들은 거의 찾아와서 축하해 주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랬구나. 저는 제가 결코 외롭지 않다는 것을 이 때에도 다시 한 번 학인 했습니다.

제4화 인사 동에서

   2009년 2월에 서울 인사 동에서 제가 참여하는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제 개인전도 아니고 그냥 단체전에 제 작품 한 점이 전시되는 전시라서 그냥 동기회 카페에 지나가는 길이 있으면 한 번 쯤 들려보라는 정도로 소개를 했었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아내와 함께 인사 동까지 가서 제가 참여하는 전시회도 보고 다른 전시회도 보고 촌사람 서울 구경도 하고 내려온 일이 있었지만 그것도 여러 번 하게 되니 멀리 서울까지 본인도 가지를 않고 그냥 작품만 보내었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대명 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인사 동에서 점심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 여자 동기 분들도 이렇게 결정을 하면서 ‘걔가 부끄러워서 우리 여자들 많이 있는데 밥이나 잘 먹겠나..’하고 웃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연락을 받고부터 속으로 걱정이 되었습니다. 제 전시회에 오는 손님을 제가 대접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식사초대를 하는데 안 갈 수도 없고 서울까지 어떻게 갈 것인가 하는 것이 걱정이었습니다.
   여자 머리가 낫다고 아내가 대구 동기회에 나가서 같이 갈 사람을 모집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설마 서울까지 같이 갈 친구가 있겠느냐고 하였지만 아내가 한 번 말이나 꺼내어 보라고 해서 일이 회 모임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서 갈 사람을 모집을 하니 참으로 놀랍게도 세사람이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승환, 한상렬, 김경태...이런 고마울 데가 있습니까. 더구나 이승환 교장이 KTX 가족석을 예약을 하여서 드디어 우리 동기 네 사람이 서울 나들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 때문에 하는 서울 여행이니 차비라도 제가 내려고 하니 겸사겸사하는 나들이라면서 한사코 말리면서 짐짓 즐거운 서울 여행을 다녀왔었습니다. 놀랍게도 대명 회 18명 회원 전원이 인사동의 고급스러운 한식당에서 서울 사는 남자 동기들과 함께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주었고, 여자 동기들이 점심을, 남자 동기들이 저녁을 대접을 해서 잘 먹고 잘 놀다 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시회 개막식에는 많은 우리 동기들에 둘러싸여서 뿌듯하게 잘 둘러보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원수를 어떻게 갚을지 그것만 마음에 새기면서 결코 외롭지 않다는 걸 새삼 느꼈던 여행이었습니다.

  제5화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퇴직을 하고 나서 시간 여유도 있고 하여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지도 어언 10여년이 지나가니 제법 화가로서의 틀도 잡혀가고 있습니다. 공모전에도 출품을 하여서 18회나 입상을 하였고, 여러 단체전에는 국내외에 57회나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주위 다른 화가들이 개인전을 하라고 몇 년 전부터 성화가 대단합니다.
   드디어 올해에는 개인전을 한 번 하기로 하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선 집 가까이 아양아트센터(구 동구문화체육회관)를 10월 첫 주 일주일간 대관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동안 그린 작품들을 정리를 하여가고 있습니다. 보통은 개인전에서 20여점의 작품을 전시하지만 저는 욕심이 많아서 4,50점의 작품을 전시하여 ‘김의창’이라는 화가의 이제까지의 작품 활동을 전부 보여드리고 새로운 출발의 기점으로 잡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시도했던 이런 저런 작품들을 모두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기왕에 전시회를 개막하게 되면 오시는 관람객에게 즐거움을 드리기 위해서 작은 음악회도 열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들끼리 즐기자는 것이지요. 그래서 10월 1일 개막식 날 와서 연주를 해 달라고 넌지시 박종봉 교수에게 운을 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흔쾌히 사모님과 함께 색소폰  이중주를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힘을 내어 김태룡 장로에게 부탁하니 역시 두말없이 제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용기를 얻은 저는 하청호 시인에게 축시를 부탁했습니다. 정말 고맙게도 두말없이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용기를 얻은 저는 저 멀리 부산의 정경수 교장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 많은 기구들을 차에 싣고 멀리 대구까지 와달라는 말도 안 되는 억지 부탁을 들은 정교장이 ‘김 화백 전시회 하는데 당연히 가서 도와야지!’라면서 첫말에  제 부탁을 들어주었을 때에는 정말 친구가 좋구나 하는 걸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서조 선생님께 전화할 용기도 얻었습니다. 물론 들어주었고요.
   참으로 요 한 며칠은 ‘나는 결코 외롭지 않다’라는 걸 실감하면서 살아가는 나날인가 봅니다. 우리 동기 분들 모두 정말 고맙습니다. 잘 준비하여 제 첫 개인전이 무사히 잘 치루어 지도록 하겠습니다. 지켜보아주시고 많이 성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제목: 외롭지 않다


사진가: kec

등록일: 2013-06-25 12:22
조회수: 640 / 추천수: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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